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 - 박완서 지음
- "청춘,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이렇게 무턱대고우렁차거ㅔ 시작되는 글을 억양과 감정을 적절히 넣어 읽는 소리를 들으면 우린 정말 가슴이 울렁이고 피가 뜨거워졌었다. 그러난 그 글이 얼마나 허황된 미사여구의 나열이고 거짓말투성이라는 것과,우리의 감동이 실은 터무니없는 선전선동에 순간적으로 현혹당한 데 지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데은 별로 오래 거리지 않았다.
그 시절의 젊은이는 유치할 새도 없이 갑자기 어른이 돼야 했기 때문이다. 요새도 나는 무슨 명작 수필집 같은 데 [청춘예찬]이 끼여 있는 걸 보면 구역질잉 날 것 같은 혐오감을 느낀다. -29-
- 내가 어렸을 적에,어머니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어머니는 밤늦도록 바느질품으 파시고 나는 그 옆 반닫이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아 이야기를 졸랐었다. 어머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 뿐더러 이야기의 효능까지도 무궁무진한 걸로 믿으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심심해할 때뿐 아니라 주전부리를 하고 싶어할 때도 어머니는 잠깐만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망찰하셨을 뿐,곧 달덩이처럼 환하고도 슬픈 얼굴이 되시면서 재미잇는 이야기로 나의 아픔을 달래려 드셨다. 어머니가 당신 이야기의 효능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기보다는 이야기밖엔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딸의 모든 상처에 그것을 만병 통치약처럼 들이댈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57-
- [해산바가지 - 박완서 1999년작]
(베껴쓰기);
나는 주인을 찾아 가게터 뒤로 돌아갔다. 좀 떨어진 데 초가가 보였다. 초가지붕 위엔 방금 떠오른 보름달처럼 풍만하고 잘 생긴 박이 서너 덩이 의젓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여보,저 박 좀 봐요.해산바가지 했으면 좋겠네"
나는 생뚱한 소리로 환성를 질렀다.
"해산바가지?"
남편이 멍청하게 물었다.
"그래요,해산바가지요."
실로 오래간만에 기쁨과 평화와 삶에 대한 믿음이 샘물처럼 괴어 오는 걸 느꼈다.
내가 첫애를 뱄을 때 시어머님은 해산달을 짚어보고 섣달이구나,좋을 때다.곧 해가 길어지면서 기저귀가 잘 마를 테니,하시더니 그해 가을 일부러 사람을 시켜 시골에 가서 해산바가지를 구해오게 했다.
"잘생기고,여물게 굳고,정한 데서 자란 햇바가지여야 하네.첫손자 첫국밥 지을 미역 빨고 쌀 씻을 소중한 바가지니까."
이러면서 후한 값까지 미리 쳐주었다. 그럴 때의 그분은 너무 경건해 보여 나도 덩달아서 아기를 가졌다는 데 대한 경건한 기쁨을 느꼈었다. -165-
-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박완서 1995년작]
아아,오늘도 그가 무사히 보통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내 곁에 돌아오고 있다. 그동안 그를 기다린 타는 목마름은 그가 휘적휘적 집으로 걸어오느 동안도 탐조등처럼 그를 비추며 쫓았다. 그가 보통 때와 다름없이 맛있는 저녁식사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푼 표정으로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신혼 때처럼 종종걸음으로 그를 마중해 모자 먼저 받아 걸었다. 비록 늙은 얼굴에 걸맞지 않은 갓난아기 같은 민둥머리를 하고 있을망정 그는 매일매일 멋있어졌다. 너무 멋있어 가슴잉 울렁거릴 정도로 황홀할 적도 있었다. 일찍이 연애할 때도 신혼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엇다. 그건 순전히 살아 있음에 대한 매혹이었다. 그러고 나서 풍성한 식탁에 마주 앉으면 우린 더불어 살아 있음에 대한 안타까운 감사와 사랑으로 내일 걱정을 잊었다. ..................그가 선택한 인간다운 최선은 가장 아까운 시간을 보통처럼 구는 거였고, 내가 할 수 잇는 최선은 그에게 순간순간 열중하는 것이었다.-200~201-
-[사는 동안 정신머리 꼭 챙기게 - 김영현]
몇 년 전 어떤 신문에 '이 가을에 찾아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단풍 들 무렵 아차산 발치에 사시는 그이의 집을 찾아 가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월북 화가인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매화가 눈처럼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10여 리 길을 찾아 가느 이야기에 빗대어 쓴 글이었는데,수년이 흐른 얼마 전 어떤 시골 아저씨로부터 그 글의 분위기가 참 좋아 오려서 자기 수첩에 넣고 다니며 읽고 있다는 전화를 받앗다. 아마 내 글이 그래서가 아니라 서툰 글에서나마 희미하게 묻어나온 그이의 곱게 살아가는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서 그랬을 것이다.
아름답게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한그루 고목처럼 품격 있게 늙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세상인가.-221-
- 이게 내가 그이에게서 매를 맞은 사연이다. 어쩌면 예전에 제갈량잉 군령을 어기고 조조를 살려준 관우의 목을 치려 하자 유비가 황급히 자기가 끓어앉아 말렸는데, 나중에 제갈량이 유비에게 말하길,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우가 스스로 자기 죄를 참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이, 그이는 깊은 속 뜻으로 내키지 않았던 매를 드셨는지 모른다. 그이는 때로는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사람의 속을 꿰뚫지만 그 칼의 예리함을 감추는 법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232-
-.............-287-끝.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