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이 태어난 것은 1876년11월7일(음력). 서세동점과 일본의 조선도발이 본격화한 격변의 시대였다. -16-
-평범한 사람은 세상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배우지만, 비범한 사람은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것을 찾아 익히는 법이다. -18-
-이봉창는 1901년생으로 용산에 있는 문창보통학교를 마친 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 가게에 취직했다. .....일본에 가면 오히려 차별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봉창은 바다를 건넜다. ...우여곡절 끝에 일자리를 잡은 이봉창은 '기노시타 쇼조' 라는 이름을 쓰면서 일본인 행세를 했다.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도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차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어느날,상하이임시정부 얘기를 듣고 귀가 번뻑 뜨였다. '그래 이제부터는 본명 이봉창으로 살자 상하이에 가서 떳떳하게 조선인으로 살겠다.' -가짜 일본인 기노시타 쇼조는 다시금 조선인 이봉창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1932년1월8일11시45분경, 이봉창은 도쿄 황궁 사쿠라다몬 앞에서 천황 행렬에 폭탄을 던졌다. -46-
-이극로는 경상남도 의령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돈 한 푼 없이 빈손으로 조국을 떠났다.....17년간의 여정은 한마디로 개척자의 삶이었다. ....그의 삶은 도전과 모험의 연속이었다........1929년10월31일 오후7시. 조선교육협회에서 열린 한글날 기념식에서 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사회 각계인사 108인이 참여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68-
-1931년1월6일 '조선어사전편찬회' 회장에 선출된 이우식은 1891년생으로 이극로보다 두 살이 많았다. 경남 의령의 만석끈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는 부족할 것이 없었다. 의령읍장날때 3.1만세시위를 주동하여 상하이로 만명했고,1920년귀국한 후 안희제,최준 등이 설립한 백산무역주식회사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1929년10월31일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을 인연으로 조선어학회의 후원자로서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우식이 사전편찬회에 참여한 것은 고향 후배 이극로와의 인연때문이었다. 이극로가 1922년부터1927년까지 독일에서 유학할 때도 학비를 보내주었다. .........1936년에 이우식은 조선어사전편찬회에 1만원을 기부했다. 1만원은 요즘으로 치면 5~30억 원 정도에 해당하느 거금이다. 자신의 안위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신한 대가로 권력과 부를 축적한 악취 나는 친일파도 있었지만, 전 재산을 민족을 위해 쓴 대가로 일제의 탄압을 받고 조선어학회사건 때 회원들과 수난을 당한 이우식 같은 애국자도 있었다. -72-
-정태진은 1903년 파주시 금촌읍 금릉리에서 태어났다. 교하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수재들만 들어가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192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다.......1931년6월3일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고 9월에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75-
-정태진은 1940년 5월 영생여학교를 떠나 1941년4월23일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원이 되었다.....1942년8월의 어느날,정태진 앞으로 출두 명령서가 날아들었다. 발신자는 홍원(hongwon)경찰서 였다. -153-
-홍원경찰서에서 최고악질은 '야스다'였다......야스다와 시바타는 '사람 백정'이었다. 사실 그들은 조선인이엇다. 야스다는 안정묵, 시바타는 김건치였지만, 일본인보다 악랄한 일본의 개가 되어 있었다.사람 백정 앞에서는 고명한 학자들도 고문을 이겨낼 수 없었다.-168-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면서 최소 2천만에서 1억 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 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의 부실한 대응으로 무려 14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125-
-삶의 어떤 시기에 누구나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선택을 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순간의 선택에 의해 인생의 항로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130-
-1900년7월 경인선이 완공되었고, 1906년 경의선,1908년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1914년에는 함경도의 광산 자원을 원산항을 통해 일본 서부 지역으로 실어 보내기 위해 경성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을, 1928년에는 원산과 국경도시 회령을 연결하는 함경선을 완공했다. 철도가 놓이기 전에 함흥은 먼 곳이었지만, 이제 경성에서 열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었다. 철도는 일제의 효율적인 식민지동원.대륙 진출을 위한 것이었지만,청년 교사 정태진은 후학 양성의 포부를 안고 기차에 올랐다.-131-
-김대우는 규슈제국대학에 유학했고, 졸업 후 1926년2월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서기, 1928년2월 평안북도 박천군수에 임명되면서 친일의 길을 걸었다. .....1939년10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1943년에는 전라북도 지사에 올랐다. 1937년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시절 김대우는 학무국 촉탁 이각종으로 하여금 문안을 작성케 해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했다.
1.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2.나는 마을을 합해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한다.
3.나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
-조센징은 조선인이 일본식 발음이지만, '센징'에는 미개한 조선 민족을 깔보고경멸하는 지배자들의 오만함이 담겨져 있엇다.그리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 않는 조선인들을 불량하고 불온한 조선인이라 하여 '불량선인'이라고 했다. -145-
-조선 최고의 지성인들도 옥에서는 밥과 잠과 바깥세상에서 온 편지 한 통에 살아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다. 또한 그들은 졸리면 자고 슬프면 울고 아프면 낑낑거리고 배고프면 먹는 동물과 같은 생존 본능으로 비참한 감옥생활과 씨름했다. -173-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을 더 일찍 받아들였더라면, 8월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까? 히로시마가 잿더미로 변한 당일에라도 백기를 들었다면 나가사끼의 참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위정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꾸물거렸을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두 도시에서20만 명에 까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192-
-해방후 정태진에게도 각처에서 요청이 들어왔다. ......미군정에서도 도움을 청했다. 영어 한두 마디만 해도 미 군정과 연이 닿아 이권을 챙길 수 있던 시절이었다. 미국 유학파는 물 만난 고기처럼 장안 구석구석을 누비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정태진은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기에 마음만 먹으면 교육계나 정계에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는 미군정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거절했다. .........그가 왜 온갖 유혹을 물리쳤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동료들은 그 연유를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했고, 동지들이 고통을 당했으며 이윤재와 한징이 옥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라고.-234-
-잔잔한 바다에서는 사공이 나지 않듯이 인간은 시련과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고, 때로 역경에서 초인적인능력을 발휘한다.-241-
-조선어학회사건의 발단이 된 일기를 쓴 여학생 박영희의 이름이 박영옥으로 알려졌다.-247-
-조선어학회는 사전을 편찬하던 중 일경에 검거되었다......박영희의 일기장때문에 발단이 되었다.-253-
-누군가는 '일제하를 살아보지 않고 친일 문제를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 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변절자,민족 반역자 등은 잘 먹고 잘 살았고, 항일지사, 독립운동가,절개를 지킨 민족지사 등은 탄압받았고 목숨을 잃었거나 다행히 살아남았더라도 온갖 고초를 겪었다.-253-
-오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앞서간 이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다.-254-
-잘 봤습니다.끝-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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