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61 /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 김기협 지음

최해식 2015. 4. 29. 10:33

-15.0506에 읽은 책이다.

-"깃털 하나를 들지 못하는 것은 힘을 쓰지 않음이요, 장작더미를 보지 못함은 밝음을 쓰지 않음이요, 백성이 보살펴지지 못함은 은혜를 쓰지 않음이니, 임금이 임금 노릇 못하는 것은 하지 못함이 아니라 하지  않음이니라"

[맹자] 의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의 하나로, 왕권의 전제성을 밝힌 대목이다. 임금 노릇 하는 것은 의지만 있다면 깃털을 들거나 장작더미를  보는 것처럼 저절로 되는 일이라고 했다. 여건이 이러니저러니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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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에 따른 파괴를 수습해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山黨이고, 새로운 상황에 맞춰 질서를 빚어나가는 노선이 漢黨이다. 산당의 흐흠이 후에 노론의 주류로 흘러갔다. -79-

 

-김육과 함께 산다山黨에 대항한 인물이 최명길(1586~1647)이다.

병자호란 때 주화파로 어려운 길을 걸었던 최명길은 투철한 실용주의자 였다.  투항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만, 침공 전에ㅔ 충분한 대비를 해놓지 못한 이상 무작정 버티기보다 현실을 받아들여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는 것이 그의 주화론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양명학 연구의 창시자로 이름을 남겼는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양명학의 관점이 정치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79-

 

- 대동법은 1608년 경기도에서 시행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확장되는 데 100년의 시간이ㅣ 걸렸다.  이는 통상의 기득권을 지켜려고 하는 수구세력뿐만 아니라, 특히  김집(1574~1656) 이 반대에 나선 것은 유교 원리에 어긋나다고 하기 때문이다.    김집의 아버지는 예학의 태두 김장생(1548~1631) 이다. -77-

 

- 1806년에 집권한 안동 김씨는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 "세도가" 였다.  순-헌-철 3대의 세도정치는 "안김 정치" 라고도 한다.

정조가 죽기 전에 세자와 김조순의 딸을 정혼해놓은 것이 안동김씨 세도 정치의 씨앗이 되엇다. 그러나 이런  '세도 정치'를 정조는 기대하지 않았을 터인데 , 왜 김조순은 정조의 기대를 등졌을까? 

김조순은 조선 최고의 명문 집안이다. 병자호란 당시 충절의 상징이된   김상헌-김상용 집안의 후손이다. -103-

 

 

- 조선은 왕조 존재 기간의 대부분이 명나라, 청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는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다 는 것이다.-123-

 

-실종된 왕권;

안동 김씨 집권기에는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순조실록에, 이조원(1758~1832)은 1827년 2월 호조판서에서 봉조하로 물러난 것은 효명세자(순조의 아들이며,헌종의 아버지.대리청정을 한지 4년 만에 죽었다  )가 대리청정에 나서기 열흘 전의 일이었다.

부패로 단죄된 일개 지방관의 아들이 원로대신의 13년 전 '역모' 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그리고 뭘 믿었기에 격쟁을 하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일까?

한명숙 전 총리에게 뇌물을 줬다고 주장하는 '곽영욱' 보다도 더 황당한 고발자다.

결국 조선조 최고의 관복을 누린사람의 하나이며,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이조원' 이 흑산도로 귀양길에 오르고, 1832년3월,병사한다.    

5년 후에는 그의 죄를 더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시체의 목이 잘리는 수모를 당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에 비하면 훌륭한 법치국가다. -134-

 

- [매천야록] 의 고종시대 ;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 은 고종 시대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되어 있다. 매천야록은 정밀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야록 보다 실록에 가깝다. 기록을 위해 적극적인 조사까지 한 것 같다.(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펴냄의 [매천야록]을 읽기를 권한다.)-154-

 

-(참고글) ;

1855년 음력 12월11일 매천 황현은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에서 태어났다.  (서석마을에 생가 가 복원되어 있다)

매천은 세종 때의 명정승 '황희' 의 후손이다 임진왜란 때 충청 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싸움에 서 순절한 이름난 장수 '황진' 의 10대 후손이다.

매천의 先代는 본디 남원에서 세거했다. 매천의 할아버지 '직' 이라는 분이 광양으로 내려와 석사리에 자리 잡고 살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그의 아들은 '황시묵' 이고, 그 아들은 매천 '황현' , 그아들은 '황암현' , 또 그의 아들은 황 ?   교수이다.  [217. 조선의 의인들 - 박석무 지음]-481~488- 

 

- 한말 최고의 역사책인 [매천야록] 은 매천의 높은 史眼과 통찰력 때문에 최근세사 연구에 높은 평가를 받는다.  -[217. 조선의 의인들 - 박석무 지음]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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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천야록] 에서,  "그 명령이 운현에서 나왔다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매천은 서원철폐 정책이 정당하다고 보면서도 대원군이 이 정책을 추진한 동기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아 한 것이다.

이처럼 [매천야록] 의 내용을 통하여 대원군과 고종시대의 활동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엿 볼수 잇다.   서원 철폐 후 25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기록을 남길 때 매천이 대원군의 개혁정책에 찬성하면서도  석연치 못한 마음을 보인점이 두드러진다. -162-

 

-황현의 다음 기록들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을 보여준다.

"남정철이 평안 감사로 있을때 임금께 날마다 진상했는데, 임금은 그것을 충성으로 여꼈다.  그 후 민영준이 남정철을 대신하게 되자 ,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수레에 태워 바쳤다. 임금이 낯빛이 변하더니 꾸짖으며 말했다. '남정철은 정말 큰 도둑놈이었구나. 관서에 이처럼  금붙이가 많았는데 혼자서 다 해먹엇구나'   이때부터 남정철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시들해졌고, 민영준은 날로 부리기 좋은 인물인 되었다. "

 

왕이 왕 노릇 않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  이라는 맹자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고종은 왕위에 앉아 있으면서 왕의 권한만 생각했지, 왕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키우지 않은 것 같다. 1873년 말 친정을 시작한 이래 상황에 떠밀려 정책을 결정하였지,  확고한 국가관에 따라 어려움을 감당하련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169-

 

 

- 갑신정변이 개화를 향한 적극적 노력으로 많은 평가를 받아 온 데

나는 의문을 느낀다. 정변 주동자들은 이 변화를 난폭한 방법으로 성급하게 일으키려 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있다.  갑신정변은 임금이 임금 노릇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못하게 된 조선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었을 뿐이다. -170-

 

- 김홍집이 아관파천 때 '친일' 로 몰려 살해당한 것은 참 기막힌 일이다. 김홍집은 주체성 있는 친일을 하였다. 현실적으로 부득이한 선에서 일본의 힘을 인정하며 그 조건 위에서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은 그의 경력 전체를 일관한 태도였다. -174-

 

- "부자가 망해도 3년 먹을 것이 있다"  고 하지 않는가. 500년 동안 조선이 그만한 안정을 지켜왔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드문 일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질서의 인프라를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인프라가 유가 이념으로 표현되어왔기 때문에 망국에 임해서도 한국 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유가 이념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203-

 

- 100년 전의 망국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 는  한국 사회가 아직도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수집단이 손실을 초래하는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 현상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결선투표제도입,비례대표제 확대, 소수 집단에게조차 이익이 안 될 남북 대결정책 집착 등, 대한제국 지도부를 방불케  하는 퇴행적 행태가 지금도 펼쳐지고 잇다. 식민자가 되었다는 '결과' 보다  되던 '과정' 을 더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그때고 지금이고 사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일차적 요인은 힘 있는 사람들의 행동양식이고,공익을 중시하고 사회를 보호하려는 마음자세이다.    국가 부채가 늘고,환경이 파괴되고,  민족문제 해결이 지체되고 있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100년 전의 실패를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204-

 

 

- [매천야록] 에서 많이 씹힌 인물이 '이지용'과  '이근택'이다.

'을사오적' 이란 말에는 희생양의 의미가 다소 곁들여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당시는 고종과 대한제국  자체를 부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조정의 대신 몇 사람에게 상징적인 책임을 집중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지용은 을사오적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소문을 많이 일으키고 탐관오리로서 악명 높은 인물이다. 그가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나는 오늘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이 되고자 한다.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일갈했다는  이야기가 [매천야록] 에 나와 있다.  당시의 친일파도 자기 합리화에 애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명길에게는 전란으로부터 구해줘야 할 백성이 있었고, 청나라에 항복해서 잃는 것은 명나라와의 관계뿐이었다.  비현실적인 정통론으로 나라를 망치는 것과는 댈 것이 아니었다.   1905년의 상황을 1636년으 상황에 갖다 대다니, 정말로 두꺼운 낯가죽이다.

이근택에 관한 [매천야록]에는 이런 기사가 있다.

"이근택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는 형제의를 맺었고,이토 히로부미에게 의탁하여 義子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일본 신발까지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항상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하였다."

이런 에피소드들이 100% 사실일 것 같지는 않다. 아무턴 고종의 심복 중의 심복 노릇을 했다.  [매천야록] 에 적힌 정도의 행태는 욕을 일부러 사서 먹음으로써 의도하는 방향의 처신을 쉽게 하기 위한 책략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절의를 분명히 드러낸 인물인 당시의 참정대신인 '한규설'과 사돈을 맺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겉보기만으로 판단해버릴 인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근택의 '변절' 이 고종의 밀며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고종은 술수와 책략에 사족을 못 쓰는 임금이었다.  을사조약 같은 중대한 상황 앞에서 그가 양다리 걸치기르 시도하지 않았으리라고 상상하기 힘들다.  고종은 한편으로는  밀사들을 통해 조약 체결이 자기 뜻이 아니었다고,열강들에게 읍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믿을만한 충복을 친일파에 들여보내 정보도 수집하고 조그만 이익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을 것이다. -252~258-

 

 

- 민비가 살해당한 닷새 후에 엄 상궁을 불러들인 일을 놓고  황현은 "양심도 없는 사람" 이란 극단적 표현을 썼다. 아무리 '야록' 이라지만 선비의 몸으로 그런 표현을 임금에게 쓴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266-

 

 

- 일본의 '성공'과 조선의 '실패'  이유로 나는 두 가지를 주요하게 본다.

첫째는 일본이 먼저 그 길을 갔기 때문에 조선이 그 길을 독자적으로 찾아갈 기회를 잃었다는 사실이다.  판자촌의 한 집에 불이 나면 옆집에서 따로 불이 나기 전에 옮겨 붙기 마련이다.

또 하나 이유는 ,조선의유교정치 체제가 안정적 틀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푹푹 썩기는 했어도 틀은 멀쩡했다. 일본은 수준 낮은 정치 체제에서 였기 때문에 근대유럽이 제시하는 틀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적었고, 조선에게는 수준 높은 체제로부터 약육강식의 미개한 틀로 내려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안정된 유교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던 중국은 어떠했는가. 조선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293-

 

-어둠 속에서 잉태된 불륜의 씨앗이 더 강한 생명력을 다진단,ㄴ [맥베스] 의 대사처럼 폭력 속에 잉태된  한국으 근대화가 강인한 체질을 보인는 측면도 있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의 소질과 능력을 며니 미리 사려보교,사회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르 판단해야 한다. -296-

 

-.......-300-끝. 그냥 읽었음.(감상평;수준 높은 글이라 이해되지 않는부분이 자주나와 지루한 느낌을 준다.읽기가 쉬운책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