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82 / 1960년을 묻다 - 권보드래, 천정환 지음

최해식 2015. 6. 9. 01:55

-150613 읽기 시작함.

- 1960.4.19일, 유혈사태이후, 미국의 비판적 개입이 겹치자 이승만 정부는 지반을 잃으면서 마침내 4.2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되어, 혁명화된 상황에 종지부를 찍엇다. 시위주체인 대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자, 질서를 회복하자" 고 목소리를 높엿다. 4.26일의 하야성명 후 일촉즉발의  폭력적 상황을 통제한 것은 대학생이다. -35-

 

-1961.5.16일, 5.16쿠데타 직후 서울 시민의 60%가 다소 모호하지만 호즤적인 반응을 보엿다.  즉,"주먹을 휘두르고 반대하지않았다" 는 것이다. -42- 

 

-4.19이후 5.16쿠데타에 이르는 1년여 사이의 혼란이란 '혁신의 과잉' 으로 인한 혼란인 동시 '혁신의 과소' 로 인한 혼란이엇기 때문이다.

"데모의 꼬가 데모를 물고 와서 데모로 날이새었고 데모로 날이 저무는 기현상"  이란 다수 대중이 얼마나  혁신을 갈망햇는지. 반면 민주당 정권은  이 갈망을 수용하는 데 얼마나 무능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로도 읽힐 법하다. -57-

 

-말을 빼앗겨 말을 할 수 없는 자, 침묵을 강요당한 최하계층에 있는자,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자를 지칭할 때 흔히 서벌턴(subaltern)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것은 가장 가난하고 못 배운 하층의 여성, 한센환자나 유색 인종, 불가촉천민 같은 존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116-

 

- 지식인에게 '말' 이란 무엇인가?  '말 못하는 지식인' 이 있을 수 잇는 가? 서발턴(=/ not민중)은 사회 최하층에  있는 자, 그 존재가 언제나 지배 질서 때문에 희미해지는 자 또는 그보다 더 안 보이는 타자이다. 서바턴은 '말할 수 없는 자' 이다. -120-

 

-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은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했다.  잘 알려진 시인 천상병이나 음악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가 바로 그 사건의대표적 피해자들이다.  천상병은 그때 받은 고문으로 정신이 약간 이상해졋고, 윤이상은 평생 고국에 돌아오지못했다. -123-

 

- 집권초기 박정희는 미국과 남한 우익으로부터  좌익 혐의를 받았다. 그의 전력 자체가 '여순' 의 배신자였거니와, 거물 좌익을 가형으로 둔 대통령 박정희는 '사상' 이 모호한 인물로 간주됐다. -130-

 

 

- 1960년대에, 남한은 미국의 전략에 따라 식민종주국이던 일본과 국교를 재개해야했다.

그리고 '자유세계' 를 지킨다는  명분에 따라 월남파병해야 했다. -306-

 

- '카네기' 관련 책은 크게 두 종류이다.

하나는 맨손으로 시작해 '강철왕'이 되었다는 앤드류 카네기(1853~1919), 다른 하나는 데일 카네기(1855~1955)라는 저술가 이다.  두 인물은 비슷한 시대를 살고  '카네기' 라는 이름이 같아 혼동된다. -395-

 

 

- 전혜린의 아버지 전봉덕은 스스로 예외적인  인물이자, 식민지 엘리트가 갈 수 있는, 상상할 수 잇는, 가장 오른쪽의 길을 다 걸었던 사람이다.

1910년에 태어난 전봉덕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학 시절,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및 행정과에 합격했다. 수재가 택한 것은 식민지 경찰관료로서의 삶이엇고, 그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식민지 말기에 경기도 경찰 부에서 일한 그는  해방 당시 경시(총경) 직위까지 올랐다. 윤종화 황해도 경찰부장을 제외하고는, 조선인 중  최고 직위의 경찰이었다.

해방 후에도 미 군정청에 의해 경찰 고위직을 유지할 수 잇엇던 전봉덕은 군인으로 전신轉身했다. 1948.10월 육군사관학교 제1기 고급장교반을 거쳐 육군 소령으로 임관되고 다시 초고속 승진을 하여 1949.3월, 육군 헌병대 부사령관이 됐다. 그리고 그해 국회 프락치 사건과 김구 암살 사건을 맡았다.  이승만이 전봉덕을 헌병사령관에 임명해 수사를 지휘하게 함으로써 그는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받게 된다.  그후 1950년대 전봉덕은 변호사와 고급공무원으로 다시 변신했다.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지내고 법제처 법제조사위원회 위원등을 거쳤고, 서울변호사회 회장을 거쳐 대한변협 회장까지 하게 됐다.  또 1973년 한국법사학회를 창설해 회장에 취임했다.  전두환 집권 이후 5공화국의 헌법 개악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런데 1980년대 초 국내 경력을 끝으로 전봉덕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92.4월 잠시 귀국했다가, 김구 암살 사건의 배후로 다시 거론되자 서둘러 출국했다

한 사람이 이 모두를 해냈다는 것은 놀랍다.  전봉덕의 생애는 가히 말 그대로 출세일로.승승장구.입신영달 따위의  성어를 붙여야만 표현 가능한 것 같다.  이는  시세를 정확히 판단하는  빠른 잔머리와  세상의 지식을 통찰.종합할 수 잇는 지성,또한 냉혹하고도  좋은 인간성,능수능란하고도 진실된 처세술을 갖춰야 가능한 것 아닌가?  그리고 술.여자.도박 같은 중독적 쾌락에 자신을 방기하는 일 없이 , 어떤 풍파에도 크게 방황하지 않는 튼실한 자아를 언제나 성실히 경영해야 가능할 것이다.

전봉덕은 "계몽주의의 숭배자이고 금욕주의자" 이며, "광적인 지식욕" 의 표상이며 "인내와 노력"  의 규준 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봉덕이 보여주는 것은, 공적 삶과 사적 삶, 그리고 정신과 물질의 완벽한 분리와 병치이다.  전혜린은 이런 아버지에 대해  "흔히 딸이 그렇듯 아버지를 숭배"  했다고 한다. -409~410-

 

 

- 전혜린은 일생동안 어버지(식민지 엘리트 관료)가 만든 제단 아래에서  쌓은 것이다. 전봉덕은 딸을 자기와 닮은 존재로 키우려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게 했다.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다니기  싫엇던 법대를 중단하고 독문학을 ㅟ해 독일 유학을 결행하는데서 시도됐다. 유학과 결혼 그리고 자살에 까지 이르는 그녀의 도정은 상징적이다.

1966년 벽두,자살한 사후 1년 만에 유고집[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앗다] 가 이어령의 기획과 김화영의 정리로 세상의 빛을 보게되엇다.그리고 그녀는 모든 문학소녀 의 우상이엇다. 물론 지금도 전혜린의 독자들이 살아 잇다. 때로는 여전히 '소녀' 인 채로. -412-

 

 

 

- 박정희는  논란이 되는 대통령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헌법을 두 번 고쳐서 무려 18년간 철권통치를 하여  한국 사회와 정치를 깊이 병들게 했지만 , 그의 집권 기간에 한국이 고도경제성장을 이뤄냈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존경을 받는다.

보수세력과 추종자들은 마치 한국의 경제성장이 박정희 통치가 아니엇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것처럼 과장한다

그렇다면 남한이 경제적으로 고도성장하던 시기에 일본과 대만과 싱가포르도 연 10%씩 GDP가 성장했고, 심지어 북한도 그 시기에는 만만찮은 경제성장을 이뤄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특히 박정희 숭배자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동원되고 희생을 강요당한 대다수 국민과 노동자들의 피땀을 무시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작용한 재벌 중심의 산업구조와 저임금과 노동탄압 정책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들의 속내는 여기에 잇는 듯하다. -425~426-

 

- ...............-561-끝.   역사책이 아니다. 문학관련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