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 망국의 한, 기록으로 꽃피우다 - 송상도 지음, 강원모 외 옮김
-150509 저녁부터 읽었음.
-저자 송상도(1871~1946)는 경북 영주 출생으로 송학영의 장남이다. 그는 김영주 선생에게 명나라가 망한 뒤 성명을 숨긴채 나귀를 타고 돌아다니며 순절지사의 사적을 모아 세상에 전한 '기려도사' 이야기를 듣고, 1910년부터 30여 년 동안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모아 [기려수필] 을 편찬하였다. -저자 소개에서-
- 이시원 ;
이시원으 자는 자직이고, 별호는 사기沙磯이다.
호조 참판을 역임한 이대성이 진사 이진위를 낳고,이진위가 이광명을 낳았다. 이분이 이시원의 증조부이다. (이광명이 이충익을 낳았다.)
조부 '이충익' 공은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선고先考 '이면백'은 진사였는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정조 14년(1790)에 이시원이 태어났다. 그는 1815년에 실시된 庭試정시에 갑과甲科 1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27~28-
-그후 1866년 병인년 가을에, 서양인들이 강화도에 들어왔는 데 배도陪都를 지키지 못했다. 강화도에는 장녕전과 만녕전이 있어서 숙종과 영조의 어용御容을 봉안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옮겨 나와 피난하였고, 강화도가 함락되었다고 약을 마시고 자결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 한다고 했다.(과연 이렇게 해야만 충신, 신하가 되는 것인가?)
지종정경 府事 이시원(1789~1866)은 약을 마시고 운명했다.
고종에게 遺疏유소를 올리면서,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많은 어려움은 나라를 일으키고 깊은 근심은 밝은 판단력을 열어 준다' 라고 하였습니다. -38~40-
-(참고글)
- [영재 이건창]
영재 이건창은 1852년 강화도 사곡에서 태어났다.
이충익 - 이면백 - 이시원 - 이상학 - 이건창 - 이건승으로 이어지는 학자들의 집안이다.
이충익은 학자로 높은 이름을 얻었고,
그 아들 대연 이면백 은 다산 등과 교류하던 당대의 학자였다.
이시원은 판서 였다.
이상학은 양산 군수르 지냈고,
그아들이 이건창 . 이건승이고 ,그의 당질인 난곡 이건방은 위당 정인보의 스승이었다. -464-
- 영재의 할아버지 사기沙磯 '이시원' 은 그의 아우 '이지원' 과 함께 외국의 군대에 함락된 '병인양요' 의 억울함을 참지 못해 형제가 나란히 목숨을 끊었다.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른 고관대작으로 나라를 위해 지푸라기처럼 목숨을 버린 할아버지 , 그의 의혼에 이어 영재도 나라를 위해서 의로운 벼슬아치로 살았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처럼 강화도는 의리와 문장이 함께 빛나는 역사의 땅이다. -462-
- 이건창의 아우인 경재 '이건승' 은 나라가 망하자 친구들인 '홍승헌 . 정원하' 등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해 풍찬노숙으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제는 종적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217.조선의 의인들 - 박석무 지음]-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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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낙관의 자는 경교, 호는 秋江이다.
그는 "사람이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으면 밝은 지혜를 갖지 못하며, 이름난 산과 큰물을 보지 못하면 마치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다" 라고 하였다.
1877년 일본이 우리나라와 강화를 맺자, 백낙관은 그의 형 백낙윤과 함께 강화의 부당함을 고종 임금에게 호소하여 일본과의 강화는 잘못된 일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72-
- 지금 신하들가운데 강화(일본과)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임진년에 공로를 세운 신하들의 후예이며, 병자년 (1636) 에 척화를 주장했던 신하들으 자손입니다.
최명길 은 병자호란을 당해 오랑캐 병사를 대적하기 어려운 줄을 알고 스스로 많은 원망을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산성을 내려가 항복하자는 義論을 세웠습니다.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 자세로 나라를 보호하여 지금까지 300년 동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청류들은 말하기를 '불의에 빠졌다' 라고 하여 성토하는 말이 끊이지 않았고 역사책에 서술하여 후세의 공론이 되게 하였습니다. -81-
- 곧지 못한 자가 위에 있고, 곧은 자가 아래에 있으면 그 형세가 반드시 온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로움은 나라에 돌아가지만 자신은 그 해르 입게 된다.
당나라가 쇠할 때에 향곡鄕谷의 한 남자가 열 글자로 쓴 글을 함에 던지고 죽었고,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할 때에 진동과 구양철이 大義를 밝혀 大臣을 등용하는 문제를 논하다가 죽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이다. -89-
- 이세영 ;
이세영의 자는 좌현, 본관은 덕수이다.
아버지 '이민하'는 내금위장을 역임하였다,
이세영은 고종6, 1869년 5월에 태어났다.
을사년(1905) 10월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가 무력으로 임금을 위협하여 보호조약을 맺고 대신 박제순,이근택,이지용,이완용,권중현 등이 체결하여 도장을 찍으니 마침내 우리나라에 통감을 설치하였다,
이세영은 '민종식' 의병 진영의 참모장이 되었고,패하여 충남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87-
- 한규설 ;
한규설은 태황 때 무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정에 이르렀다.
을사년 (광무9, 1905) 겨울 10월 일본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에
와서 보호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하고 다녔다. 10월5일에 일본과 내통한 수괴인 송병준,이용구 등은 일진회一進會를 조직 하여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보호조약에 의거하여 독립국가를 유지하고
영원무궁토록 편안하게 복을 누려야 한다."
이를 보고 한규설은 탄식했다. -215-
- 이승희 ;
이승희의 자는 계도, 본관은 성산이다. 한주 이진상의 아들이다.
을사년(1905) 10월21일, 일본공사 이토 히로부미가 적신 이완용 등 다섯 사람과 함께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자 재상 민영환과 조병세, 김봉학 등이 순국하였다. 이승희는 통곡하며 소장을 올리고 대궐문 밖에서 엎드렸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을미년(1895) 과 경술년(1910) 이래로 어떤 이는 약을 먹고 자결하고, 어떤 이는 칼로 순국하고, 어떤 이는 절식하여 자신으 목숨을 터럭처럼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그 뜻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의리와 천한 복첩으 신세로 전락되고자 하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승희의 행동은 격렬함은 없으나 남의 신복이 되지 않겠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옛날에 은나라의 세 명의 인자仁者중 미자와 기자가 모두 죽지 않았고, 고려 말에는 두문동 72현 및 야은 길재 선생 역시 죽지 않았다. 이승희는 을미년과 경술년의 여러 사람들과는 그 행적이 비록 다르지만 그 뜻은 같으니, 이찌 살고 죽는 것으로 논 할 수 있겠는가 -293-
- 최익현 ;
최익현으 자는 찬겸, 본관은 경주로 고운 최치원 선생으 후손이다.
순조33, 1833년에 최익현은 포천 내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다, 1836년 아버지 '최대'를 따라 단양으로 이사와서 여섯 살이 되자 글을 배웠는데 총명이 뛰어나 한 번 들으면 바로 암기하였다.
1905년 10월 에 이토 히로부미가 적신 박제순, 이지용,이근택,이완용, 권중현 등을 이끌고 다섯 항목의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최익현은 곧바로 을사오적을 처벌하라는 소장을 올렸다-349-
-.......-459-끝. 그냥 읽어봄.순국열사 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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