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 먹어라!"
1964년 12월에 치러진 중학교 입학시험 때문에 벌어진 '무즙 파동'에서 정답이 2개가 나와 학부모가 항의 하면서 무즙이라고 쓴 아이들의 부모들은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격렬한 시위를 벌여면서 이때 외친 구호가 바로 "엿 먹어라" 였고, 덕분에 오늘날까지 당시로서는 귀한 먹을거리인 엿을 먹는 일이 욕지거리가 되었다. 당시의 중학교 입학시험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이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13-
-청 상인들은 반발하는 이범진을 구타하고 상무공서에 끌고 가서 각서까지 쓰게 했다. 조선 정부의 관리가 청 상인들에게 두들겨 맞고 각서까지 쓴 사건은 개화파와 민씨 세력 간의 대리전 양상이 되었다.-69-
- 1884년12월4일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은 앞장서서 경우궁으로 고종과 중전을 인도했다. .......일국의 왕이 폭음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궁성을 빠져나갔고, 외국 군대에 보호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불과 반세기 전인 1961년 벌어진 5.16쿠데타 때에도 제2공화국의 장면 국무총리는 미국 대사관으로 도주했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수녀원으로 몸을 피했다. 권력은 무력 앞에서는 한없이 비겁해지는 속성이 있다. 1884년 12월4일 밤에도 몇 발의 폭약과 방화로 국왕은 몸을 사렸다. -95-
-갑신정변의 마지막 날인 12월7일 청군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다케조에 공사는 개화파를 제물로 바치고 발을 뺀다. 그리고 고종을 지키던 무예청 위사들이 홍영식과 박영교 그리고 그들을 따라온 일곱 명의 사관생도들 모두 몰살당했다. 밤 11시 무렵 고종은 위안스카이가보낸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선인문 밖에 있는 청군 진영에 머물렀다가 다음날 하도감에 있는 위안스카이 진영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나흘 동안 머무르다가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일국의 왕이 외국군이 주둔한 병영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고종과 조선의 쓸쓸한 말로를 암시한다. -116-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부터 1894년까지를 '잃어버린 10년'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조선이 근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청 세력을 등에 업은 민씨 일족 때문에 조선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리홍장이 파견한 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 고종을 능가하는 위세를 떨쳤다. -152-
-.........베트남을 두고 청과 프랑스가 싸운 것처럼, 일본과 청이 조선의 종주권을 차지하기 위해 충돌한 것이다. -185-
- 광화문에 시위대가 보이면 덮어놓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다는점을 생각하면, 백 년 전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종로 한복판이나 궁궐 앞에모여서 집회를 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230-
-김옥균과 홍종우, 그들은 조선이라는 그림에 변화라는 물감을 얼마나 썪는지에 대해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둘 다 똑같이 조선이 변하기를 바랐지만, 조선이라는 그림에 변화라는 물감을 얼마나 섞는지에 대해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일반 백성이 집회를 열어서 대신들에게 물러나라고 편지를 보내거나 압박을 가했고, 군주에게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받아내기도 했다. 눈을 뜨면 세상이 변했고, 낯선 것들이 슬며시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멸망의 시기라는 선입견과 치열한 변화의 시기였다는 느낌이 탁류처럼 뒤섞인다. -281-
- 조선과 대한제국 시대에는 김옥균은 역적의 대명사여쏙, 홍종우는 역적을 처단한 충신이었다.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국권이 침탈되면서김옥균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친일파들은 자신들의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를 다시 이용햇다. 반면 홍종우는 벼슬을 억기위 위대한 선각자를암살한 악당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287-
-...........-317-.끝.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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