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438 / 황제의 특사 이준 - 임무영.한영희 지음

최해식 2016. 3. 20. 20:00

-0320도서관에서 대출함.0328읽음.

-이완용,이근택,권중현,이지용,박제순을  을사오적이라고 불렀고,

 이하영을 포함하여 을사육적이라 호칭한다.

......우리의 처지가 마치 공자께서도 고향에서는 무시당하셨던 일을 보는 것 같지 않소이까? 하고 이완용이 웃어댔다. -17-

 

-법부대신 이하영은 원래 일자무식에 부산에서 찹쌀떡 행상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미국인 선교사 알렌의 요리사로 들어가게 되면서 배운 영어 덕에 일약 외교 전문가로 발탁되어 벼락출세를 했지만 글도 읽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 게 법부대신 노릇을 하는지 의문이라는 게 세평이었다. -20-

 

- 법부대신 '이하영'은 건네준 청원서를 읽지않자, 법부 형사국장 '김낙헌'은 그 태도가 무식함을 감추기 위해서라는점을 잘 알고있었다.

'아니, 이 능구렁이가? 일은 저와 평리원 재판장 '이윤용'이 다 만들고, 돈도 제놈들이 다 처먹으면서, 난 심부름만 하고 잔돈푼이나 만졌을 뿐인데 은근슬쩍 나한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단 말이지?  그래, 하긴 일자무식 찹쌀떡 행상이 미국인 요리사 노릇 하며 배운 영어 덕에 출세하여 일국의 대신까지 되려면  이 정도 후안무치는 갖추어야지. 나도 일단은 모르는 척 맞장구 쳐 주어야겠다. -160-

 

 

- 군부대신 이근택은 충주에서 상민이나 다름없는 몰락한 양반으로 살다가 때마침 민황후가 임오군란으로 피란오자 출세 좀해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매 끼니 신선한 생선을 구해 바친 덕에 간신히 황후 눈에 들어,갓 서른에 친위대 대대장까지 돼서 큰소리 좀 쳐볼까 했더니 황후는 일본 낭인들 칼에 죽어버렸고,깜작 놀라 황제를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다 발각돼 유배까지 당했지 않느냐? -21-

 

- 한성감옥서에는 학당이 있어 죄수들을 가르쳤고, 서적실도 있었다. 

1899년부터 1904년까지 6년간 수감돼 잇던 이승만이 1900년 2월 부임한 감옥서장 김영선의 협조를 얻어 만든 것이었다. -29-

 

- 박영효 역모 사건에 연루돼 1899년 1월 구속된 후 1904년 8월8일 석방될 대까지 5년 8개월간 감옥서의 터줏대감이던 이승만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79-

 

- 을미년(1895)에 황후가 시해되고,그 시해 사건 이후 대군주폐하는 일본의 시해 음모를 늘 두려워하여, 아관파천(1896) 전에는 헐버트,언더우드,에비슨 등 미국인 선교사들로 하여금 권총을 들고 3인1조로 매일 밤 침소에 불침번을 서게 했는데, 일본이 감히 미국인을 죽여가면서까지 음모를  꾀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해서였다. -67-

 

-  1905년 11월 17일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이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함께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전국은 을사오적에 대힌 분노로 들끓어 올랐다. -106-

 

- 김창수는 1896년 3월에 있었던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 조료土田讓亮(양량)을 주먹으로 때려죽이고 사형을 선고당했던 그 김창수요?  .................. 과연 이준이 알아본 그대로 김창수는 그날 이후

1949년에 죽을 때까지 45년 동안 일신의 안위는 포기한 채 오로지 조국의 광복만을 위해 헌신햇다. 그는 나라가 일제에 병합된 후 창수라는 이름은 왜놈의  호적에 올라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개명했다. 백정이나 범부와 같은 평범한 백성들의 편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호는 백범이라 지었고, 이름은 아명이었던 거북이 龜를 같은 발음의 아홉九로 바꿔 이후 죽을 때까지 김구라는 이름을 썼다. -110-

 

-시종원경  이도재는 황제의비서실장 으로 과거 동학란 때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녹두장군 전봉준을 체포해 한성으로 압송하였다.-256-

 

- 경부선이 급행이라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특급이었다. 이렇게  빠른 기차를 타고 벌써 9천 리 가까이 왔으니 이미 삼천리강산을 세 번 지나친 셈이었는데도 여정은 고작 3분의 1을 소화했을 뿐이었다. -303-

 

- 이범진은 아관파천을 주도했던 친러파의 거두이면서 이준이 처음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될 때 법부대신이었으니, 이준으로서는 법조계의 문을  처음 열어준 은인이자 여드레 만에 그 길을 닫아 11년 동안 막혀 있게 한 악연도 있는 사람이었다.

이준이 1896년 2월에 일본으로 망명한 후 같은 해 7월, 이범진 역시 주미 공사로 임명받아 고국을 떠낫고, 프랑스 공사를 거쳐 러시아에서 죽을 때까지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313-

 

- 1895년(을미사변 ?) 황후폐하께서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하였고, 1896년(아관파천 ?) 에는 일본인들의 위협이 극에 달해 황태자전하와 함께 궁궐을 나와 러시아 공사관에 1년 동안 머물었습니다.  -397-

 

 

-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아시아 정복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하러 가던 중 1909.10.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 총에 맞아죽는다.-425-

 

-이준의 딸 종숙의 남편 유래정은 유자후라는 필명으로 [이준선생전]  이라는 책을 썼는데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426-

 

-.........-427-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