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75 / 한국근대사 산책9 - 강준만 지음

최해식 2015. 5. 22. 13:49

- (일본에 아파트 단지가 처음  나타난 때는 1923년이며,)  한국 최초의 아파트는  1930년 서울 회현동에 세워진 '미쿠니'아파트다.  3층 6호의 작은 아파트다. (*일본과 한국은 서로 관련이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싸우지 말고 서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서로 win-win정책을 모색하자.)-64-

 

-[동아일보] 1926.5.25일자 에는 전통혼례와 상례의 폐해를 시정하자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이제 우리 조선서 현재 고유한 혼상제도의 예폐를 봅시다. 그 얼마나 무용한 노력과 금전과 시간을 공연히 허비하는가. 현 사회는이러한 도덕과 제도가 존재하며 고수한 만큼은 사회도 변하였다.  이것이 원래 중국문화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타국 문화를  수입한 그 시대와 그 국가에는 태평하였고 백성은 안정하야 의식이  족할 그때에 상당히 숭배할 도덕이나, 현세에는 다만 귀중한 금전과 시간을 허비할 뿐이라.  이에 대하여 우리는 자고自顧하여야 할 것이다. 종래 습관을 개량하자는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다운 문화를 새로이 건설하자."

 1934.11.1일 조선총독부는 관혼상제 예복과 상호부조 폐지를 골자로 간소화한 '의례준칙' 을 제정했다.-70-

 

- 라디오 방송은 1930년대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1931.9.18일 만주를 침략한 이후 전쟁 뉴스의 수요 증가로 라디오 등록 대수가 늘었고,

1930.4~10월 사이에는 야구 중계를 70회나 했다. -89-

 

- 1930.1.1일 새벽, 찬영회 사건 (** 연예부 기자들의 모임으로 배우들을 공개적으로 무시했고,여배우를 불러내 술을 마시기도했으며,시사회를 열 때마다 영화사에  부담을 씌웠다.) 은 당시 조선 영화계의 치부를 드러낸 수치스런 일 중의 하나로 영화계의 악습을 반영한 사건이다.

연예부 기자를 접대하는 문화가 이때에도 있었다는 게 흥미롭다. 오늘날에 연예기획사의 횡포로 연예부 기자 못해 먹겠다느 말도 나오는 세상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것 같진 않다.-100-

 

-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제작되었다. 1935.10.4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이 단성사에서 동대문 쪽은 물론  창덕궁 쪽으로도 죽 늘어설 정도였다. -103-

 

- 영화를 상영할 수 잇는  흥행장은 1935년에 96곳을 넘어섰다,그러나 냉난방,화장실 등  시설이 무척 열악했다. -109-

 

 

-현제명(1902~1960)은 1930년대 초반 '고향생각'  '산들바람'  '그집 앞'  '희망의 나라로'  '나물캐는 처녀' 등 불후의 가곡들을 작곡했다. 여기에 김동진(1913~?) 이 '가고파'  '봄이 오면' 등을 작곡하으로써 1930년대 초반을 주옥같은 가곡의 풍년기로 만들엇다. (*지금도 중고생들의 음악수업시간에 부려지고 있는 것을보면 명곡은 명곡인가 보다.)-122-

 

 

- 1930년대는 대중가요의 전성시대 로 보고 있다.

1932.4월 이애리수의 '황성 옛터'  를 내놓았다.

빅타레코드에서 발매되었는데 순식간에 5만 장이 판매되었다,  황성옛터는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의미했다.   -116-

 

1934.6월 고복수는 '타향살이' 를 내놓았다.

1935.9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을 내 놓았다.

1936.12월 고복수의 '짝사랑' 을 내놓았다.

1937.2월 김정구의 '항구의 선술집'을 내놓았다.

1937.12월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1938.1월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일본 여가수 도로키 유키꼬가 남인수와 함께 일본어로도 취입,그 제목은 '애수의 세레나데' 였다)

1938.2월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1939.4월 김영춘의 '홍도야 우지마라'

1939.4월 남인수의 '감격시대'

1940.2월 백년설의 '나거네 설음'

1940.6월 백년설의 '번지없는 주막'  이 나왔다. -122~152-

 

 

 

-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인수와 김정구의  라이벌 시대.....

김정구의 한 달 수입은 당시 집2채에 해당하는 거금 1000원에 달했다. 그가 출연힜던 서울의 명치좌(명동국립극장 전신) 와 부민관(구 국회의사당) 은 입장권을 사려는 관객들이 건물 두레를 뱀이 또아리 틀듯 휘감았다. (* 일제하에 조선인들은 먹고 살기 힘들던 시절인데.........) -154-

 

 

- 1930년대 말, 서울의 다방은 이미 넘칠 만큼 많았다. (*못사는 백성들보다 잘 사는 부자들이 많았던 모양? 이다.)

해방 후 자유당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위세를 떨치던 만송 이기붕(1896~1960)도  한때는 다방을 운영했다.

이효석(1907~1942)은 조선일보사가 발행한 [조선문학독본](1938.12월호) 에 쓴 수필[낙엽을 태우면서] 에서 가을 낙엽을 태우는  냄새에서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난다'  라고  썼다. 이에 대해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고등하교 때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커피 냄새가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한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낙엽태우는 냄새와 비슷도 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이효석은 커피냄새를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구태여 익숙하지도 않은 커피 냄새를  들먹인 것은 분명 '커피'라는 말이 주는 문화적의미 때문이엇을 것이다. -179-

 

 

- 1941년 들어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설탕,커피 등의 수입이 막히면서 쇠퇴 일로를 걸어 2차 대전 말기에는 다방이 거의 폐업 상태에 들어갓다. 일본에서도 1940년 당시 도쿄 시내에만 다방이 3000여 개나 있었지만 이들은 전쟁 막바지엔 폐업이나 전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 수입 통로가 막히게 되었던 것이다.-181-

 

 

- 사교댄스 바람이 분 건 1930년대다.

1930.12.24일 경시청 보안부는 춤 등이 사회 풍속을 헤친다며

'에로 연예단속규칙' 을 내려 보냈다. -183-

 

 

- 재즈는 1920년대 말부터 유행했는데 재즈의 인기가 워낙 높아 그만큼 비난의 목소리도 컸다.-184-

 

- 1930년대 경성엔 카페가 1000개 ;

즈의 주요무대는 카페였다. 1930년대 경성엔 카페가 1000개나 되엇으며 낙원카페의 경우 카페걸 숫자가 7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31년에는 이미 광주에서  "여급들의 등쌀에 '놀이' 가 없다고 기생들이 盟罷맹파를 단행하고 경찰에 진정을 할 정도였다. -188-

 

 

- 1932년 이후에는 카페에도 네온사인이 설치되는 등  네온사인은 점점 더 도시를 파고들었다. -195-

 

1933년 미나카이백화점은 서울매장을 연건평 2500평으로 신증축했다. 미나카이백화점은 후발주자였지만 일련의 지방지점 개설 공세로 조선내 최대 백화점이 되엇다.  지하1층 지상6층 건물로 조선에서 처음으로 2층까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

 

 

- 화신백하점의 마케팅 전략은 '민족주의' 였다.

박흥식은  "화신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곧 조선 사람이 잘하고 못하는 것을 실지로 증명하는 시금석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라고 주장했다. -204-

 

- 1935년 미나카이,미쓰코시,조지야,히라타,화신을 가리켜 '5대 백화점' 이라 했다. 모든 백화점의 주요 고객은 조선인으로 전체의 60~70%를 차지했다. (*과연 조선백성들이 잘 살았나?) -208-

 

 

- 화신백화점은 1937.11월 연건평 2000평이 넘는 지하1층 지상6층의 르네상스식 새건물을 지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가장 높았던 고층 건물은 종로 네거리의 화신백화점과 충무로2가에  있었던 미나카이 라는 일본 백하점이었다.  둘 다 6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누구던 서울에 오면 반드시 들르곤 했던 관광명소가 되었다.  또 하나의 관광명소가 1938년 봄에 추가되었으니 그건 8층의 서울 반도호텔이다.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  1914년에 문을 연 조선호텔에 이어 두 번째로 들어선 호화 호텔인 반도호켈은 편의시설에서 조선호텔을 압도했다.  옷차림이 허름하다는 이유로 조선호텔 입장를 거부당한 일본인 실업가 '노구치' 가 조선호텔 뒤의 땅을 사 지은 8층짜리 건물이었다. -213-

 

 

 

- 일본 백화점 고객의 다수가 조선인이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소비엔 국경이 없는 법, 이게 오늘날에도 지구촌 약소국들을 괴롭히는 이유가 되고 있다. -219-

 

- 1932년 경인선에는 서울-인천을 40분에 주파하는 초특급열차가 투입되어 하루에 13번 왕복이 가능해졌다.   1936.12.1일부터는  부산-서울 사이를 6시간 45분에 주파하는 '아카쓰키'  가 등장했고, 1938.10.1일부터는 부산-북경(2068km)를 38시간45분에 주파하는 직통 급행여객열차가 운행되었다.

해운대해수욕장은 1934년 동해선 '부산진-해운대'  구간이 개통된 이후 총독부 철도국에 의해 대규모 휴양지로 개발되었다, 당시 최고의 피서지는 원산이었다. 원산은 경의선 철도가 연결돼 교통이 편리했고,송도원,명사십리 등 경관이 수려한 해수욕장이 여럿 잇었다.-248~249-

 

- 윤치호는 1940.4.19일자 일기에 이렇게  썼다.

"1년 만에 개성에 왔다. 1년 동안 철도가 복선화되었고, 임진강 위에 새 철교가 부설되엇으며, 수색역이 평지에 재건축되었다. 일본인 친구들이 도처에서 보여주고 있는 저 정력과 능력을 보라!  조선인들이 저만큼 하려면 하세월이 거렸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윤치호가 일제의 지배를 축복으로 본 건 아니다. 그는 철도에 국한해 일본인들의 장점을 언급한 것뿐이다. -251-

 

- 전국의 자동차 수는 1931년 4331대, 1932년엔 4800대였는데, 당시 차종은 포드,시보레,뷰익 등이다.  포드가 압도적으로많았다. -254-

 

- 일제강점기에 크리스마스가 명절이나 축제 분위기로 바뀌어  떠들썩하게  보내기 시작한 건 1930년대부터였다.   이는  서구문화 수입과

실천을 선도했던 '모던 걸'  '모던 보이'의 등장과 맥을 같이한다.-276-

 

- 카페,바,요릿집 등에서는 해마다 화려해지는 유흥가의  축하연 덕분에 크리스마스 이브는 일 년 중 가장 퇴폐적인 밤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는 유흥업소의 크리스마스 축하연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가족 단위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사람들도 잇엇다.   이효석은 조선일보사가 발행한 [조선문학독본] 1938.12월호에 쓴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 에 이렇게 썼다.

"올 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으로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이를 시작해볼까 하고 계획도 해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281

 

-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조선인으로서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사람은 마라톤 손기정,남승룡을 비롯,농구의 장이진,이성구,염은현, 복싱의 이기환,그리고축구의 김용식 등  모두 7명이엇다. -299-

 

 

- 일본 유학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다고 해서 취업이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조선의  '적당한 수준의 멸망'  을  기도했던 일제 치하에서 조선 청년들의 취업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1931년 당시 취업난은 매우 심하였다. -333-

 

 

- 1920년대 후반에는 고등문관.순사시험 응시자들을 위한 교재가 따로 만들어져 팔렸다. 조선 청년들이 일제 통치기관의 관료인 고등문관과 순사가 되기위해 열심히 공부하였던 것이다. 식민지 청년들에게도 안정된 직장과 사회적 인정은 중요한 욕망이었다. 그런 욕망의 최고봉은 단연 경성제국대학이었다. -336-

 

 

-.............-340-끝.그냥 읽어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