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한국근대사 산책7 - 강준만 지음
-간토關東대지진 ;
1923.9.1일 오전11:58분,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에 진도 7.9 의 격진이 밀어닥쳐 14만여 명의 인명이 희생되고 가옥57만 채가 전파.소실되ㅐㅆ다, 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도둑질을 하고 불을 지른다' 등의 유언비어가 급속히 퍼져나갔다. -11-
- 1925년 일본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의 정보자료는 재일 조선인의 대다수르 차지한 노동자의 삶에 대하여 "불결한 지역에 모여 사는 것이 보통인데 방 하나에 6~7명이 잡거하고 있다." 며 "비,이슬을 겨우 피할 정도의 판잣집에서 惡衣惡食을 견지어야 하는 비참한 지경"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5-
-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9.1일은 일본에서 '방재의 날' 로 지정돼 잇으며 매년 언론은특집기사를 내보내고 있지만,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억울하게 학살된 사실은 거의 다르지 않고 잇다. 간토대지진을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내고 45만 채의 주택이 불애 탄 재해'로만 기억할 뿐, 조선인과 중국인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진상규명은 커녕 그 흔한 기념관이나 추모시설이 한 곳도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16-
- 1926년에 발매된 윤심덕(1897~1926)의 '사의 찬미' 는 당시로선 천문학적 숫자인 10만 장의 레코드 판매량을 기록했다. -128-
- [개벽] 1926년 6월호에 발표된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 "
이 시는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애국애족의 저항시" 이다.-140-
- 조선총독부 신청사 ; 1926.10.1일 준공하였다.
당시로서는 거액인 670여 만 엔을 들여 건립한 기념비적 건물이다. 이는 일본 본토를 통틀어 가장 큰, 당시로선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물이엇다. 현재 서울시청으로 사용되고 잇는 경성부 청사도 1926년에 준공되엇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경복궁을 깔고 앉은 형국이다. 조선왕조와 한국에 대한 능멸이었다.
경성부 청사도 덕수궁 대한문 앞에 지어져 조선인들의 숭왕의식과 독립의식의 발원지로 상징되는 이곳의 氣를 눌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성부 청사를 이곳에 세운 것이다. -143~148-
- 식민지 시기 내내 조선의 감옥은 수용인원 초과로, 일제가 생각해낸 수법이 바로 赦免사면이다. 1927.2월 가장많은 사면이 이뤄져 6942명이 사면을 받았다. 일제의 음흉한 사면 관행은 오늘날에까지도 살아남아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조롱하는 연례 이벤트가 된다. -149-
- '조선어멈'을 거느린 일본인의 귀족생활 ;
1942년 일본인들은 75만 명으로 급증했다. 일본인들에겐 한국이 지상천국이었고, 조선인 하녀까지 두었는 데 이 하녀를 '조선어멈' 이라 부렀다. 당시 일본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했던 식민지라는 상황 속에서 조선여성들이 일본인 가정을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하나는 일본인 가정의 보수가 조선인 가정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엇다. 이는 경제적인 이유가 민족적 인 명분을 능가할 만큼 삶에의 욕구가 절박한 시절이었음을 말해주고 잇다. -176-
- 나석주의 조선식산은행 폭탄 투척사건(1926.12.28일 오후 2시) 직후 당시 한국인 행원은 '사상보다는 취직' '민족보다는 월급'이 우선이었다.고 했다.
당시 일반 조선인보다 나은 생활을 했던 이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개인적인 허영과 만족 때문에 민족보다는 일본인 행원과의 동질적 유대감이 더 강했다. -182-
- 홍용희는 "님의 침묵은 제목부터 역설적이다.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반대일치의 역설은 이 시의 내용구성의 기본적인 형성원리이다. 이러한 역설은 궁극적으로 이별과 만남 역시 근원 동일성을 지닌다는 깨달음을 낳는다. 만남이 이별의 전제이듯이 이별은 만남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마치 밤의 어둠이 낮의 밝음을 불러오고, 낮의 밝음이 밤의 어둠으로 치환되는 이치와 상응한다. -254-
- 1920년대 말 경성 시내를 주행하는 전차와 버스는 각각 120대와 40대 정도로, 하루 승객 수는 전차 11만여 명, 버스 1만여 명이 되엇다. (**그당시 버스가 있다니,그것도 40대? 라니 놀랍다.)-277-
- [조선일보] 1930.4.12일자에, "봄 빛이 무르녹아 천산만야에 오색 꽃이 피고 방싯거리는 이때에 창경원 야앵(밤 벚꽃)은 장안의 마음 들뜬 사람을 또한 끌어 모을 것이다." 라고 보도했다.
일제는 창경원에 벚꽃나무를 수천 그루 옮겨 심은 뒤 1924년부터 매년 4월, 밤 벚꽃놀이를 하도록 했다. 이와관련, 김영근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전차나 버스를 타고 창경원에 가 휘황한 불빛 아래서 밤 벚꽃놀이를 하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전차와 버스,전깃불을 보면서 근대적 문물에 감탄했을까? 동물원으로 변한 창경궁을 보면서 식민지 사회에 살고 잇음을 절감이나 하였을까? -278-
- 우측통행은 문명인 의 표징 ;
총독부는 1921.12.1일부터 '우측통행' 을 실시했다.
대부분이 국가에서는 우측보행이 관례이며 일본에서도 차량은 좌측으로 통행하고,사람은 오른쪽으로 걷도록 하고 있다. -279~281-
- 1920년대 말 서울의 밤거리에는 네온사인 간판이 등장해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네온으로 치장한 상점의 진열장은 새로운 유행을 전파했고 유행의 선도자느 백화점이다. 1906년 미쓰코시 백화점이 명동에, 조지야백화점이 1921년,미나카이백화점이 1922,히로다백화점이 1926년에 개점하였다. -298-
- 1920년대 충무로 일대는 일본인 양복점이 100여 곳, 종로 일대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양복점이 50여곳이나 되었다. 양복 수요가 증가하자 양복기술자 양성기관이 전국 각지에 생겨났다, -300-
- [동아일보] 1922.11.22일자는 "요사이 우리 사람들은 외국 물건이라면 입을 다거물고 다투어 사 쓰는 경향" 이 잇다며, 일본 유명 상점 고객 중 조선인이 상점에 따라 9할까지 된다고 개탄했다.
또 동 1924.12.26일자는 조선인이 일본 상점으로 가는 것에 대해 "쓸개 빠진 행위" 라고 비난했다.
진고개(지금의 명동지역)는 조선인들에게 적잖은 콤플렉스를 심어주는 기능을 발휘했다. 조선인은 진고개의 모습에 "부러움과 동경" 의 마음을 갖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사람들이 몇 백 년을 두고 만들었다는 북촌 일대에 비해 얼마난 장한가"라는 생각을 갖기도 하였다. -304-
- 1920년대 후반 내내 신여성에겐 단발이 유행이었지만, 신남성에겐 오히려 장발이 유행인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그만큼 남성의 단발이 보편화되엇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309-
- 1916년에 처음으로등장한 '박가분'은 오늘날 두산그룹을 창설한 박두병의 아버지 박승직이 만든 화장품이다. 박승직은 포목상을 크게 경영하였다. 박가분은 1918년 특허국에서 상표등록증을 받으면서 국내 최초의 관허 화장품이 되었고, 1918년 어찌나 주문이 많았느지 하루에 5만 갑이 팔려나가자 '온 나라의 돈은 박가분이 다 긁어모은다' 는 소문이 퍼졌다. -312-
- 일제강점 직후 일본인들은 명동의 진고개에 킷사텐喫茶店(찻집)을 지어놓고,커피 장사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종로는 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 활동한 곳이다. 종로의 진고개에서 명동에 이르는 거리는 '작은 도쿄' 라 불릴 만큼 일본 사람들이 상권을 장악하여 확대시켜 진을 치고 살아가면서 점차적으로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였는데, 진고개 상가를 구경해야 서울구경을 다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315-
- 명동에는 1927년경부터 근대식 개념으 다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명동과 충무로,종로 일대에 하나둘 생기기 시작한 다방은 아직까지 일반대중과는 거릴가 잇었다. 다방에 드나드는 손님들의 대부분은 지체 높은 고위관료층이거나 개화된 지식인들이었다. 이 시기에 커피는 일본인들을 비롯한 특수계층들만이 맛보는 귀한 음료였다. -316-
- 1927년 종로 관훈동 입구에서 우리나라 사람인 경영하는 최초의 다방이 '카카듀' 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엇다. 이 다방의 주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이자, 소설과 동화를 쓴 이경손이다. 이경손은 [아리랑] 과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이] 를 제작한 나운규를 길러내기도하였다. -318-
- 1920년대 후반 일본에서 각종 도색잡지,나체화보등 서적들이 쏟아져 들어와 신문광고가 연일 선전해대는 바람에 조선은 '포르노그라피' 의 전성시대를 맞게 되엇다. -338-
-............-342-끝. 그냥 읽어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