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록 - 삼국유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삼국유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되는 것도 없고 않되는 것도 없는 것처럼"
아니다 싶으면, 삼국유사를 읽지마라. 그냥 책 덮으면 된다?
[삼국유사]는 어떤 책인가?
누구든지 대답할 수 있고, 누구라도 대답을 다 할 수는 없다.
"되는 것도 되고, 않 되는 것도 없다" 는 말이다.
그래. 아니다 싶으면, 삼국유사를 읽지마라. 그냥 책 덮으면 된다?
책을 읽는 방법의 세 단계 ;
* 빠지면서 읽기 ; 추리소설 등등 책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읽기.
* 따지면서 읽기 ; 문학작품 등 따지면서 타당성을 검증하면서 읽기.
* 쓰면서 읽기 ; 시시비비를 가려 본인의 의견을 쓰가면서 읽기.
이처럼 독서는 책에 따라서 읽는 방법이 각각 다 르다.
책이 요구하는 방법을 받아들여 읽어야 독서가 즐겁고 후련하고 보람되게 이루어진다.
[삼국유사]가 요구하는 방법
삼국유사는 문학작품이면서 논술서적이고 역사서적이다.
삼국유사는 역사서이고, [수이전]을 이은 설화집이고, [해동고승전]을 다시 쓴 고승전이다. 설화집은 문학작품이고 고승전은 논술서적이면서 문학작품이고 역사서는 논술서적이다.
[삼국유사]는 법흥왕의 불교 공인을 다룬 제3권 흥법<원종흥법압촉멸신> 말미의 讚曰에서 "순일"과 "불일"은 서로 다른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불일은 부처의 가르침이 이어지는 시간이다. 순일이 빛난다고 하지만 불일은 더욱 높다고 했다.
하늘과 땅 :
제1권 <고조선>에서 고조선에 관한 서술을 시작했다.
물고기와 돌 :
제 3권<魚山佛影>에서 ,옛적에 하늘에서 바닷가로 떨어진 알이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이가 수로왕이라 했다
스님과 이무기 :
제4권<보양이목>을 보자. 보양 스님은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서해 용궁에 초청되어 환대를 받고, 용왕의 아들인 梨木 즉 이무기르 데리고 왔다. 삼국유사에는 스님의 일방적 승리가 기록되어 있지만, 경북 청도군의 구전에는 이무기가 밀양 호박소로 가버렸다고 하고, 억산바위라고 하는 그 바위가 아직도 남아 잇다.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는 장소 운문사 주지였던 일연이 <보양>편을 들어 남긴 기록에 대해 우리가 현장에 가서 지금도 생생하게 구전되고 있는 이무기 이야기, 그 증거물인 억산바위와 호박소를 근거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반론을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글을 다시 쓰기까지 해야 한다. 이무기와 스님의 헤어짐에 관한 말은 있지만 만남에 관한 말은 없어 지어내야 한다.
세 스님이 만난 보살 :
제3권<洛山二大聖....>에 동해안에 보살이 나타났다 해서 찾으러 갔다고 한 이야기가 있다.
의상과 원효와 범일 스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의상은 목욕재계하고 보살을 만났다. 원효는 개짐을 빤 물을 쏟고 다른 물을 떠서 마셨고 범일이 찾아낸 보살은 시골 아낙네의 아들놈이 갖고노는 돌부처였다. 세 이야기가 왜 이렇게 다른가? 보살이 다른가?
의문과 해답 :
제4권<二惠同塵이혜동진>을 보자. '오어사'라는 절은 포항 남쪽 오천읍 항사리에 있다. 혜공 스님이 만년에 그 절에 머무르고 있을 때 원효가 여러 경전을 풀이하다가 찾아가 의심나는 곳을 물었다고 했다.
"네가 눈 똥이 내가 잡은 고기이다" 라는 말을 원효가 했다고도 하는데 잘못이라고 했다. 원효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혜공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러나 원효는 혜공이 한 말을 잘 알아듣고 글로 적었다. 저술을 남겨 높이 평가된다.
일연의 글을 다시 보자 . 똥이 고기가 되어 헤엄쳐 가더라는 말이 있을만한데 없다.듣지 못해서,듣고서도 실수해서, 상상력이 모자라 빠뜨렸는가? 추리하는 것은 부질없다. 내가 보탤 말이 남아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로 늘어났다고 해도 좋다. 원효와의 만남에서 일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니 기쁘다. 내친 김에 원효보다도 앞설 수 있겠다. 원효사니 원효암이니 하는 곳이 전국 도처에 많이 있다. 원효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원효가 창건했다고 하는 사찰도 흔하다. 오늘날 원효를 내세워 번다하게 모임을 만들고 행사를 여는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원효를 너무 받들다가 착상이 빈약해진다. 원효는 원효가 아니어야 원효일 수 잇다. 원효는 원효가 아니게 하는 부정과 원효이게 하는 긍정을 함께 관철시킨다. 그것이 우리가 다시 하는 창조 작업의 시발점이다.
끝.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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