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 일연을 묻는다 - 고운기 글 ,양진 사진
-150715읽음.
-일연은 1206.6.11(음) 경산에서 태어나, 32살에는 달성의 비슬산에서 득도의 체험을 햇다.
일연이 비슬산을 간 것은 고몽전쟁과 관련이 있다. 바로 1231~1258년까지 28년 동안 7차에 걸쳐 몽골군은 고려 땅을 유린 했다.전쟁이 끝나자 고려는 곧 속국의 처지가 되어 일본정벌을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다. 1274년(1차)과 1281년(2차)에 고려 정부가 만들어야 했던 배가 무려 1,200여 척,거기에 쏟아 부은 비용으로 나라의 재정은 거덜 났다. 당시 1283년 78살의 일연은 국사 ( 국사가 아니라 국존이다? (p281 참조))에 책봉되어 백성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기위해 [삼국유사]를 썼다.
(서울대 명예교수) 조동일 교수의 말마따나 "역사관 시정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태고 고치고 읽어 새로운 가능성를 찾도록" 만들엇다. 그러기에 이 책을 일러 조 교수는 대안사서代案史書라 했거니와, 실상 오래도록 잊혔던 그의 이름이 다시 떠오르기로는 20세기에 들어서서요 [삼국유사]를 읽고 연구하기 또한 그러하니, 나는 이를 두고 재발견으로서의 일연, 재발견으로서의 삼국유사라 한다. -5-
- 고려는 918년에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출범후 40여 년 동안 (공을 세운) 호족세력들의 힘이 세어 그들을 제압하고저 새로운 유교적 교양을 갖춘 관료가 필요하여 과거시험 제도를 958년 광종 때부터 시행하였다.
신라말기에도 과거시험 비슷한 제도로 원성왕4년(788)에 독서삼품과를 운영하여 귀족들의 권한 을 견제하려했으나 기존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28-
- 몽골족은 영웅 '테무진'이 부족을 통일하고 자신을 칭기스칸이라 부르며 대몽고국을 세운 것이 1206년, 곧 일연이 태어나던 해였다. -33-
- 현풍에서 유가사 절까지 버스를 타고, 유가사 절뒤로 암자가 두 개 있다.하나는 비구니의 수련장이고 다른 하나가 도성암이다.
비슬산 정상의 바위가 부처님의 누워 있는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 내가 찾아가는 도성암은 바로 그 바위 아래에 있었다,
일연의 기록에서도 보이지만 비슬산은 온통 바위투성이다. 부처님이 누워 있는 듯한 산 아래에서, (우리가 찾는) 일연 또한 이 길을 오르며, 바로 이쯤 해서 부처님 바위를 바라보며 합장을 했으리라. 비구니 수련장이라는 암자 앞에서 도성암까지는 그로부터 험한 산길이었다. 다시 이 골짝 굽이굽이에 일연의 발자국이 찍혀 있으리라 생각하며 걷는다. 이승의 세월은 그 발자국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지만, 누구든 그를 생각하는 마음속에는 어제인 듯 살아 있는 법이다.-113-
- 고즈넉한 오어사의 전경 ;
포항에서 출발한 버스는 오천읍에서 다시 오어사까지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오천읍으로 들어가기전 군부대 입구에 '일월지 입구' 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을 간직한 해.달 못(=日月池)이다. 군부대 안에 잇어서 들어가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오천읍에서 오어사가는 길은 완전히 시골길이었다. 사실 답사란 이런 길을 걸어서 다녀야 제격이다. 당시 살던 사람과 같은 분위기를 느껴보자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이 했던 방법대로 걸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걷던 길을 차 잡아타고 잠시잠깐에 이르고 보니 싱겁기 그지없다.)
일연의 강화도 체류는 3년만에 끝나, 59살이 되던 해 번잡한 도회생활을 했던 강화도에서 이런 궁벽한 시골로 돌아와야만 했던 일연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오는 길에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버스 종점이 항사동인데 오어사 절까지는 큰 저수지를 끼고 걸어서 한 십여 분 좁은 길을 구불구불 걷다 보니 호수를 앞에 두고 오어사는 고즈넉이 서 있었다. 절 뒤편은 운제산이요 양 옆 계곡과 능선을 타고 올라가니 좌우에 각각 원효암과 자장암이 있었다. -177-
(**참고글)
일연은 1261년, 그의 나이 55세 때, 임금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거서 선월사에 주석하였다고 그의 비문은 전해 준다.
(일연의 강화도 체류는 3년만에 끝나, 59살이 되던 해 포항 오어사로 내려온다 )
왜 임금은 그를 부른 것일까?
최씨정권이 물러난 마당에 새로운 정권 담당자를 돕는 승려가 필요했을 것이며,일연은 거기서 선택된 대타였다.고 연구자들은 주장한다.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 고운기 지음]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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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내린 감은사 삼층석탑은 어떤 모습을 할까?
아침 햇살을 조용히 받은 절터가 선비한 천 년의 역사를 가만히 일러 주는 듯했다. 넓이는 대단치 않으나 산중턱을 밀어 다듬고 축대를 올린 모양이 소박하며서도 위엄이 있다. 지금 절은 없어지고 그 터만 완연히 남아 있는데, 동서로 벌린 삼층석탑 두 개는 고색창연한 대로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서 있다. 크기가 불국사 석가탑과 비슷한 이 탑은 국보 112호로 지정되어잇다. -190-
- 헌강왕 때라면 신라의 번성이 극에 달해, 경주 시내이 집들은 모두 기와로 지붕을 이었고 땔감으로는 숯만 쓴다고 했으니, 그 풍요로움을 어디다 비길수 잇을까. 이때가 곧 신라시대의 한 정점이엇고, 달도 차면 기우는 이치대로, 또 한 시대는 이미 내리막길로 들어서고 있엇다. 번성 뒤에는 사치와 향락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한 사회의 기강을 흩트리고 계층간의 불화를 낳는다. -192-
- 운문사로 들어가는 길 ;
울창한 송림의 연속이었다. 월정사 들어가는 길의 전나무 숲도 장관이려니와, 이곳의 소나무 숲은 그와는 다른 분위기로 우리를 맞는다. 월정사의 숲이 이국적이고 위압적이라면, 이 꼬불꼬불하게 서 있는 소나무들은 우리네 심성에 어울리는 친근함이 있다. "속세의 때는 벗고 들어오라"고 살며시 속삭이는 할아버지의 타이름 같다고나 할까.
절 가까이 들어서자 시냇물은 더 맑게 흐르고 있다. 길은 어느 산사를 찾아가는 것과는 달리 평탄하게 이어져 있는데, 조금 걷다 보니 마치 시골의 한 대갓집을 여상시키듯 길가에 긴 담이 둘러 있고 범종루가 나타난다. 이런 위치이니 운문사는 평지가람이라 해야 할 것 같다. -227-
- 운문사에는 근처에 일연의 비석이 서 잇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신빙할 수는 없지만 古老들의 이야기란 우연한 기회에 증명되는 경우도 있기에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인각사에 전해 내려오는 일연의 비석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물론 실물이 없는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운문사 스님들에게 일연은 어떤 존재일까. 이 절에 살다 간 수많은 승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지만, 사람은 가고 없어도 절은 의연히 남아 옛날을 전해 주는데 , 그것이 또한 인간세상의 무상함을 말하기도 하는 듯 싶었다. -239-
- 마에관세음보살상 ;
남산의 냉골에 자리 잡고 잇다. 뾰족한 바위가 여러 개 서 있는 가운데 하나를 골라 새겨놓은 이 보살상은 겁나지도 여리지도 않은 우리네 심성을 가장 잘 담아놓았다. 약간 西向을 서 있는 이 불상을 제대로 보려면 저물 무렵에 가야 한다. -255-
- 몽골의 간섭은 사사건건 미치지 않는 바가 없었고,툭하면 자기 나라로 불러들이거나 심지어 왕을 바꾸어 버리는 일도 있었다.
예컨대 충렬왕은 24년(1298)에 충선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이듬해 복위하고,충선왕은 다시 즉위하였다가 5년(1313)에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원나라로 가야 했으며, 충숙왕은 17년(1330)에 충혜왕에게 물려주었다가 2년 뒤 복위되엇다. 그뿐인가.충숙왕 사후 충혜왕은 복위하려고 원나라 집사성에 뇌물을 주는가 하면 ,충렬왕은 환국하려는 충선왕을 적극적으로 막기도 하였다. 이 지경이니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274-
- 일연은 세 번씩 고사하였으나 왕명은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국존에 책봉되고 원경충조라는 호가 내렸다. 국사를 국존이라한 것은 원나라 간섭기의 일그러진 초상의 하나이다. 관직의 이름을 한 단계 낮추어서 부르게 했는데. 국존 또한 국사를 한 단계 낮춘 호칭이엇다. -281-
- [삼국유사]는 오늘날 여러 면에서유용하다. 이야기들이 삼국시기 이전 우리네 민족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이 고상한 학자에 의해서쓰여진게 아니고, 피폐해지는 민중의 정신세계를 살리고자 하는 한 노스님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아름답기만 하다.
일연은 몽골전란기를 목숨을 보존하기도 힘든 위태함 속에서 살았다. 민족으 자존심이 철저히 유린당하던 시기의 國師로서 누구보다 뼈저리게 민족의 자존을 염려하였다, 그런 그의 고민과 쓰러진 역사의 영광을 복원하려는 깊은 뜻을 우리는 이 책에서 읽는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우리가 [삼국유사]를 읽는 마음은 각별하다. 이 책은 민족사의 중요하고 결정적인 부분을 전해 줄 뿐만 아니라, 잊힐 뻔했던 고대 삼국사의 정취를 우리들 가슴에 전해 준다.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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