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 삼국유사, 바다를 만나다 - 정천구 지음
-150624저녁부터 읽음.
-[삼국유사]가 집필된 때는 대략 1289년이다
일연(1206~1289)이 생전에 완성하지 못하고 남겨둔 것을 제자들이 찾아내 간행함으로서,일연이 입적한 때를 집필 완료된 시점으로 잡는다,
일연이 죽고 한 세대가 지난 뒤, 이탈리아에서 [신곡](1321)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탄생하였다.단테(1265~1321)의 [신곡]은 유럽에서 인문주의 라는 지적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유럽의 인문주의가 몽골제국이 동과 서를 잇는 육로와 해로를 장악하면서 촉발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다. 그 몽골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잇던 시기에 일생을 보낸 이가 일연이다. 그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 또한 그런 인문주의를 담고 잇다는 사실, 이는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인문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는 아직 시작되고 있지 않다. 오래도록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하고, 거의 근대에 이르기까지 버림을 받았다가 간신히 민족주의와 더불어 조명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아직 그 안에 담겨 잇는 인문주의,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인문주의를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6-
- 연오랑과 세오녀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이야기' 다음에 나온다. 제왕 중심의 역사나 사건을 서술하고 있는 <기이>편에 이처럼 평범한 부부의 이야기가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사실 官撰관찬.역사서인 [삼국사기] 실릴 리는 더욱 만무하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삼국유사]가 매우 독특한 역사서로서 평가받는다.-27-
- [삼국유사]의 '유사' 는 이중적인 뜻을 담고 있다. 먼저, "버려진 일"을 뜻한다. 누가 버렸으며,무엇을 버렸는가?지배계층이 버렸고, 민중의 삶과 그 이야기들을 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관찬 역사서에서 "빠지거나 남은 일"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삼국유사' 는 관찬 역사서에서 버려진 삼국의 일들을 모아 엮은 것을 의미한다.
삼국유사는 신라쪽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이는 일연이 상상으로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고,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서술하였다는 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준다.(일연은 광주의 무량사에서 몇 해 살았고, 개성에서 잠시 머문 것을 제외한면 거의 신라 땅에서 평생을 보냇다. 그러니 [삼국유사]가 신라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역사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가 사실의 세계라고 생각하는데 , 역사는 '사실 자체' 가 아니다. 역사는 사실에 대한 '이해 또는 인식' 이다. 사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뜻하지만, 역사는 기록된 사건이다. 이는 사실과 역사 사이에 史官이라는 역사 편찬자가 개입한다. 따라서 역사느 역사가의 관점과 취사선택에 의해서 재구성된 기록일 뿐이다. 과거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일어난 일은 그 일이 일어나자마자 사라졌다. 다만 누군가가 특정한 관점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서술한 기록이 남아서 역사가 된 것일 뿐이다.
[예기]의 <옥조>편을 보면, "일은 좌사가 기록하고, 말은 우사가 기록하였다" 는 구절이 나오다. 이들 사관이 기록한 것을 정리한 것이 역사서다. 사관이 처음 기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글 자체가 아니라,일과 말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기록되는 순간 그것은 입체적인 것이었으나 평면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잊어서느 안 된다.
역사의 이해 또는 해석이란 그런 평면을 입체화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추론과 상상력의 힘을 빌려서야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이해하고 해석한 것도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재구성된 사실' 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야기 또한 재구성된 사실일 수 있지 않을 까? 사관의 기록만이 아니라 민중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과거의 사건은 재구성될 수 있지 않을 까?
때로는 민중의 이야기가 더 사실에 근접할 수 있지 않을까?
상층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민중도 엄연히 역사의 주역이었고, 그들의이야기는 또 다른 역사 이해요,해석이었다. 일연은 사실에서 주역이었음에도 배제될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역사,그리고 진실을 표현했던 말과 이야기의 역사를 쓰려고 했다. 그 결과물이 [삼국유사]다. 그리하여 "기록된 것만이 역사는 아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 또한 역사다" 라는 민중의 목소리를 [삼국유사]는 들려주고 있다. <연오랑세오녀>는 그렇게 민중이 주역인 역사, 이야기의 꼴로 전해지는 역사다.
연오랑이 바다를 건너 일본 변방의 왕이 되었다 는 사실을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 때인 158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분명하게 적고 있다. 이는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가 역사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28~33-
- [대지]의 작가인 펄 벅(1892~1973) 여사가 1960년대 한국에 왔을 때 경탄을 금치 못한 것이 한국 여인네들의 바느질 솜씨였다. 우리에게는 평범한 것이 그이의 눈에는 예술로 비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한국 여인네들의 조상이 바로 세오녀다.
일본의 고대에는 한반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가서 문화를 전하고 지배층을 이루었다. 이들은 대부분 왕족,귀족,승려와 같은 지식인들이엇다. 그러나 평범한 백성들 가운데도 앞선 문화를 체득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문화를 전한 이들이 바로 연오랑 세오녀이다. 이들이야말로 민중의 영웅이요, (전쟁 영웅이 아닌 ) 문화영웅이었다. -37-
- 울산에는 태화강이 있다.
울산이 신라 시대에 선진문화가 흘러드는 항구요 요지였음을 상징한다. 태화강이 중국 오대산의 '태화지' 에서 비롯되었다 는 것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중국 불교 가운데 화엄종의 중심지가 오대산인데 불교의 성지였는데,신라의 승려들도 그 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삼국유사] 곳곳에 나온다. 신라의 승려들이 문수보살을 만나면서 거친 곳이 바로 태화지라는 못이다. 그들이 신라로 돌아올 때는 울산항으로 들어왔고, 그래서 강의 이름이 태화강이 되었고, 태화강 남쪽의 산은 문수산이다. 한마디로 태화강은 선진문화가 흘러드는 강이었다.-38-
- [삼국유사]에 <내물왕김제상>이 나온다. '박제상'이 아니라 '김제상' 으로 되어 있다. 박제상으로 알려진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랐기 때문이다. 당연히 정통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김제상이라 하였는가?
민중이 그렇게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40-
-신라시대에는, 김씨 왕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내물왕(356~402)때부터 신라에서는 정치와 사회에서 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가야보다 약했으므로 시련을 겪어야 했는데,내물왕의 두 아들이 각각 왜국과 고구려에 인질로 가게 된 데서도 그 점은 드러난다.
"제17대 나밀왕 36년(390)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요구하자 왕의 3子인 미해를 왜국에 보냈는데, 미해의 나이 열 살이엇다"
나밀왕은 곧 내물왕이다. 민중이 나밀왕이라 했던 까닭으로 일연이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음을 의미한다. -40-
- "눌지왕 3년(419)에 고구려 장수왕(394~491)이 사신을 보내와,왕의 아우인 보해를 고구려에 (인질로)보냈다."
장수왕은 사신을 통해 보해와 친분을 돈독하게 하고싶다고 말했지만, 그 속뜻은 인질로 삼겠다느 것이다. 내물왕 때 고구려 광개토왕(374~413)의 도움으로 가야의 군사를 무리치면서 고구려의 속국처럼 되어버린 신라로서는 거절할 수 없엇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는 '실성니사금'이 인질로 보냈다고 적고 있다. 실성은 내물왕37년(392)에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내물왕 46년(401)에 돌아왔는데,이를 원망하여 내물왕의 아들들을 미워하였다. 그래서 내물왕의 아들들을 인질로 보냈고, 이윽고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눌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결국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고, 실성왕 쪽이 밀려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42-
- 눌지왕 의 두 아우가 인질이 되었던 것은 백성의 일을 지극하게 생각해서이며, 또 국력이 미약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 신하들은 삽라군 태수 '김제상'을 천거하였다. 김제상이야말로
지혜와 용기를 아울러 지닌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인질로 잡혀 있던 왕자들을 빼낼 계책을 마련하는데 필요햇고, 용기는 적국 깊숙한 데로 들어가서 제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인질을 빼내 오는데 요구되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 김제상이다.
이에 김제상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서, "임금에게 걱정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다" 는 말을 한 뒤, 곧바로 북해의 길로 해서 고구려에 갔다.-44-
(** 참고글 ) ;
범려가 월왕 구천에게 말했다. "모름지기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이는 신하 된 사람의 치욕이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적국으로 볼모가 되어 가시니 이는 신하들의 치욕입니다. - 회계산에서 오왕 부차에게 무릎 꿇고 항복한 월왕 구천이 오나라의 볼모로 떠나는 날 절강 나루터에서의 장면이다.
구천이 월나라의 사직이 염려되어 범려에게 섭정을 맡기며 부탁하자 범려가 구천에게 한 답변이다. 범려는 문종에게 나랏일을 맡기라 하고 구천과 함께 오나라로 가 고초를 겪으며 함께 복수를 꿈꾸었다.
- 춘추공은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기리킨다. 그는 진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8년을 다스린 뒤 661년에 59세에 세상을 떠났다.
대체로 '태조'는 왕조를 일으킨 왕에게 주어지는 시호고, '태종' 은 그에 걸맞은 업적을 남긴 왕에게 주어지는 시호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두 번째 창업과 같은 위업이었으니, 그런 시호가 주어진 것이다. -52-
-백제의 마지막 왕은 무왕의 1子인 의자왕義慈王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영웅답게 용감하고 대담하여 결단력이있었으며,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잇엇다" 고 한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뒤, 갑자기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소흘히 하여 나라가 위태로워졋다고 한다. 정말 그랫을까? 그래야만 했다! 마지막 왕의 패악이야말로 왕조으 멸망을 손쉽게 설명하는 길이었으니. 그러나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쇠망한 나라의 역사는 대체로 그 나라를 이은 자, 곧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므로 왜곡과 굴절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승자의 역사,승자의기록에서 패자를 들여다볼 때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안에 숨어 있는 진실을 읽어내야 한다. -53-
-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에는 "660.6월, 왕흥사의 절문으로 배가 큰 물결을 따라서 들어오는 것을 중들이 보았다" 라고 적혀있다.
배가 큰 물결을 따라서 들어왔다는 것은 소정방의 군사가 서해를 건너올 조짐이엇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백제의 멸망이 바다와 강을 잃으면서 초래된 것임을 꿰뚫어본 민중의 안목이다. 그리고 이야기로써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그 지혜 또한 대단하지 않은가. 민중을 단순히 어리석은 무리로 치부하는 것은 지배층이 늘 저지르는 오류다. 역사를 한번 돌아보라. 민심에 등을 돌린 자는 망했고,민심을 얻은 자는흥했다-60-
- 역사기록이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간략하고 무미건조하기 때문에,읽는이가 상상력을 발휘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 -65-
- 사천왕사는 [삼국사기]에 <신라본기> 에 문무왕 19년(679)에 낙성되었다. 사천왕사란 말 그대로 "사천왕이 지켜주는 절"이라는 뜻이다. 사찰마다 입구에 들어서다 보면 만나게 되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서 사나운 형상으로 노려보는 혐상궂은 이들잉 바로 사천왕이다.
신라는 도대체 사천왕사로 무엇을 지키려 하였을까? 바로 당나라의 군사를 막으려고 하였다. 668년 삼국통일 후에도 당 황제는 50만 대군을 배를타고 신라로 보내었으나 명랑법사 가 세운 사천왕사 덕분으로 이들 당나라 배는 모두 바다에 침몰되엇다. 바로 불법佛法이 수호신인 사천왕이 서쪽 바다르 지켜준 것이다. -66-
- 외교적 술수가 낳은 망덕사 :
사천왕사에서 도로를 건너서 맞은편에 망덕사가 있었다.
망덕사은 "덕을 우러러보는 절" 이라는 뜻이다. 누구의 덕을 우러러보는가? 바로 당 황제다. 그러나 실상은 오히려 대국을 희롱하면서 통일이란 대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세운 절이다.
당나라 사신 '악붕귀' 에게 사천왕사를 보여주면 비법이 새어나간다고 여겨, 세운 것을 비밀로 해야만 그 효력이 유지될 수 잇다고 여겨 사천왕사르 대신할 수 잇는 절을 새로 지엇으니, 바로 망덕사였다. 이를 본 당나라 사신은 소국 신라가 대국 당나라를 기만했다는 것이 드러나 금 천 냥을 뇌물로 주어 사신을 달랬다. 그러자 사신은 돌아가서 황제에게 당나라에서 한림랑으로 있던 신라의 유학자 '박문준'의 말대로라고 아뢰엇다. 이로써 두 나라의 관계는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을 수 잇었다. 망덕사라는 절 이름은 그때 사신이 "망덕요산의 절이오" 라고 한 말에서 유래되엇다.
예나 이제나 외교에서는 상대의 마음을 휘어잡는 빼어난 언변과 두둑한 배짱이 요구된다. 박문준은 그런 능력을 적국 한가운데서 보여주엇다. 국가 간의 외교나 전쟁에서는 술수가 흠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효과적이냐, 얼마나 절묘하게 구사하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망덕사는 당 황제르 흠모한다는 미명하에 대국의 황제까지 갖고 놀겠다는 신라인의 기상이 배어 있었던 절이다. -67~69-
- 국립경주박물관을 끼고 인쪽으로 돌아 곧장 들어가면 절터가 바로 인용사지址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는 불교에서 늘 가르치는 바이지만 , 역사의 현장에 서면 더욱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숙위는 당나라 주변 국가에서 왕자(= 김인문 )를 당 조정에 보낸,일종의 인질이었다. 인질이기는 했으나 양국 간이 외교적인 일을 도맡아 했으므로 실직적으로는 외교관이다. 이런 이유로 약국간에 갈등이 생기면 가장 먼저 문책을 받는 이는 숙위일 수 밖에 없다.
통일을 이루려고 그토록 애를 쓰다가 이제는 '서악동 고분' 에 누워 있는 김인문과 그 부친 무열왕은 천년이 지난 뒤에도 후손들이 그들의 위업을 이어가리라 여겼을까? 전쟁없이 오로지 외교로 화합과 통일을 이룰 수 있느냐? 하는 그런 의미에서 김인문은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조명해야 할 인물이다. -70~72-
- 토함산에서 감포로 방향을 잡고 한 참을 내려가면, 감은사지를 만난다. 신문왕(?~692)이 선친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지은 감은사의 터다. 여기에는 웅장한 석탑이 둘 서 있다. -75-
(** 참고글 ;감은사지 3층석탑 http://yun-blog.tistory.com/692# )
- 만파식적萬波息笛은 "온갖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 라는 뜻이다-91-
- 역사서를 볼 때는 누가 어떤 관점에서 서술하였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자주 잊고 있고 있는 것은 바로 역사서에 기록되지 못한 것이 기록된 것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들여다 보는 역사서란 역사으 전부가 아니다.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기록자의 취사선택 과정을 거친 것 가운데 일부만이 남아 전한다. 만약 있는 그대로 다 기록했다면, 기록물로 가득 차서 사람이 머물 공간조차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기록을 주로 상층 지배층의 남성들이 했다느 ㄴ사실이다. 하층의 민중이나 ,여성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더욱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열전' 이라는 항목을 두어,張三李四나 여인들 가운데도 제왕에 버금가느 역사적 인물이 있음을 찾아내어 실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삼국유사] 를 편찬한 일연도 사마천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아예 민중의 아야기 자체를 하나의 역사처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95~96-
- 벼랑 위의 꽃, 철쭉 :
"성덕왕(702~737)때,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여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으 먹었다. 곁에는 깎아지른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산은 높이가 천 길은 되었느데, 그 위에는 척촉화가 한창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水路가 그것을 보고는 곁에 있던 이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저 꽃을 꺾어다 주지 않겠소?' "
위는 삼국유사의 <수로부인>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척촉화는 우리말로 철쭉꽃인데, 이름 그대로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하는 꽃" 이다. 짙붉은 빛을 띤 철쭉꽃이 바위산 위에, 게다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그 아름다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98-
- 부산 노포동에서 울산을 가다보면 울산의 율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망해사지'를 가르키는 푯말을 따라 가면 영취산으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은 이 영취산을 문수산이라 부르고 잇는데, 문수산은 "문수보살이 머무는 산" 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양산의 통도사가 자리하고 잇는 산을 영취산이라 부르면서 이 문수산의 본래 명칭이 영취산이었음이 거의 잊혀졌다. 문수산,아니 영취산의 동쪽 끝자락에 '망해사'의 절터가 잇다. 망해사는 저 옛날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서 처용랑을 만난 뒤에 세운 절이다. 망해사는 "바다와 같은 너른 마음을 지닌 이" 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절이다. -119-
- 역사 속 빛과 그림자 :
"제 49대 헌강왕(875~886) 때, 서울에서 지방까지 집과 담이 이어져 있는데,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길거리에서는 풍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철마다 알맞았다. "
집과 담이 이어져 있었다느 것은 인구가 많았다는 뜻이고,초가가 없었다느 말은 집들이 번듯했다는 의미다. 짤막한 서술이지만,풍요롭고 태평한 시절에 대한 묘사로는 충분하다. 이 대목은 오늘날 울산의 공장 지대에 굴뚝들이 솟아 있는 풍경과 겹쳐진다. 실제로 울산은 부자 도시 1위로 꼽히고 있어 신라의 전성기와 사뭇 비슷하다. 사실 신라의 번영도 울산항을 통해 이루어지던 대외 교역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신라의 번영은 바로 울산의 융성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잇다 -121-
- 헌강왕 5년에도 일길찬 '신홍'이 모반을 일으켰다가 사형을 당했다. 그럼에도 태평성대로 묘사 되었던 것은 "지는 햇살이 더욱 강렬하다" 는 그런 역설의 표현일까? 풍요와 사치의 배경에는 지배층의 권력욕과 골품제라는 신분제에 대한 불만, 그리고 소외된 민중으 한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잇엇다. 빛이 강할수록 그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는 법!-123-
- 헌강왕은 경문왕(861~875)의 아들이다.
경문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의 임금님이다.
그는 헌안왕(857~861)의 사위였다가 왕위에 올랐다.
지지기반이 약한 헌강왕은 외부 세력의 도움을 받으려고 울산으로 왔다.
왜 울산일까? 울산은 지금도 공업도시이면서 주요한 산물이 드나드는 항구 도시이다. (공교롭게도,) 울산은 신라 시대에도 그러했다. 특히 가야가 멸망한 뒤에 가야으 철은 이곳으로 들어와서 서울인 경주로 욺겨졌다. 천년도 전에 이미 울산은 철강 산업의 기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울산항을 통해 멀리 아랍의 상인들까지 내왕을 했으니, 이 울산은 철강과 교역이 흥성하던 곳으로 강력한 신흥 세력이 구축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엇다. -124-
- 경주를 흔히 '천년고도' 라 일컫는다.
김해 또한 그런 고도의 향취를 여전히 풍기고 있는 도시다. 가락국 오백 년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도시이다. 김해의 중심에는 수로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기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의 능묘가 2천 년 뒤에도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일이다.
수로왕릉의 서쪽에는 수릉원이 있고 ,수릉원의 서북쪽에는 대성동 고분박물관이 있고, 여기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국립김해박물관이 있다. 국립김해박물관의 동쪽에는 수로왕이 탄강했다는 구지봉이 있다. 이 구지봉은 수로왕비릉으로 이어져 잇다. 이러니,이 일대를 걷는 일은 그대로 역사의 자취를 밟는 일이 된다. 어찌 '오백년고도'가 아니겠는가만은, 정확하게 말하면 '잊혀진 고도' 라고 해야겠다.-140-
- '수로왕'은 "처음 나타난 왕" 이라는 뜻이다. 최초의 왕, 왕으로서 시초라는 말이다.
신화나 서사시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논리가 따로 있다. 그것을 읽어내야 한다. -143-
- [황룡사장륙존상]에는 황룡사가 진흥왕30년(569)에 완성되었다. "(황룡사를 완성하고) 얼마 안 가서 바다 남쪽에서 큰 배 한 척이 떠와서 하곡현 사포에 머물렀다. "
하곡현 사포는 지금의 울산 염포다. 태화강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사이에 두고 울산항과 마주하고 잇는 곳이다.
염포삼거리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다. 그기에는 '염포 삼포개항지' 라고 쓰여 있다. 삼포란 부산포, 내이포와 함께 일본과의 교역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166-
- 비단은 고대에서 중세 내내 전 세계에서 널리 교역되던 중국산의 진귀한 물건 으로, 서쪽으로는 아라비아와 로마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일본에까지 전해질 정도로 명품의 대접을 받았다. 중국에서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 지방을 잇는 고대 무역로를 '비단길' 이라 부를 정도였으니,더 말해 무엇하랴.
지금은 염포가 자동차선적장으로 바뀌었다. 저 옛날 비단이 들어왔던 곳에 자동차들이 배에 실리기르 기다리고 잇다. 이쯤되면 사포가 염포로 바ㅟ었던 것처럼 염포도 '차포'車浦로 그 명칭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 까? 염포에는 조선소가 있고,거대한 배가 떠있다. 그 풍경이 참으로 기특하다. 왜냐하면, 1400여 년 전, 이 바다로 인도에서 띄운 배가 철과 황금을 싣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기서 철로 배를 만들어 다른 나라로 수출되어 나가고 있다.
민중으 이야기는 역사서의 기록보다 덜 사실적이다. 그러난 기록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가 기록이 말해주지 않는 것을 들려주는 일이 더 많다. 이야기는 사실보다 진실을 들려준다고 할까? 그러니 우리는 그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숨겨진 역사를 읽어야 하리라.
현재 자동차 산업은 철강 산업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그 철강 산업의 원재료는 이미 6세기에 염포를 통해 들어오고 잇엇다. 그리고 신라의 장인들은 그 철을 가지고 황룡사의 장륙존상을 빚어냈다. -169~170-
- 566년에는 기원사와 실제사가 낙성되고, 황룡사도 완성되엇다.
574.3월,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주조되었다. <황룡사장륙존상>에서는 그 일이 "단번에 이루어졌다"고 묘사되고 잇다. '단번에 '라는 말은 철의 제련 기술과 불교 철학이 절묘하게 결합되고 또 제대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172-
- [삼국유사] 의 <전후소장사리>편에서는 "선덕여왕 때인 정관 17년 계묘년(643)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사리 백알,부처가 입던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을 가지고 왔다" 라고 적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이것이 흩어지지 않은 채 천년을 내려올 수 있었으며, 또 신라에 전해질 수 있었을까? 이것이 [삼국유사]에 실린 것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진실이 담겨 잇어서가 아닐까?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황룡사의 탑,태화사의 탑,통도사 戒壇계단에 각각 두었다고 한다. 통도사는 자장법사가 창건하였고,계단을 세워서 계율을 정립하여 신라 불교의 토대를 단단하게 한 절이다.-189-
- [삼국사기]의 편향성 :
[삼국사기]에는 불교와 관련된 기사가 소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는 아무릴 편찬자가 유학자라고 해도 역사가로서의 균형 감각을 거의 갖추지 못햇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라고 여겨진다.
중국의 고승전에도 전기가 실려 잇는 원효와 의상이 전혀 [삼국사기]의 <열전>편에 끼이지 못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역사라는 것이,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가가 자신의 취사 선택에 따라 기록한 것 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형평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삼국유사]의 편찬은 삼국의 역사를 살피는 데 있어 최소한의 균형을 이루게 해준다는 의의를 갖는다.-226-
- 상해는 아시아에서 가장 길고 세계에서 3번째로 긴 장강의 맨 아래에 있는 도시로,중국 동해 즉 지금 동중국해의 입구다. 그래서 "바다의 첫머리"라는 뜻의 상해라 불린다. -229-
- 원광은 중국 수나라로 유학하여 11년동안 공부한 후 600년에 본국으로 돌아와, 가슬갑에 머물고 잇엇다. 이 가슬갑은 청도 운문사에서 동쪽으로 9천 보가량 되는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이 가슬갑으로 원광을 찾아온 두 청년이 있었다. 바로 귀산과 추항이라는 선비였다. 원광은 그들에게 세속오계를 전해주었다. 그것이 바로 사군이충,사친이효,교우이신,임전무퇴,살생유택이다.
원광은 승려인데,왜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을 가르쳤는가? 이는 상대가 승려가 아니었으므로 승려로서 지켜야 할 덕목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부처가 중생의 근기에 맞게 설법을 폈던 것처럼, 원광 또한 속세의 선비에게 그 처지에 알맞은 덕목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236-
- 중국으로 유학갔고, 다시 신라로 돌아온 원광의 일생을 두고 일연은 다음의 시로서 기리었다.
"바다 건너서 처음으로 중국 땅의 구름을 헤쳤으니
몇 사람이 오가면서 그 맑고 향기로운 덕을 배웠던가
지난날의 자취라고는 청산에 남아 있을 뿐이니
금곡사와 가슬갑의 일은 지금도 들을 수 있구나"
원광 이전에도 바다를 건너가서 도를 깨치려고 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도 그 자취도 남아 있지 않지만, 원광의 유학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원광이 그들을 이어서 다음세대에 진정한 유학의길을 열어주었으니 그것은 참된 깨달음을 위한 求法의 길이었다. -238-
-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 기슭에 정암사가 있는데, 양산의 통도사를 세운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정암사는 적멸조궁과 수마노탑으로 유명하다.
적멸보궁에은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부처의사리를 모셔두고 잇다. 이 부처의 사리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사리다. -258-
- 자장은 636년에 칙명을 받아서 당나라에 들어갔다. 산서성 청량산에서 불법을 익혔다. 오대산으롣 불리는 청량산은 문수보살의 영험이 있는 곳이다
643년 자장은 신라로 돌아와,분황사에 머물면서 대승大乘과 계법에 대해 널리 가르쳤다. 자장은 통도사를 세우고 戒壇계단을 쌓았다. 이 계단이 지금의 '금강계단' 이다. -260-
- 일연은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9 살 때 전남 광주의 무량사로 가서
불법을 배웠다. 무량사에서 몇 해 머문 뒤에 강원도 양양군의 설악산 아래 진전사로 갓다. 무량사에서 진전사까지지는 1300리는 더 되는 참으로 먼 길이다. 그것은 그대로 수행의 한 과정이엇다. -267-
- 모든 것은 변한다. 머물러 있는 듯이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ㄲㄶ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 변화가 워낙 미묘해서 쉽사리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이야기도 그런 미묘한 변화를 끊임없이 겪는다. 물론 이야기는 드러난 의미만으로 이해하고 즐겨도 된다. 그러나 깊은 이치가 담겨 있는 이야기라면, 또 그런 이치를 들려주려는 의도가 잇다면, 그 이치를 찾아내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겠는가.-287-
- [삼국유사]는 아득히 펼쳐진 망망대해와도 같아서 이야기들에 숨겨진 의미를 풀어내려면 여간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억지로 고심해서 의미를 풀어내려는 것도 무리한 짓이다. 양파를 벗기듯이 한 꺼풀씩 벗겨내야 한다. 보이는 만큼이 나 자신의 수준이다. 안목이 낮으면 낮은 대로,높으면 높은 대로 보고 즐기면 된다. 즐기다 보면 어느새 그 바다 속을 자유자재로 노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이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290-
-...........-291-끝.잘 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