874/ 이완용 평전 - 윤덕한 지음
-임오군란 1882.6.9 발발했다. (출전;다음백과 ) https://100.daum.net/search/entry?q=
임오군란은 민씨 척족정권의 무능과 부패,탐욕이 자초한 재앙이엇다 민비가 권력을 장악한 지 9년 여 만에 국고는 완전히 거덜났다.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벌써 5년 이상 봉급 구경ㅇㄹ 하지 못했으며 구식군대의 병졸들은 13개월 동안이나 급료를 받지 못했다. 이정도가 되면 이건 이미 나라라고 할 수가 없었다. 민비는 난군亂軍을 피해 충주 장호원으로 몸을 숨긴다. 당시 척족의 중심인물이던 민겸호는 병조판서 겸 정부의 쌀을 관리하던 선혜청의 당상으로서 군란을 촉발시킨 당사자였다. 그는 대궐로 몸을 피했다가 결국 군졸들의 칼날 아래 비명횡사하고 만다. -40-
-閔謙鎬민겸호은 대원군의 셋째 처남이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해 자결한 민영환의 아버지다. 민겸호는 苛斂誅求를 일삼다 난군에게 참살을 당했는데 그 아들은 충신의 아름다운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부자의 모습이다. .............임오구난 군란과 민비의 책동으로 이 나라는 일본과 청국의 군사적 각축장이 되고 만다. 일본은 군란 발발 20일 만인 6월29일 1개 대대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들어온다. 청나라는 7월7일에 4,000명의 군대가 남양만에 상륙한다. -41-
- 청나라 군대가 서울에 이버서 입성을했을 때 군란은 이미 완전히 수습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태원의 군인 동네를 습격해서 170명 여명의 구식 군인들을 군란 가담자라고 체포하여 그 가운데 10여 명을 참수해 목을 성벽에 걸어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군란이 수습된 후 '청나라군대에 의한 난리' 가 또 한번 벌어진 격이다. 그런데도 당시 조선 민중들은청나라 군대의 이 같은 만해에 대해 감히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중궁에 대한 사대사상과 외경심을 반영한는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자행된 만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내지, 불온시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사대의 행태는 그 대상를 달리해서 오늘날에도 이렇게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본은 공사관 경비를 구실로 2개 중대의 병력을 상주시킨다. 더구나 일본은 제물포조약규정에 따라 주둔 일본군의 병영시설과 그 수선비 등 유지비까지 조선정부에 부담하게 한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정부가 주한미군 유지비 일부를 부담하고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한 형태이다.-42-
- 원세개는 이후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도망치듯이 서울을 떠날 때까지 거의 10년 동안 이 나라의 조정과 민간 사이에서 '원대인' 으로 불리며 국왕을 능가하는 위세를 부렸다. 그는 인사문제를 포함해 내정은 물론 외교까지 간섭하면서 사실상 조선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원세개가 '감국대신' 으로 서울에 부임햇때 다른 날라 외교관들은 대궐에 들어올 때면 궐문 밖에서 가마를 내려 신발에 흙을 묻히며 전각까지 걸어 들어왔으나 원세개는 가마를타고 들어왔다. 국앙 앞에서 다른 나랄 외교ㅏㅅ절들은 반드시 기립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원세개만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득권을 누렸다. ..........26세의 새파란 원세개가 부르면 백발이 성성한 조선의 대신들은 꼼짝 못하고 그의 공관으로 달려가 협박조의 훈시를 들어야 했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구가할 당시 이 나라의 대권을 노린다는 3김씨는 주한 미국 대사관의 일개 정무참사간을 서로 경쟁적을 만나고 다녔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 대한 미국정부의 지원인 것처럼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도 국내정치에 외세를 이용하고 의지하려는 태도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대권을 노린다는 지도자들이 외국대사관의 일개 정무참사관을 만난다느 것 자체가 격에도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이 나라 지도층의 외세에 대한 추종과 굴종은 이처럼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과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다. -48-
- 갑신정변은 1884년 10월17일 (양력 12월4일) 개화당이 일본의 힘을 빌려 사대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부를 개혁하려고 일으킨 정변이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이날 우정국 청사어ㅔ서 각국 외교사절들과 정부 고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우정국 개설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는 것을 계기로 수구파를 일망타진하고 정권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거사는 청나라 군대의 개입에 의해 3일 천하로 끝나고 만다. -52-
- 이완용의 저서 '일당기사' 에서는 " 무릇 天道 에 춘하추동이 있어 이를 變易이라 하며, 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어 이 또한 變易이라 한다. 천도와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이는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완용의 이 變易논리가 결국은 매국을 정당화하는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이어졌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 무차별적으로 이 땅을 휩쓸고 있는 세계화 논리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58-
- 민영익이 이끄는 보빙사절단은 1883년 7월26일 인천에서 미국 군함 모노케시 호를 타고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했다. 민영익 일행은 나가사키에서 기선으로 바꿔 타고 다시 요코하마로 이동한다. 민영익은 요코하먀에 머무는 동안 '퍼시벌 로웰' 이라는 이름의 미국인 한 명을 안내인르로 채용해 미국까지 동행하게 된다. 로웰은 미국 보스톤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당시 일본을 여행 중이엇다. 이 로웰이 바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의 저자이다. -59-
-민영익은 갑신정변의 무대가 된 우정국 연회장에서 개화파의 첫 칼날을 받게 된다. .........나라의 개화를 위해 더 없이 긴요한 몇 명 안 되는 인재들이 이렇게 정쟁과 정변의 와중에서 쓰러져 간 것은 민족사를 위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메이지 유신의 원훈인 이토 히로부미가 1862년 21세의 나이로 같은 조슈 지방 출신의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함께 영국에 유학가서 그때 배운 신지식을 토대로 근대일본을 건설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63-
-홍영식과 함께 미국에서 조선에 들어와 3개월간 머물다 돌아간 로웰은 그의 찗은 체험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다음해 출간햇다. 구한말에 이 땅을 다녀간 서양인들 상당수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책으로 내고 우리가 불량배 라고 생각하는 일본의 낭인들도 저마다 조선의 역사와 풍물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이 책들이 그들의 조선침략에 길잡이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지금 이들 외국인의 저작물이 아니면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재구성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는 오래되었으되 역사가 없는 민족이 된 것이다. -82-
-사실 조선의 정계라는 것은 항상 조선을 둘러싼 외세의 세력 판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나 다름없엇다. 청국이 호령할 때는 친청 사대수구파 가 권력을 농락하고 일본이 세력을 떨치면 친일 개화파가 득세하다가 이제 러시아가 위세를 부리자 친미.친러파가 권력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말기나 구한말로써 그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1945년 8.15와 함께 남한에 미군이 진주한 이래 한국에서는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반세기 이상 친미파 세력이 정치권력을 독점해오고 있다. 이들 친미파는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까지 '미영 을 격멸하자' 고 악을 쓰던 친일 반민족 분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잇다. -117-
-앞으로도 미군이 남한 땅에 계속 주둔하는 한, 한국에서 친미집단 이외의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단언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18-
-대원군이 일본인들의 민비제거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감히 그들이 궁궐을 침입해서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하려는 꿈으 꿀 수 잇었을까. 아무리 그들이 민비를 증오하고 제거하려는 충동이 강했다 하더라도 대원군이 앞장서지 않았다면 그처럼 무모한 방식으로 일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민비시해와 관련해 오로지 일본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일본인만을 욕하면서 대원군의 역할을 외면하고 비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할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133-
- 을미사변으로 다시 일본세력의 재등장으로 당시 민비와 손을 잡고 친러. 배일정책에 앞장섰던 정동파는 하루아침에 도망자의 신세로 전략하고 말았다. 친러파의 대표인 이범진과 이학균은 이미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햇고, 이완용.이윤용 형제들은 미국 공사관을 피신했고, 나머지 정동파 관료들도 이미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후 국내에서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권력층들이 외국인에게 의지해 목숨을 구걸하는 행동은 하나의 관행처럼 굳어져 갔다. 5.16쿠데타 당시 총리 장면이 새벽에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고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 문을 두드렸다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카르멜 수녀원에 몸을 숨긴 것이나, 1979년 전두환 군부가 12.12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국방장관 노재현이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미8군 영내로 달아난 것 등이 모두 그 예들이다. -139-
- 이조 5백 년의 정치사는 정적끼리의 끝없는 피의 보복의 역사엿다. 화해와 용서,관용의 전통은 찾아볼 수가 없고 오직 복수심만이 불을 뿜었다. 오죽하면 원세개조차 민비 측에게 대원군에 대한 가혹한 정치보복을 자제하고 화해하라고 권했겠는가. 원세개만이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도 조선의 이런 정치풍토를 개탄하면서 화해를 촉구했었다. ..........이런 보복적 정치풍토는 이조 5백 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데애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승만에 의한 조봉암 제거, 박정희와 전두환에 의한 김대중 살해기도, 이 모든 것이 관용과 타협을 모르는 이 땅의 보복적이고 음모적인 정치풍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147-
- 아관파천, 이는 러시아라는 또 다른 외세를 등에 업고 친일파 정권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한 일종의 정권 탈취극에 지난지 않는 것이었다. 더욱이 아관파천은 한 나라의 주권의 상징인 국왕이 자기 나라에 주재하는 외국 공사관에 몸을 맡기는 일찍이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주권 포기 행위였다. ............청국이 횡포를 부리면 러시아를 끌러들이고, 일본이 협박을 하면 역시 미국이나 러시아에 의지해 일본을 견제해보렬고 한 것은 약소국가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며 나름의 생존방식이라고 볼아줄 수도 잇다. 그러난 이는 결국 늑대를 피하기 위해 승냥이를 불러들인 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조선 말기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마침내 이 땅을 늑대와 승냥이의 싸움터로 만들고 나라와 민족을 송두리째 승냥이 밥이 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득권층의 권익 보호를 위한 외세 의존이 구한말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3세기째 계속되고 있는 외국 군대의 주둔과 남북 분단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150-
- 운산금광은 구한말 외국인이 조선에서 얻은 모든 이권가운데서도 ㅇ 가장 알짜배기였으며 이권의 규모로 볼 때도 세계적인 것이엇다. 알렌이 1887년 이래 눈독을 들여왔던 운산금광은 이완용의 도음으로 이렇게 미국인의 손에 넘어갔다. -159-
- 독립문을 세울 당시인 1896년 11월, 국왕은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맡기고 있마ㅁ었으며 내각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조종 아래 움직이는 괴뢰 내각이엇다. 주권의 상징인 전제군주가 자기 나라에 주재하는 외국 공사관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느 것은 주권을 포기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172-
- 을사조약만이 아니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 이래 1965년의 한일 국교정상화 협정 그리고 최근의 어업협정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모든 한일회담은 객관적 조건이 한국 측에 절대로 불리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유리한 입장에 잇는 일본은 호 오히려 만반의 준비와 대책을 세워 회담에 임하느데 조건이 불리한 한국은 대비마저 소흘했으니 회담 결과는 물어보나마나일 수밖에 없다. -216-
- 조선은 일제 침략자들의 출세 코스였다. 그들은 조선을 통치하는 동안 온갖 호사의 극치를 누리고 떠날 때는 더 높고 좋은 자릴로 영전했다. 오늘날도 주한 미군 사령관은 미군 수뇌부가 가장 탐내는 자리 가운데 하나다. 미군 수뇌부에게 주한 미군 철수는 이처럼 물 좋은 자리 한나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302-
-한일합방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것이 아니다. 그런 문제가 거기에 이를 때까지 이 나라 지배집단이 한 일이 무엇인가에 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러일전쟁에 이르기 까지 20년 동안 대한제국은 일제와 청국,러시아 등 주변 열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몇 차례 맞았었다. 갑신정변 후 청일 양국이 군사적 충돌을 피하가기 위해 조선에서 서로 철군을 단행했을 때라든가, 그 후의 갑오경장은 이용하기에 ㄷ 따라 이 나라가 외세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 호기를 이 나라 지배집단은 어떻게 보냈는가. 청일 양국이 철군을 끝내기도 전에 이번에는 무분별하게 러시아를 보호국으로 끌어들이려다 원세개라는 난폭자로부터 10년 동안이나 국권을 유린당했다. ...............왜 이 나라는 항상 자신을 보호해줄 대국을 필요로 하는가. 왜 종주국이 없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가. 중국으로부터 수백 년 동안 보호받아 온 타성 때문인가. 오늘날에도 미군이 철수한다는 말만 나오면 대한민국의 상하는 일제히 자지러질 듯이 비명을 지른다. 보호자각 없으면 불안해서 못살겠다느 것은 정말 치유 불가능한 고질병인가. 개항 이래의 민족사가 수난의 연속이었지만 외국 군대와 혈맹이 되어 형제자매인 제 동족을 철천지원수로 삼아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오늘의 남북대치 상황보다 더 비극적인 때는 일찍이 없었다. 원세개의 횡포 아래서도 민씨 척족은 청국에 의지해 권력ㅇㄹ 유지하기에 급급하다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청국 군대를 불러들여 끝내는 이 땅을 외세의 전쟁터로 만들엇다. 청국 군대에 운동을 해서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납치해가게 만들고 시아버지는 일본 낭인들에 업혀 그 며느리를 죽이는 이성 잃은 권력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망국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끝내는 국왕이 자신의 조카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서 '왕실을 보호가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숨기는 주권 포기 행동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대한제국은 일제의 침략에 의해서 망햇지만 왕실과 지배집단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스스로 외세의 침략을 불러들인 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 역사는 일제의 침략 야욕만을 강조하면서 침략을 자초한 잘못에 대한 반성에는 인색하다. 그것이 마치 애국적인 태도라도 된다는 듯이......... -338-
-거듭 강조하지만 이완용은 만고의 매국노다. 그러나 그는 독립협회 활동에서 보여주듯이 한때나마 나라의 독립ㅇ을 위해 헌신했으며 민족의 장래를 두고 깊이 고노한 적이 있는 반면, 이하영이나 민병석은 그러한 괴뇌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망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민비나 대원군이 저지른 죄과는 이완용의 그것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무거운 것이나, 우리는 이완용에 대한 단죄와 함깨 이들 망국배와 매국노들에 대해서도 공정한 역사의 심판을 내려야 한다.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이완용 한 사람에게만 물어서, 이완용 혼자만을 속죄양으로 삼은 대다수 매국노들의 비열한 책임전가도 함께 물어야 한다. -342-
-.............-342-끝 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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