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한국근대사 산책6 - 강준만 지음
-이 책의 참고문헌과 미주에 기록된 수많은 저작의 필자들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큰절을 드린다.
나는 그분들이 피땀 흘려 1차 자료 중심으로 연구한 결과를 편안한 위치에서 종합하는 역할을 맡았기에 이 책을 쓰는 내내 더할 나위없이 재미있고 즐거웠다. 정말 유익한 공부였ㄷ. 내가 느낀 즐거움과 공부의 보람을 공유하는 독자들이 많기를 바란다. -8-
- 순종의 일본 방문(1917.6.14) - 당시 유언비어는 "우리 임금님이 일본으로 잡혀간다" 는 것이엇다. 조선인들로서는 10년 전에 유학 명목으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잇는 어린 황태자 이은(1897~1970, 영친왕) 의 경우를 목도하기 때문이다. 순종의 일본 방문은 다이쇼大正(1879~1926) 천황을 신하로서 배알한 '치욕의 1917.6.14' 이다. -65-
- 1905년 경부선(580km), 1906년 경의선(706km) 이 개통되자, 이에 감격한 최남선은 1908년에 '경부철도가' 라는 창가를 만들었다.
일제강점 후 철도는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철도는 1911년 압록강 철도 가설로 중국대륙과 연결되엇고, 1914년 호남선(286km), 경원선(226km) 이 개통되면서 1915년까지 조선 내 총철도 길이는 1500km,
1919년까지 2197km에 이르렀다. 호남선은 1910.10월부터 1914.1월에 부설되었다. -115-
- 철도를 따라 철도호텔도 들어섰다. 최초의 철도호텔은 1912.7월에 개업한 부산 철도호텔이다.-119-
- 3.1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고종의 서거와 독살설, 일본에서의2.8독립선언의 영향이 합해져 일어난 운동으로 , 그 3월1일 아침이 밝아오고 잇었다. -146-
-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소속의 독립군과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 2000여 명은 대포와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 5000명 가운데 2000여 명을 사살, 항일무장투쟁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렸다.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과 유럽인들도 환호를 보내며 "세계에 미증유의 기묘한 전공이다" 라고 청산리 전투를 높이 평가하였다.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북간도 ,서간도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조선인촌으 찾아다니며 한국인을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이를 '경신참변(1920)' 이라 부른다. 일본군은 28명의 한인을 일렬로 세워놓고 마치 사격연습하듯 총을 쏘아대었다. -257-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1.최초의 임시정부수립 ;1919.3.21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 가 수립했다 대통령에 손병희,부통령에 박영효,국무총리에 이승만,내무총장에 안창호, 강화대사에 김규식 등이다.
2.4.13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 수립되었다.
3.4.23일 서울에서는 '한성정부 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193-
- 1919.9.11일,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 가 탄생했다. 내각은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총장 노백린,재무총장 이시영, 범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이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 출생의 몰락한 왕족 후예였고, 이동휘는 함남 단천의 寒微한 아전 집안 출신이었으며, 안창호는 평남 강서의 평범한 농민 출신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주권을 되찾고자 노력한 독립운동가 였지만, 이승만은 권력 지향으 정치가, 안창호는 조직 관리에 능한조직가, 이동휘는 현실타파형의 혁명가였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이질적 이념집단이 참여하고 각기 다른 노선을 가진 인사들이 결합한 탓으로 각자 패권을 잡으려 하거나 주도권으 놓고 갈등을 빚었다. 무장투쟁 노선과 외교 노선으로 갈라졌으며 고질적인 기호.서북 등 지방색과 양반, 상놈 등 신분 갈등도 곁들여졌다.-196~197-
- 초기 임시정부를 이끈 대통령 이승만과 굼무총리 이동후, 노동국총판 안창호는 (통합된)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을 각각 달리했다. 임시정부를 다룬 역사서를 읽다보면 독자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움을 느낀다. 이는 갈등관계와 분열역학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277-
- 한국 인권운동사에 대한 안타가움에 더하여 역사란 참 묘하다는 생각을 떨칠 길이 없다. 역사적 기념의 단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독립운동은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기에 늘 조명을 받지만, 인권운동은 기념의 주체가 없거나 약하다. 백정 후예들이 형평운동을 하다 전 재산을 아낌없이 백정들을 위해 받쳤다가 죽은 형평운동가 '강상호' 의 무덤을 찾지 않는 건 몰라서 그런 것도 잇겠지만 자신들의 뿌리를 들춰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족보를 뻐기고 그 걸 사회적으로 받아주는 게 우리의 현실아닌가.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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