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 조일전쟁 - 백지원 지음
- 필자의 집필은 우리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려는 노력의 일환인데, 이러한 시도에 격려는 커녕 알지도 못하면서 '기존 역사에 딴지를 건다' 는 식으로 시비를 거는 것은 무식의 표출에 다름 아닌 것이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란 없었다. 1592년에 있었던 사건은 왜란이 아니라,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근대 수백 년 간 동양에서 일어났던 전쟁 중 가장 대규모이자 격렬했던 동아시아 국제전인 조일전쟁이었다. 이 전쟁에는 3개국에서 50만 명이 넘는 대병력이 투입되었고, 현대전에서 쓰이는 거의 모든 첨단무기가 동원되었으며, 20만 명 이상의 전사자가 생겼고, 희생된 조선인 총수는 거의 2백만 명에 이른 , 참혹하기 짝이 없었던 대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 (6.25전쟁) 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상 있었던 전쟁 중 가장 큰 두 개의 전쟁 중 하나인데, 이런 대전쟁에 대한 명칭을 왜란이라 함은 말이 안 된다. -5~6-
- 전쟁 발발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점령당했는데, 이는 세계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 정말로 쪽팔리는 일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20일 만에 도착했다는 것은, 슬슬 걸어서 주파하는 시간과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조일전댕이 끝나고 한 세대가 지난, 약 40여 년 후에 일어난 조청전쟁(병자호란) 때는 수도가 점령당하는데 단지 닷새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조선은 붙기만 하면 그냥 터지는 동네북이었다.
이렇게 정신 못차린 조선은 조일전쟁 때나 조청전쟁 때, 아니면 역모로 진작 망했어야 될 한심한 나라였다.
나라가 침공을 당해 나라가 거덜나고 백성들이 어육이 되어 '불구대천지수' 의 관계가 되었으면 '와신상담', '절치부심' 을 해서 그원한을 갚아야 옳지 어떻게 그냥 쳐먹고 놀다가 조청전쟁 때 또 거지가 되냐?
인구 800~900만이나 되는 나라가 겨우 인구 50~60만의 후금에게 손 한번 못 써보고 깨져서 항복한 후 평소에 개돼지로 알던 후금의 속국이 되었으니 , 한심한 정도를 넘어 참으로 불쌍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런데 권력에 눈이 먼 개 같은 서인들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광해군이 쫓겨나고 등신이자 유유부단의 대명사인 '인조' 가 즉위하는 바람에 개혁이고 나발이고 다 날아가버리고 삼전도에서 청태종(청 2대) 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부딪치는 '삼배구고두' 를 해가며 항복하는 치욕을 자초했으며, 그 이후 조선은 완전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조일전쟁 중 인구의 거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200여 만 명이 전사 또는 아사, 병사했으며 전투에서의 전사자만도 거의 20여 만 명에 달했고, 약 10만 명 내외으 포로들이 일본으로 끌려갓다. -26~27-
- 우리는 임진왜란, 명에서는 '만력의역' ,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의 역' 이라 불렀다.
유성룡은 [징비록] 에서 조일전쟁을 '번리지전( 울타리전쟁)' 이라 했다. 즉 명나라 요동 땅의 울타리인 조선이 치르는 전쟁이란 의미였다. -28-
-조일전쟁 당시 조선이란 나라가 얼마나 한심한 나라였는고 하니,
애새끼가 글을 공부하면 마루에 앉히고, 무를 공부하면 마당에 않혔다.
좌우간 조선은 그 거지 같은 성리학(주자학) 때문에 망했다.
조선의 멸망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바로 조선의 국체 이념인 성리학과 더러운 권력 싸움인 당쟁이었다. 성리학이 끼친 폐해는 크고도 깊었다. 오죽하면 전쟁 중에 상을 당하면 집으로 돌아가 시묘살이를 해야 했고, 왕이나 왕비의 제삿날도 국가기일이라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무슨 빌어먹을 나라가 전쟁 중에 먼저 죽은 수많은 왕의 기일을 모두 지켜서 그 날은 전투를 하지 않았으니, 이런 형편에서 전쟁에서 이기면 그게 잘못된 것이었다. -34~35-
- 조일전쟁과 6.25전쟁은 여러 면에서 많이 닮았다.
초반전에서 불리해지자 두 최고 지도자느 똑같이 도망치기 바빴다. 초반전에는 전세가 엄청 불리하여 거으 모든 국토르 점령당해서 망국 직전까지 갔으나, 이후 강대국이 개입하여 겨우 판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또 후에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서울에 들어온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서울이 북한군 점령하에 있었던 기간 동안 북한군에 협조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에만 열을 올렸다. 전쟁 중에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신성모는 부산에 배를 뛰워놓고 부산마저 적에게 함락되면 일본으로 튈 생각이었다. 반면, 전쟁 중에 미 8군사령광인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모책동으 아들도 중공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43-
-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군 총사령관 '노기' 장군은 그의 아들 셋을 이 전쟁에서 모두 잃었고 그 노기느 나중에 할복하여 생을 마감한다. '노블리제 오블리주' 라고 하던가?
일본과 조선 두 나라 사이의 개항 시기에 별 차이가 엇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세계적인 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배경 에는 이렇게 기득권층의 철저했던 도덕적 책임감 이 있었고, 조선이 망한 베경 에는 책임감은 커녕 전쟁이 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 등신 같은 임금과 나라야 망하건 말건 권력욕에 정신 없고. 재물 욕심에 환장한 썩어빠진 관료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44-
- 조선 최초의 대포는 고려 우왕 때인 1377년 최무선 에 의해서 개발되엇다. 고려는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의 건의에 따하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화기 생산에 들어갓다.
고려의 최무선은 1377년 함포를 창착한 전함을 개발하여 왜의 배 수백 척을 해전에서 격침시켰다.
조선의 화약무기 발전은 태종대에 시작하여, 세종대에 들어서서는 대대적으로 개발되고 생산되어 전국에 2만 문 이상의 포가 실전 배치되었으며, 당시 조선의 화약무기 발달 수준은 세계 최정상급이었다. 15세기 중반 여진의 침공에 대비하여 북방에 모두 1,650문의 대포가 배치되었으며, 현자총통만 1만 문에 이르렀다. 15세기 초인 당시 전세계에서 대포를 수만 문씩 보유하고 있던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다.
문종(조선 5대) 이 화차를 개발 하여 전국에 367량을 실전 베치했으며, 이들 화포의 규격과 제조 방법 그리고 사격 요령을 정리하여 [총통등록] 이란 책으로 편찬했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 권133 '오례군례서례' , '총통도' 와 1474녀 편찬된 [국조오례서례] 권4 '군례' , '병기도설' 에 모두 38종의 각종 무기가 그림과 함께 규격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59~60-
- 조선 후기의실학자였던 신경준의 [여암전서] 에 임진왜란 때 김제 사람 '정평구' 가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 에 강원도 원주 사람이 비차를 개발하여 공중에서 백 장
(200M) 을 날았다 하더라" 라고 기록했다.
정평구가 비행기를 만든 후 수차례에 걸쳐 조정에 보고 했으나 한 놈도 관심을 갖는 놈이 없어, 한 번 만들고 말았는데, 좀 똑똑한 것들이 조선을 통치했으면 비행기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만들었을 것이고, 달나라도 우리가 제일 먼저 갔을 것이다. 하나같이 멍청한 것들이 임금이라고 버티면서 밥만 축낸 바람에 조선은 19세기 말까지 비행기는 커녕 바늘 하나도 못 만들 정도의 미개한 나라로 추락하고 말았다. -72-
**위 무기 해설은 양재숙 저 [다시쓰는 임진대전쟁] 과 박재광 저 [화염 조선]을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
-일본이 자랑하는 천재 '오다 노부나가' 는 있는 돈을 죄다 털어서 3천 명의 철포대를 양성 하여 전국시대 최강의 기마군단이자 호적수였던 다케다 신겐의 무적의 기마군단을 시간차 연속 사격으로 궤멸시킬 수 잇엇다. 노부나가는 3교대 밀집 조준 사격 전술을 탄생 시켜 당시 일본군 조총부대는 병력면이나 화력면에서 전 세계 최강 집단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도순변사 신립은 조총의 성능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게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 하고 소리만 쳐다 막상 북진하는 일군을 맞아 충주 탄금대에서 기병을 끌고 나갔다가 쏠 때마다 맞지 않는 조총에 의해 박살이 나고 자살내지는 익사했던 것이다. 임금이나 장수들이 조금만 똑똑했어도 신무기의 성능를 시험해 본 뒤 본떠 제작해서 실전에 배치했을 것인데, 어째 모두가 하나 같이 돌인지.-78-
-조일전쟁 당시 항복한 항왜인은 무려 1만 명 이 넘었느데, 가장 고위급 장수가 '사야가' 였다. 더구난 그는 일군의 철포부대 부대장 출신으로서 일급 조총 기술자였다. 참전했던 일군들이 모두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84-
-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인데, 유성룡이 '평화시에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 이라 반대하여 무위로 돌아갔으나, 조일전쟁이 일어난 후 유성룡이 한탄하기를 '이율곡은 정말 성인이다' 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이율곡의 직계 제자인 김장생의 [율곡행장] 에서만 나오고, [율곡전서] [선조실록] 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는 김장생의 [율곡행장]을 인용한 것이다 .-90-
- 멍청이 선조 가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낸 이율곡으 이런 주장만 제대로 수용했어도 조일전쟁 때 그렇게 피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선조 시대는 조선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가장 많이 출현했던 시기이다. 이황,이이,조식,유성룡,정여립,이순신,정기룡,곽재우,김덕령 등.
등신 같은 선조 는 그들을 품을 아량도, 담을 그릇도 되지 못하는 바람에 나라의 부강은 커녕 되레 전쟁으로 나라가 거덜났다.-92-
- 1443년 신숙주가 일본에 다녀온 뒤 [해동제국기]를 썼는데,
이 저서는 일본에서 일본과 관련해 외국인이 쓴 최초의 인문지리서로 평가 받는다. -94-
- 통신사가 일본에서 돌아와 선조에게 귀국 보고를 할 때 정사와, 부사가 서로 정반대되는 보고를 한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나라고 지랄이고 없는 거지 발싸개 같은 당쟁의 폐해가 그대로 드러났다. 나라야 어떻게 되든 상대 당파의 의견에는 무조건 딴지를 걸어야 되는 것은, 요새도 그렇지만, 당시 당파 싸움의 기본이었으니 한심하고,또 한심하다.
어쩌자고 멍청한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부사인 양아치 김성일의 말만 믿고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있다가 결국 박살이 나냐?-99~100-
- 명이 조선에 원병을 파병한 결정적인 원인 은 전쟁이 명의 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순망치한' 이라했던가 ? 조선은 명의 입술밖에 지나지 않았는가?
(** 358년 후[1950-1592년] 중공군으 한국전개입때도 '순망치한'의적용을 받지 않으려는 전략은 아닌지? ) -103-
- 선조 ;조일전쟁이 소인배이자 간교하기 짝이 없는 선조때 일어나는 바람에 백성들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삶을 견뎌야 했다.
머리는 간교하나 멍청하고 질투심만 많은 소인재인 제 다가, 일잉 안 되려니까 왕위에서 40년씩이나 버텼다,
인조 ; 포로가 60만 명이나 잡혀간 조청전쟁 때는 '무능' 그리고 '우유부단'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등신 인조가 재위할 적이엇다.
고종 ; 조선이 멸망할 때는 평생를 멍하게 살았던 30여 년 씩이나 왕 자리에서 버티는 바람에 조선은 그냥 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똑똣한 인물들이 이들 대신에 왕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면 조선은 순풍에 돛을 달았을 것이다. -110-
- 선조대에 서인이 동인을 학살한 '기축옥사(1589)' 가 일어났다. 서인에 의해 조작된 옥사에서 수많은 아까운 인물들이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국력은 엄청 소진되고, 등신 같은 선조가 옥석 구분도 못 하고 무조건 때려죽이라고 펄펄 뛰고 나서는 바람에 5살 먹은 애새끼서부터 80살 먹은 노파까지 억울하게 연루된자들이 맞아죽었다.
거기다 선조를 등에 업은 서인인 꼴통 주정뱅이 정철 이 때 만났다고 설치는 바람에, 제 입맛에 안 맞는 인간들 또한 숱하게 맞아죽었다.
그 동안 선조는 식사만 잘 했다.
조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조란 인간은 외적을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북쪽으로 튀기에만 정신없고 조선 땅의 북쪽 끝인 의주까지 도망친 다음, 더 튈 데가 없자, 자신의 구명만을 위해서 대신들을 시켜 명나라의 요동총독에게 엎드려서 빌게 하기를 수십 번을 한, 참으로 구제불능의 한심한 인간이았다. 결국 명에서 "올려면 하인이나 몇 데리고 너 혼자 오너라" 라고 존심을 건드리며 거절하는 바람에 망명을 포기한 인간이 선조였다. 거기다 저 혼자 살자고 쪽팔리게 튄 것을 커버하기 위하여 공을 세운 의병장 '김덕령' 을 때려죽였고, 그 바람에 더러운 꼴을 본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이 보따리 싸고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여간 이 인간은 나라를 말아먹도록 진력한 등신 중의 상등신인 것이다. 이 인간이 바로 임진오적의 수괴이다.
머리는 완전 돌인 데다 잔인한 면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조 때, 초청전쟁이 일어나고, 역시 멍청하기 짝이 없는 데다 우유부단의 대가인 고종때 일본놈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임금이란 것들이 조일전쟁을 겪은 후에라도 정신만 똑똑히 차리고 방비했으면 비극을 피할 수 잇었는데, 하는 짓마다 등신짓만 골라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 가서 조상 자랑 한번 못 하게 된 것이다. 이거 얘기하다 보니까 '조선의 이씨 왕가는 유전적으로 좀 모자라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111~112-
- 이순신은 생김새도 무인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기지 않았고 선비형으로 단아했다. 키도 크지 않고 체구도 크지 않은데다가 병약했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고 강인한 면이 있고, 또한 자손심이 매우 강한 데다 근엄하고 농담도 하지 않아 친구가 적었으며 ,아주 청렴했다. -115-
- 이순신은 신도,성웅도 아니고,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인간이엇다. 병약했던 이순신은 육체적 질병으로 거의 매달 앓아 누웠고, 알 수 없는
운명 앞에서는 초조하여 점을 쳤으며, 가족의 안부에 노심초사했고,피붙이를 잃은 슬픔으로 통곡했던 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라고 싸울 때마다 이길 수는 없었으며,몇 번의 패전도 잇었다. 거의 대부분의 역사서에는 패전을 '성과가 없었다' 라고 표현하거나, '성과 없이 철수했다' 아니면 '승패가 없었다' 라고 써서 교묘하게 사실을 은폐해 놓았다. -118-
- 당시 막강한 함포가 장착된, 세계 최강의 함대를 보유했던 조선 수군 은 배의 크기도 작고 함포도 장착되어 있지 않은 보통 배를 보유한 일 수군과의 전력 비교에서 최소한 5대 1 이상의 비율로 우세했다. 즉 조선 주력 전함인 판옥선1척은 최소한 일 함선 5척 내지 10척에 비등하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20-
- 박정희 유신체제하의 군사정부는 자신들의 비정통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이순신을 그 도구로 사용했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1962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이 완료되었고, 1968년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건립되엇다. 1975년에는 박통의 지시로 한산도에 제승당이 건립됨으로써 현충사와 함께 충무공 참배지가 되엇다.
결국 박통 때, 이순신이 성웅으로 추앙받게 되어으며, 이는 박정희자신이 국난에서 나라를 구해낸 인물이라는 식으로 이순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의도였다.
이순신도 우리와 마찬가지의 인간이어서 보통 인간들이 흔히 지니는 결점도 지니고 있었지,무슨 신이나 성웅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이순신의 신격화와 우상화를 거부하고, 그가 따뜻한 마음을 가진 구국의 명장으로 우리 곁에 있기를 원한다. 이순신을, 인간을 초월한 인물로 만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겹겹히 포장하기를 원치 않는다. -121~122-
- 이순신은 1591년 2월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정3품) 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사가 되기 직전 이순신은 만포진 현령(종5품) 이었으며 ,다섯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오른 것이었다. 선조는 사간원의 장계를 물리쳤고, 조일전쟁 동안 선조가 잘 한 딱 한가지 일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될 때 사간원의 딴지를 막아준 것뿐이다. -116-
- 한국의 얼치기 네티즌들이 무식한 데다 목소리만 큰 인간들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면서 싸구려 민족 감상에 빠져 입에 침을 튀기면서 무작성 들이받는것이엇다. 하여간 아직도 한국에 이런 한심한 군상들이 이렇게 많은가 하고 필자는 엄청 놀랬으며, 이로써 엉터리 역사 교육의폐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지울 수 없었고, 인터넷 실명제가 조속히 시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가ㅔ 되었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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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가와 막부는 265년 간이나 존속하게 된다.
"천하라는 떡을 오다가 반죽하고, 히데요시는 그 떡을 구웠으며, 도쿠가와는 그 떡을 거저 먹엇다. "
이 말이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전국시대 세 영웅의 생애를 단적으로 설명한다 -158-
- 조선 수군 전략이 극대화 되엇을 때 보유한 판옥선은 거의200척에 가까웠다. 이러니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함대으 전력이면 영국, 스페인 어느나라하고 전투를 벌였어도 가볍게 승리했을 것이다.
판옥선 백수십 척에다 거의 2만여 명의 수군 병력이 동원되엇으며, 배에 장착된 함포 성능도 유럽의 대포보다 우수했으면 우수했지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았다. 함대에 장착된 함포도 판옥선 150척이면 척당 20문씩 계산해도 거의 3천 문이나 되는 가공한 화력이엇다. 이렇게 비교해 보앗다시피 당시 조선 함대를 능가할 해군 전력을 보유한 나라가 동서양을 통틀어서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166-
- 당시 부산에서 한양을 걸어서오면 보통 20일이 걸렸다. 그런데 일군은 수송대까지 끌고도 20일 만에 도성을 함락시켰으니,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임금이고 백성이고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모조리 다 튀어버려, 조일전쟁 초반은 어디가서 얘기할 수도 없는 정말 쪽팔리는 상황이었다. 고니시군은 한양에 접근하면서 격렬한 저항을 예상하고 신중하게 작전을 짰으나 쥐새끼 한 마리 없었음에 그냥 맥이 탁 풀려버렷다. -178-
- 선조가 북으로 도망친 후, 도원수 김명워과 부원수 신각이 한강 북안에 방어선을 폈으나 김명원은 백성으로 변복하고 전선을 이탈, 임금이 잇는 곳으로 도망쳤다. 그 비겁한 김명원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후에 도원수 자리를 그만 둔 후 공조판서가 된다. 이렇게 조선의 상벌은 앞뒤없고 개판이었다.
도원수 김명원은 도망쳐버리고, 부원수 신각까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정말 한 놈도 안 남고 모조리 흩어지고 말아 일군은 한양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성 (한양 무혈입성 1592.5.3 )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도성인 한양이 저항 한번 못 해보고 어이없이 떨어진 책임은 비겁한 간신배인 도원수 김명원이 져야 하나, 그런 한심한 인간을 도원수로 임명한 싸가지 없는 선조가 당연히 첫번째로 책임이 잇다.
평양는 한양이 함락된 지 한 달 보름 만에 , 그리고 침공군의 조선 상륙 두 달 만인 6월 15일 역시 무혈점령되었다. 평양성에 진주한 유키나가군은 덩 이상의 진격 없이 평양서어에 주둔하며 전쟁의피로를 풀엇다. 조선에서 가장 큰 성인 한양성과 두 번째로 큰 성인 평양성이 방어전 한번 못 해보고 무혈점령된 것이다. -180-
-임욱경의 지휘하의 조선군의 뒤를 따라 왕성탄을 건넌 일본군은 평양성를 공격하자 윤두수는 무기들을 풍월루 못 속에 처넣은 다음 순안으로 도망쳤으며, 도원수 김명원 등 모든 장수들도 군사를 이끌고 성을 탈출했다.
보시다시피 참으로 전략도 전술도 모르는 한심한 인간들이 전쟁을 지휘하여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전쟁이엇다. 도대체 몇 십 명의 일군을 죽이느 것이 전쟁 전체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쓸데없이 야습을 했다가 적에게 도강 지점 (대동강의 얕은여울인 왕성탄) 만 가르쳐주고, 전투에는 패해 어이없이 평양성을 뺏기고 만 것이다. -191-
- 박진의 경주성 탈환(1592.9.8) ;
4월 21일 가또 기요마사에게 빼앗겼던 경주성이 함락 넉 달여 만에 경상좌병사 '박진' 이 지휘하는 관군에 의하여 탈환되엇다. 뺏겼다 도로 찾은 건 이게 처음이다.
이렇게 커다란 공을 세운 조선의 명장 박진이 명나라 하급 장수에게 얻어맞아서 그게 병이 되어 죽엇다니, 도대체 명군이 원군인지 점령군인지 헷갈린다. 어떻게 팼길래 경상좌병사나 되는 박진이 골병이 들어서 죽었단 말인가? 하기야 영의정인 유성룡도 명군의 군량을 제대로 못 댔다고 이여송에게 무릎 끓고 욕을 엊어먹는 판이니 말해 무엇하랴만 그러고도 말 한 마디 못 하는 조선 조정, 참으로 딱하다. -202-
-(같은내용);
명군들은 도착하자마자 점령군 행세를 하며 약탈을 일삼았다. 명나라놈들이 얼마나 왕싸가지인고 하니 뻑하면 트집을 잡아 조정 신료들을 팼으며 경주성을 수복한 육전의 명장 '박진' 은 병사했는데, 죽은 원인이 명나라의 하급 장수인 '누숭선' 에게 얻어맞아 가슴뼈가 부서져 죽었다한다, 당시 '박진'은 황해도 병마절도사 (나중에 경상좌병사에서 승진?) 였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고, 이렇게 명군은 못되게 굴었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도 싸가지가 얼마나 없는고 하니, 자신이 한강에서 육지에 오를 때 신발에 물이 튀었다고 조선 관리를 새끼줄로 목을 매어 끌고 다닌 인간이 바로 진린이었다. -362~363-( 같은 묶음의 내용 )
-명군의 참전으로 인한 폐해 ;
명군의 민폐는 말도 못했다. 그들의 민폐는 심각한 지경에 도달햇다. 물론 명군지휘부는 이러한 민폐를 허용하지 않았다.특히 경략 '송응창' 은 명을 내려 민폐를 끼치는 자는 참하겠다고 염격히 명했으나, 명군 전체에 퍼져 있는 군기의 해이나 무료함 모두를 제어할 수는 없엇다.
또한 명군 지휘부서부터 선조 및 조정의 신료들을 우습게 알아 지방관리 정도는 그냥 밥이엇다. 지방 수령의 목을 올가미에 걸어 끌고 다니면서 개 취급을 하다 때려죽이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여서, 강화회담 후 명군 주둔지 근방에는 인적이 끊어진 곳이 있을 정도였다. -381-(같은내용)
- 조선 조정 최대의외교 현안이엇던 '종계변무' 는 1584년 선조 때의 역관 홍순언 이 정정사를 따라 북경에서 명나라 예부시랑(외무부차관) '석성' 을 만나서 해결되었다. 한편 석성은 명의 병부상서(국방부장관)로 승진하여 조선의 청병으로 명 조정에서 논란이 격렬할 때 조선 편에서서 파병을 찬성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러한 석성과 홍순언의 사적인 인연이 명의 조일전쟁 파병을 성공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 후 홍순언은 명나라 원병군 사령관 이여송의 통역관이 되엉 그와 함께 전장을 누볐다. 홍순언에 대한 기록은 [통문관지]에 상세히 실려 있고, [선조실록] [성호사설] [서포만필] [열하일기] [연려실기술] 등 모두 30여 권에 실려잇다.-207-
- 벽제관전투(1593.1.27) ;
일군의 조총과 명군의 기마대가 맞붙은 꼴이 되고 명군이 일군에게 대패하엿다.
다케다 신겐의 기병대가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병에게 박살난 사실과, 신립의기병대가 고니시의조총부대에게 전멸당한 사실 등 하여간 총이 개발된 후부터 덩어리가 큰 기병은 그냥 조총수의 밥이었다.
결국 명군은 파주를 버리고 개성까지 후퇴했다. 마침 군량이 떨어지자 명군 장수들은 회군을 주장했다. 이여송은 대로하여 도체찰사 유성룡,호조판서 이성중, 경기좌감사 이정행등을 불러 뜰아래 무릎을 끓린 채 꾸짖으며 군법으로 처단하겠다고 소리쳤다.
아니,조선군 합참의장 유성룡이 겨우 명의 요동 총병 이여송에게 무릎을 끓고 빌다니, 당시 나라 꼴이 이처럼 개꼴이었다. -213~214-
-도대체 선조의 용인술은 얼마나 한심한가. 비겁한 도원수였던 김명원, 진주목사로 임직하던 서예원, 경상도 관찰사로 관할 지역을 내팽겨치고 그냥 튄 데다가, 충신 곽재우를 잡아먹지 못해 역적으로 모함했던 상양아치 '김수' 는 뇌물을 얼마나 질렀는지 호조판서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었다. 이러니 등신 선조서부터 이런 한심한 인간들이 통치하는 나라가 썩지 않고 제대로 굴러가면,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226-
- 개만도 못했던 경상감사 '김수'는 적과 싸우지도 않고 도망만 다니면서 전투가 끝나면 나타나 의병들의 공을 가로채려는 경우도 잇었다. 곽재우에게 온갖 모함과 압력을 가했으며, 곽재우는 한때 절도사의 벼슬을 받았으나 그를 시기한 이놈저놈들에게 모함을 받아 귀양살이를 한 후에는 초야에 묻히고 다시는 더러운 조정 일에 나서지 않았다. -246-
-친한 전우였던 '김덕령' 이 선조에게 역모 혐의로 억울하게 맞아죽자 한때 경상감사 '김수' 으 모함에 빠졌었던 곽재우는 모친상을 계기로 낙향한 후 떠돌이 생활에 나섰다. 더러운 조정과 치사한 선조가 내리는 벼슬을 거절한 곽재우는 두 아들과 함께 패랭이를 만들어 팔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부호였던 집안이 의병 활동를 하는 동안 거지로 나 앉은 것이다.
일제 때도 이랬다. 독립군에 가담하여 가정과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대개 다 죽거나 거지가 되엇고 일제에 아부한 친일파들은 일제 치하에서는 물론 해방이 되어서도 떵떵거리고 잘만 살았다.
조정에서는 곽재우에게 계속 출사를 권했으나 거부한 곽재우의 행위는 임금에게 교만하고 도리에 맞지 않은 행위로 간주되었고 , 그 바람에 곽재우는 2년 간 영암에서 유배를 산 뒤 겨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엇다, 정말로 세상이 더러웠던 곽재우는 세상과 단절하고자 속세의 음식도 먹지 않고 솔잎만 먹는 벽곡을 했다. 조일전쟁의 영웅 곽재우를 죽인 것은 간교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등신 선조와 더럽기 짝이 없는 권력욕에 찌든 조정의 썩어빠진 신료들이엇다. -248-(곽재우 묶음 편)
-선조33년에 명나라 신종황제(명14대) 의 칙령에 의하여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동묘(관우묘) 가 건축되었다.신종은 임진왜란의 승리가 관우의 영험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여 동묘(관우묘)를 건축하게 했다.
또 남대문 근처에는 남묘(관우묘) 가 있다. 남묘가 건축된 다음 명나라 장수 '양호' 가 관왕의 생일 제례 때 선조의 참배를 강요하여 관왕의 생일이 5월 13일이니 생일 제사 때 와서 절하고 술을 따라바치라고 청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개꼴이냐? 한 나라의 왕이 중국의 통일국가도 아닌 분열 시대의 한 허약한 왕조의 장군에게 절을 하고 술을 따르다니. 선조는 내키지 않았지만 명 장군들의 강요로 할 수 없이 4배를 드리고 술을 따르게 된다. 아, 정말 쪽 팔린다.-236-
- 부호의 의병장 '김면'은 벼슬이 공조좌랑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키자 같은 해 5월에 52세로 기병했다. 후에 만석꾼이었던 가산은 탕진되어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게 되었는 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내다가 1593년 전장에서 과로로 병사했다. 나라를 위해서 기의했다가 제 몸 하나도 편히 돌보지 못하고 죽은 ,진실된 나라의 충신이엇다. 조정에 버티고 앉아서 권력 싸움만 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아,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
또 이러한 충신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후에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으니 선조란 인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이 드는 것이다. 251-
-우리나라에서 화약을 최초로 개발한 '최무선' 은 경북 영천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과 우왕 시절에 살았다. 최무선의 아버지 '최동순' 은 말단 공무원인 광흥창사였으나 집안은 그런대로 먹고살만 했다.
1377년 최무선은 동양에서 두 번째로 화약 개발에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 이 화약무기 개발이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화약무기 개발로 말미암아 고려와 조선은 막강한 화력을 갖게 되어다.
고려말, 주요 해안에 침입해 온 왜구를 화약무기로 가볍게 제압할 수 잇었고, 세종대에 김종서와 최윤덕이 동북면으 여진을 화약무기로 쉽게 제압함으로써 6진을 쌓고 현재 우리나라의 국경ㅇ르 확정지을 수 잇었다.
최무선의 비법을 이어받은 아들 '최해산 ' 이 태종대부터 당시 세계 최정상의 화약무기 보유국이 된다. 이러한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와
150여 년이 지난 후 조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화약무기는 조선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일전쟁 때 조선에 화약무기가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벌써 400년 전에 일본 땅이 되었을 것이다. -260~261-
-최무선이 개발한 무기 중 시대를 넘어 가장 뛰어났던 무기가 '주화' 다. 주화는 현대 로켓의 원리를 이용한 무기로 당시로는 획기적인 발명이었고, 서양에서는 19세기에 들어서나 개발된 것이다.
주화으 비행 원리는 세종대에 간행딘, 무기 제작법과 규격을 기록한
[국조오례서례] 와 [병기도설] 에 상세히 기록되어 잇다. 세종대에는 고려 때 개발된 로켓인 주화를 '신기전' 이라 불렀는데, 신기전은 폭탄이 달려있는 소형 화살을 말한다.
세종대에 신기전을 100발 씩 한꺼번에 쏠 수 있는 화차가 발명 되었고, 이 화차는 조일전쟁 때 개량되어 수동식 기관총 역할을 하게 딘다. 조일전쟁 때 권율이 행주대첩에서 이 화차를 수십 량 보유하여 일군에게 집중 사격을 퍼부음으로써 병력의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행주산성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잇었던 것이다. -262-
-(같은내용)
행주산성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던 신병기 화차는 전라도 장성 사람이자 전라도소모사인 '변이중' 이 조일전쟁 중 발명 했는데, 그는 어려운 전쟁 중에서도 사재를 털어 집을 공장으로 삼아 화차 수십 량을 만들엇다. 바로 그 화차로 권율이 행주대첩을 이루어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조정의 양아치들이 또 난리가 낫다. 신병기를 발명한 변이중 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 망정 고상한 것을 만들어냈다고 씹고난리가 났다. 나라에서도 만들지 못하는 것을 만들어 냈다고 언제고 정국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 인물로 찍힌 것이다.
변이중은 물리에 밝은 과학자로 그가 쓴 [망암집] 은 화차도설을 비롯하여 총통화전도설 등 수십 가지 병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그림으로 기록해 놓은 귀중한 병기서이다. 변이중은 화차를 개발한 후 씹히기만 하다가 그 재능을 써보지도 못하고 새상을 떠났다.
글라이더를 발명한 '정평구' 의 경우에서도 보셨지만, 하여간 조선이라는 나라는 제 정신 박힌 인간들이 발 붙이고 살 수가 없는 나라였다.
뒷날 변이중의 묘지명을 쓴 '윤광계' 는 "재주가 있어도 알아주지 못하고, 뜻이 있어도 펴지 못한 채 죽으니 사람의 탓이냐? 하늘의 뜻이냐? 라고 탄식했다. 참으로 한심한 나라, 한심한 새끼들.-218- **)
- 최무선은 [화약수련법] 과 [화포법] 이 두 권의 책을 써서 부인을 불러 아들 최해산이 자라면 책을 주어 화약무기 제조법을 익히게 하도록 당부했다 아쉽게도 이 책들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최무선이 죽고 아들 최해산은 화약제조법과 화포법을 익혀 조정에 나왔으며, 태종은 그에게 군기시의 벼슬을 주엇다. 최해산은 화약 6,900근, 화기 13,500정, 화포발사군 1만여 명을 양성했다.
세종은 최해산이 주도하는 화약무기 개발을 적극 지원하여 15세기 초 당시 조선은 세계에서 최첨단 화약무기 보유국이되었다.
현대인들 대부분이 최무선을 잘 기억하지 못하나,그가 화약무기 개발에 기울인 노력과 그 결과로 나라가 보존되었다는 공로를 생각하면 우리나라 역사상 10대 인물의 앞쪽에 백 번 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265-
-필자더러 우리나라의 10대 인물을 꼽으라면 ;
세종대왕
광개토 대왕
을지문덕 장군
최무선
이순신 장군
문익점
김옥균
전봉준
안중근
박정희를 꼽겠다. -269-
-한국의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라고 목에 힘을 주지만, 국민의식은
40위 정도라고 한다. 사실 한국이 선진국 소리를 들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한국인들이 버려야 할 표현이 바로 '니가 뭐야,임마' 다.
한국의 지도층에서는 노블리제 오블리주 정신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정신을 좀 차려서 당리당략만 생각지 말고 나라르 생각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갖기를 바랄 뿐이다. 당리당략만 찾다 망한 조선을 보고 반면교사로 삼아라. -293~294-
- 이순신 장군의 24승 중 웅포해전(1593.2.10) 과
장문포해전(1594.9.29)은 패전한 전투였다.
이순신장군도 사람인 이상 싸울 때마다 이길 수는 없었다.
웅포와 ,장문포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불패(24전24승) 신화가 허구라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312-
- 울산성전투(1597.12. 23) ;
정유재란의 마지막전투 가 울산성전투다.
일본 나고야성의 전쟁 박물관 에 보존되어잇는 병풍화인 [울산성전투도]에는 1597년 12월23일부터 다음 해 1월 4일까지 13일 간 벌어졌다. 이 울산성전투에 항왜인들이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들중 [모화당문집] 을 남긴 '사야가' 도 있었다.
결국 울산성전투 이후 전투 의욕을 잃은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을 포기하고 남하하여 서생포 왜성(**참고; http://blog.daum.net/cko2009/6980255 ) 에 주둔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 수성전으로 일관하다 히데요시가 죽자 바로 본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356-
-노량해전(1598.11.19) ; 이순신 최후의 해전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의 배가 위험에 처하자 이를 구하려 돌진하다가 일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54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 조일전쟁 마지막 해전에서 일 함선 약 200여 척이 격침되었으며,
조명연합군의 피해는 60여 척 정도였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에는 충청병사 '이시언' 이 임명되었다. -366-
- 조선의 멍청한 임금들과 신료들은 조일전재의 참혹함을 겨꼬나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군비를 제대로 못 챙겨 이후 두 번(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이나 청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항복하여 오랑캐, 개 돼지라고 멸시했던 여진족으 청나라를 부모의나라로 모시는 개꼴을 당했다. 조선의 국체 이념인 성리학이 준 피해 는 컸다. 전쟁중에도 상이나면 군역을 쉬고 3년 상을 마쳐야 했고, 국기일(역대 왕과 왕비가 죽은 날)이 되면 공무를 보지 않았으니 그 폐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겠다. 오죽하면 명군 장수들이 주자학은 죽은 학문이니 더 이상 매달리지 말라고 충고했으나, 조정에서는 주자학을 빼고나면 나머지는 모조리 이단의 학문인데 별소리 다 한다고, 돌아서서는 내뱉었다.
성리학 은 고루하고 진부한 논리로 나라의 진취성과 역동성르 억누르고 쓸데없이 말만 앞세운 명분에 얽매이도록 하여 실리를 잃게 하고 개혁을 저지함으로써 조선의 발전을 가로 막았다. -374-
-(같은 내용)
명군의 다른 충고는 고루하고 진부한 주자학에 목매지 말라는 것이다.
주자학 은 실사를 도외시하고 비현실적인 관념론에만 빠져 있어, 사소하고 형식적인 것에만 집착하게 함으로써 쓸데없이 옛 것에만 집착하게 만들고 변통을 모르기 때문에 명에서는 이미 한물 간 학문이다, 근데 조선에 와보니 지배층이라는것들이 모조리 주자학을 종교처럼 모시고 武備무비를 소흘히 함으로써 나라꼴이 개꼴이었던 것이다. -378-
-(같은 내용)
명군 지휘부를 통하여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국부를 증진시키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으나, 왕서부터 신료들까지 고루한 성리학 이념에만 파묻혀 이런 것들은 모두 천한 것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여 자기네들은 공자,맹자만 외우면 된다는 수구 꼴통들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명군이 철수한 후 명군의 영향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바로 옛날로 돌아가고 말았다.
광해군 대에 들어서서 각종군비를 착실히 준비했었으나, 인조반정으로 다시 옛날로 돌아갔고, 어영부영 지내다 조청전쟁을 맞아 맨날 개돼지라고 무시하던 여진족을 부모로 모시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380-(같은내용 묶음)
-명군들은 자기네 나라랑 너무 달라, 어디 미개국에 온 것이라고 하여 경락 '송응창' 의 토로가 기록되어 잇다.
"우리 군대가 들어온 조선은 하나의 별세계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은전을 사용할 수 없으며,푸줏간이나 술을 파는 가계도 없습니다.더구나 왜놈들의 분탕질 때문에 집들은 한결 같이 텅 비었고, 군사들응 입술에 채소국물 한 숟갈도 적셔보지 못했으며,염장을 먹어보지 못해, 말을 하자니 너무 서글퍼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그래서 요양 사람들을 불러 장사하도록 달려오게 했지만 길이 멀어 온 자가 적었습니다."
이것이 조선에 처음 온 명군의 느낌이었다. 이러한 명군의 불편을 해결한 것이 바로 명나라 상인들이었다. -376-
- 명 조정에서도 15세기 중반부터 변방에 소요되는 군량이나 군수물자를 현물 대신 은으로 지급함에 따라 부대 근처에 잡상인들이 꼬이고
창녀촌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6.25 전쟁 때 미군부대 근처에 나이트클럽과 창녀촌이 번창한 것과 똑 같았다.
명군은 조선으로 들어온 명 상인들을 통해 생필품 구매에 토록하여,
명 상인들은 조선인으로부터 생필품과 가축 등을 사서 명군에 압품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이때부터 비로소 조선인들도 은의 가치를 알아 거래을 시작했고, 화페 경제가 발붙일 터전이 일구어졌다.
어쨌든 이런 과정은 조선 사람들이 은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미포(쌀과 면포) 를 대신한 화폐경제가 얼마나 편리한 가를 경험하게 되어 물물교환 대신 화폐가 유통되는 계기가마련되었다.-377-
- 명에서 강화 사신이 왔을 때 수행원이 수백 명서부터 2천 명까지나 되엇다. 이들을 잘 처먹고 잘 마시게 하려면 조선인 수만 명이 굶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먹을 것이 바닥난 조선 백성들은 서로 잡아먹기 시작했고, 젊은 애들은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엇다.
남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명군은 조선 여자들을 취하여 같이 살았다. 부대 주변에 창녀가 들긇었고, 남자는 명군 부대에 들어가 잡일을 하는 자도 많았다. 최소한 명군에 기대면 굶을 염려는 없엇기 때문이다.
쉽게 애기해서 우리 군이 월남에 파병되어 그 곳 현지 여자들가 같이 살아서 혼혈들을 양산한 것과 똑 같았다, -383-
- 전쟁이 나면 여자는 승자의 전리품이 되는 것이 오랜 전쟁의 관행이었다. 7년 간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군들에게 현지의 처첩들이 합법적으로 허용되었다.
힘이 없어 여자 하나 지켜주지 못하고 적에게 훼절하도록 해놓은 등신 같은 사내 들은 여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몰래 친정으로 가기도 하고 갈 데가 없으면 매춘을 햇으며,또는 거지로 살아가기도 했다. 일군의 아이를 임신하고 집에서 쫓겨난 여자들이 너무 많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그 여인들을 한 군데서 모여 살도록 했고, 그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 주어다. 그 곳이 '이태원'이고 '이태' 란 '다른 태'란 의미이다. -389-
(** 징기스칸 도 처음에 처를 빼았겼다가 다시 찾아 임신된 부인의 아들을 자기의 첫 아들이라고 말 하였다. 영웅답다. 남자다.**)
- 조선이 원류인 명품 다기가 한국에는 남아있지 않다니, 참으로 한심한 인간들 , 맨날 귀천만 따지다가 그 꼴이 된 것이다.
일본에 잡혀가 이름을 날렸던 도공 들은 이리타 도자기의 시조 이삼평과 사쓰마 도자기의 심수관 그리고 가라쯔야끼 종가 나가자또 마다히찌, 이작광,이경 등이 유명하다. -401-
- 조선의 멍청한 인간들아, 조선의 도자기는 다 어떻게 됐니? 어째서 그 흔해 빠졌던 사발들이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가 잇냐?
이것이 다 싸가지라고는 쥐뿔도 없는 양반들이란 것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 생긴 비극인 것이다. 결국 양반들이 도공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바람에 도공들은 자식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려 하지않아 그 명맥마저 끊어지고 그저 몇 개가 남지 않아 박물관에서 눈요기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 인간들 싸가지가 얼마나 없는고 하니. 조일전쟁이 발발한 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천민과 같이 의병 활동을 할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천민 의병은 거기서도 눈물을 삼키고 저희끼리 따로 모이거나 아니면 열받은 김에 산적이나 강도로 변신하기도 했다. -405-
- 희한한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는 역성혁명이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왕조가 바뀌지 않아 천황가르 만세일계라 부르고 있는데, 현재 130대 천황쯤 될 테니 세계에서 가장 긴 왕조임에는 틀림없다.
하여간 얘들 공항에서 깃발 밑에 줄 서는 것을 봐도 권위 아래 순종하는 것이 몸에 배인 족속들이다. 하기사 그렇게 말 잘 들어야 선진국 국민이 되는 것이다.
제 분수도 모르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 데서나 나서거나, 상대의 말이라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비부터 걸고 나오느 한국 국회의원 같은 인간들은 선진국 국민 소리를 들으려면 본인 당대에는 어림 반푼 어치도 없다. -429-
- 1853년 7월 페리제독에 의해 일본이 개항하게 되고, 조선은 1876년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개항하여 두 나라의 개항 시기은 23년의 차이밖에 없으나, 일본은 아시아의 패자가 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렇게 천당과 지옥으로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른 것은 지배층의 자질 차이였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인물들은 다양한 문물을 경험한 데다 역동성이 넘쳐나는 젊은 애국자들로 확고한 개혁 의지와 비전을 가지고 혁명을 성공시켰고, 조선 개항 시의 인물들은 제 당파,제 집구석, 제 배때기만 생각하는 썩어빠진 관료들과 멍청한 왕, 그리고 돈과 권력에 환장한 민씨 척족들이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438-
- ........-487-끝.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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