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 한국근대사 산책2 - 강준만 지음
-위안스카이는 1886.7.29일 의정부에 보낸 [조선 정세를 논함] 이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조선은 중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 중국을 버리고 다른 데로 향한다면 어린아이가 부모에게서 떨어져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과 같다. "
(**중국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조선은 중국에 속해 있었다' 라고 보나, 한국인의 관점은 어떤가? 과연 중국에 속해 있다고 볼까?) -46-
- 최한기는 1866년에 쓴 [신기천험] 에서 전기의 존재를 최초로 알렸지만 그걸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77-
-이하영(1858~1919)은 대리공사 자리를 이완용에게 물려주고 귀국한 후 내내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1904년 외부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을사늑약 직전 법부대신으로자리를 바꿔 '을사5적'의 타이틀은 피했지만, '을사7적' 으로 불린다. 이승만 정권 시절 육군참모총장을 한 이종찬은 이하영의 손자인데 당시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던 이종찬이 마음에 안 들었던 이승만은 유엔군사령관 클라크에게 소개하면서 "이 사람 할아버지가 구한말 외무대신을 지낸 사람인데 그 사람이 바로 '한일합방' 때 도장을 찍어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오" 라고 말했다-86-
(참고글) ; [퍼온글] http://blog.naver.com/hokodari/120119089930
이하영의 아들 이규원 역시 '시종원경'을 지내며 부친 작위를 물려받은 '습작자'다. 손자인 이종찬은 1937년 일본 육사 49기로 임관, 만주와 남양군도 등에서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며 소좌까지 진급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 아래서 육군참모총장, 육군대학 총장, 허정 과도정부에서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이하영 일가도 이완용의 아들, 손자처럼 3대에 걸친 친일파로 분류되지만 이종찬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다르다.
일본군 소좌를 지낸 이종찬은 해방 후 조부와 부친, 자신의 친일행각을 참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산파동' 당시 계엄령 선포 거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협력 거부 등 일화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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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1916~1983) ;父 이규원, 祖父 이하영- 친일파.
-이종찬(1936~ ) ;父 이규학, 祖父 이회영-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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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가 재부임하는 1885년부터 그가 퇴각하는 1894년까지 고종의 조정이 아니라 '원세개의 조정' 이라고 불릴 정도로 청의 조선 침략이 일제를 압도하고 있었다. -109-
-오만방자하던 위안스카이는 청일전쟁(1894.7.25~1895.4.17 )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1894.7.9) 변장을 하고 야반도주하게 된다. 그는 도망을 가면서도 김 씨라는 성을 가진 조선 첩을 데리고 갔다. 그 여자는 그 후 유명한 시인인 아들 '원국문' 을 낳았고 그 손자가 바로 물리학자 '원가류' 로서 노벨물리학상을 탄 '오건웅' 이 그의 아내이다. -114-
- 동학혁명 ;
1894.2.26 전봉준(1855~1895)이 주도한 전라도 고부 농민봉기로 시작되었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1844~1911) 이 저지른 수탈과 탐학정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25-
- 박영효는 온순하고 침착한 데다가 세상사를 멀리하엿으나 김옥균는 예민하고 다재다능한 데다가 세상의 교제도 넓었다 조선에 있을 때에는 '박영효의 문벌이나 신분이 높아' 김옥균을 능가했으나 일본에서는 거꾸로 김옥균의 지위가 높아 자연히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김옥균을 남겨둔 채 박영효가 미국으로 떠났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131-
- 홍종우가 김옥균을 살해하고 개혁의 반대편에 섰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변절을 끌어낸 것은 바로 '출세를 보장한다' 는 이일식의 유혹이엇다. 출세를 위한 변신, 그것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홍종우는 양반이라는 명분 때문에 굶주리다 못해 과감하게 족보와 호패를 팔고 물 장사를 하는 등 천인으로서 생계를 세웠다. 주변에서는 이 명분을 버린 자를 소외하고 그 집 앞을 피해 다니기까지 했다.
이 소외에 대한 반항심이 고질이 되어 그의 일생은 과격한 반항으로 일관한다. -143-
- [한국일보] 1993.11.23일자는 '개혁풍운아 김옥균'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1884.12월의 갑신정변은 진정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이다. 세계 열강의 침략적 촉수가 어지럽던 우리 역사의 여명기에 갑신정변의 중심에 섰던 김옥균의 삶은 사회적 진보와 국권수호를 위해 뜨거운 포부와 사상을 가졌던 한 혁명가의 대담한 시도와 '3일 천하' 적인 성공,처절한 좌절로 점철돼 있다. 내년(1994?) 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110년, 김옥균이 한중일의 공모에 의해 암살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며 올해(1993?) 는 문민정부에 의해 새로운 미래상이 의욕적으로 펼쳐지는 '개혁의 해' 이다........... 지지기반이 허약했기 때문에 비참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한 선구적 인간이 지녔던 빛나는 이상은 세월에 의해 빛이 바래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48-
(참고글) ;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375303&cloc=olink|article|default
"[백가쟁명:유주열] 김옥균과 상하이"
금년(2014년)이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최후를 맞이한 해(1894.3월) 로부터 120년이 된다. 그리고 그해 7월 25일 우리 바다 풍도 근해에서 “갑오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최근 동북아를 둘러싼 세력개편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김옥균이 만났던 시대상황과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떠오르는 국가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주변 강국의 갈등 속에서 김옥균이 가졌던 고민이 먼 옛 날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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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은 고창 무장의 '대접주' 인 손화중(1861~1895)을 설득하여,
1894.4.24(음력3.20) 무장에서 기포起包했다. 기포라 함은 동학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일어난 봉기란 뜻이다. -152-
- 2007년 당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영호'는 다음과 같이 말햇다.
"동학농민의 처절했던 혁명의 역사는 격동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재창조의 실천을 요구한다. 113년 전 농민들이 실천하려 했던 폐정개혁, 거기에서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더 나아졌는가? 미국의 개방 압력 앞에서 굴복하고 있는 정부, 국민의 고함 소리에도 귀를 막고 있는 정부, 국내 거대 자본들의 독점적 지배의 경제현실, 군국주의 군대를 재건하려는 일본의 야욕의 현실 등 국내외적으로 위기르 맞고 있는 우리는 1세기 전 정세와 동일성를 겪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전주 입성 113주년을 맞으며 그들의 恨과 함께 너무도 구체적이었던 개혁실천을 짚어보면서 우리 시대를 다시 짚어본다. -177-
- 1894.7.25일 오전 7시경 아산 근해의 섬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쾌속선들이 퍼부은 포탄은 순식간에 청국 북양함대 '제원호'의 화약고를 터뜨려버렸다. 청일전쟁 (1894.7.25~1895.4.17 )의 시작이다. -188-
-100여 년이 지난 현재, 일본은 자국의 안보와 세계 평화를 내세우면서 군비를 확장하여 세계적인 군사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치근 일본 정부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일본해 주변 지역에 군대 파견을 위한 법적 조치를 마련하였으며 해외 파병에 나서고 있다. 100여 년 전 원치 않은 전쟁의 희생물이 되었던 교훈을 돌이켜 볼때 우리로서는 동북아 및 국제 사회에서 일본으 영향력 증대가 한반도에 미칠 파급효과와 한일 양국 관계의 변화 가능성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청일전쟁은 역사가 되었지만 청일전쟁을 촉발시킨 기본 구도는 아직 살아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잇겠다. 과연 한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개화기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196-
(** 참고글)
2015.4월 미국과 일본은 상호 방위 협정을 맺기로 한 '가이드 라인' 을 수정한 바 있어 주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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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오경장 또는 갑오개혁 ;
일본은 민씨세력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내세워 신정부를 구성하여 개혁을 추진토록 햇다. 1894.7.27부터 시작된 갑오경장 또는 갑오개혁이다. '경장' 은 고쳐 긴장시킴' 이란 뜻이다. 갑오경장이 타율적 의미라면, 갑오개혁은 자율적인 의미로, 둘 다 사용되고 있다. -198-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 가 폐지되었다.
전주 이씨로 양녕대군으 16대손인 이승만은 왕손의식이 강했지만 몰락 양반으로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과거 합격만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따라서 과거제 폐지는 그에게 엄청나게 큰 충격을 주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잇겠다.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 은 과거를 통한 아들의 입신출세 길이 영영 마겨버린 사실에 대해 울분으 ㄹ참지 못한 나머지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고 책상을 치고 또 자기 무릎까지 치면서 울부짖었다. 라고 한다.-209-
- '홍범 14조' 제정 반포 ; 음력 1894.12.12( 양력1895.1.7 )
1894.11월 일본공사 '이노우에' 는 국왕을 알현하여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내정을 개혁해야 하고 청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는 국시의 변경을 종묘에서 고하고, 전국에 선포해야 한다" 고 권고 했다. 국왕은 종묘에서 독립서고문을 奉告했으며 이 서고문에서 '홍범 14개조' 를 선포했다. 이는 '청국과의 관계 단절' 이라는 일본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241- [한국근대사 산책2-강준만 지음]에서....
(참고글) ; http://blog.naver.com/teachinghub/220232242220
음력 1894.12.13일(양력1895.1.7), 고종은 홍범 14조를 반포해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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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기독교 대표자' 인 '윤치호' ;
윤치호는 갑신정변에 가담하지 않았거니와 거사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윤웅렬' 이 김옥균과 친하게 지낸 것으로 3일천하 개화당 정권으로부터 관직이 내려지자 갑신 정변 이후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되어 1885.1.19일 상하이로 망명했다.
윤치호는 1888.9.28일 상하이르 출발하여 일본을 경유,11.4일에 미국 테네시주의 내슈빌에 도착해 미구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5년간 공부하는 동안 황인종이라는 이유로 야유와 물리적 폭력을 경험하면서 백인의 인종차별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으 ㄹ갖게 되었다.
유치호는 1893년 5년간으 미국 유학ㅇ르 마치고 모교인 상하이의 '중서서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기록벽이 강해 평생 일기르 썼는데
1885.2월부터 금주하기 전인 1887년 2월까지 25개월 동안 술을 마신 회수는 67회이며 이 기간 중 여성과 동침한 회수는 11회였다.
또 그는 1893.11.1일자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내가 살 곳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잇다면 일본이 바로 그 나라일 것이다. 나는 지독하게 냄새나는 청국에서도, 인종적 편견과 차별대우가 무섭게 지배하는 미국에서도, 극약한 정부가 계속되는 한 조선에서도 살기를 원치 않는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양의 파라다이스여! 세계의 정원이여!"
그러나 1895.10월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엇다. 그는 "살인과 암살, 이것이 일본에 의해 도입된 개혁과 문명의 꽃이란 말인가" 라고 개탄했다. -249~253-
- 동학교도 후손들은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교도 진압작전을 펴면서 잔혹한 학살과 재산몰수라는 극단적 처분을 자행했다 "목숨을 부지하자면 고향을 등지고 성과 이름을 바꿔야 했다. 만주유랑에 나서고, 이도저도 못한 후손들은 절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근현대사의 기구한 운명과 함께 철저히 유린돼 숨어사는 신세로 전략했다. 그들은 핍박과 수난의 세월을 살아오며 ㅅ 쌓이고 쌓인 한을 '새야새야 파랑새야......' 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한다. -262-
- 1895.4.18일 '이준용'(1870~1917)은 모반사건 으로 체포되어
강화 교동도로 유배되고 대원군은 마포 공덕리 별장에 유폐되엇다.
이준용은 대원군의 큰아들 재면의 아들로서 대원군의 장손이다. 모반사건 당시 그는 포도대장으로 동학당을 진압하는 일을 맡았다.-263-
- 1895.5월에 의주 등 서북지역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전국적으로 30만 명의 사망자를 낼 정도로 심각한 피해르 남겼다. 당시의 불결한 환경과 근대적 의료기구의 미비로 피해가 컸다.-264-
-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고, 조선에서의 우위르 확실히 했다.
1895.4.17일 미국의 중재로 시모노세키에서 청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강화회담 도중 72세의 노인이 된 '리홍장'이 한 일본인의 저격을 받아 안면에 총상을 입는 일이 벌어져 한때 회의가 중단될 뻔하기도 했다.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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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시해의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훈련대 제2대대장인 '우범선(1857~1903)' 이다. 훈련대는 그해(1895) 4월 친일정권에 이해 창설되었는데 우범선은 민씨 정권의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 우범선은 양반 자제들로 구성된 별기군 생도들이 교관인 자신에게 중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반말을 하는 것에 격분했던 인물이다. 그는 탈영으로 처벌받게 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돌아와 훈련대에 복귀한 것이다. -296-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조선군 대대장 우범선의 아들이 우장춘이다. 흔히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주인공으로 유명한 육종학자 우장춘(1898~1959)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사카이' 라는 일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1903년 말 자객 '고영근' 에게 암살당했다. 우범선의 두 아들 중 장남이 우장춘이고, 차남은 모계 집안에 입적돼 호적상 일본인이 된 반면, 우장춘은 아버지의 과오를 속죄하기 위해 훗날 6.25 와중에 귀국해 일생을 한국의 농업 발달을 위해 연구에 전념했다. -304-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날(1895.10.8) 새벽3시, 한패거리의 일본 낭인들과, 일본군이 훈련시킨 훈련대 병사들은 대원군을 호위하고 마포 공덕리에 있는 대원군 별장을 떠나 경복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역사는 민비가 잔인무도한 일본인에게 살해되었다는 것만을 강조하면서 대원군의 역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잇다. 우리는 마땅히 일본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통렬하게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일본인들을 끌어들여 나라를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든 대원군의 행동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런 사태를 초래한 민족사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깊이 자성해야 할 것이다. -297-
-.............-355-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