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 조선왕조 실록 下 -백 지원 지음
- 역사는 지혜의 보고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처리 과정과 결말을 보면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고, 또 미래를 예측할 수 잇다. 독자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큰 문제는 과거에 한 번 이상 일어났던 일들 이다. 역사란 과거의 경험을 배워서 미래를 설계하는 학문이다. 왜곡된 역사는 역사가 아니고, 우리는 거기서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5-
- 조선은 조일전쟁 이후 멸망까지 약 300년 동안 25년 간의 정조(22대) 시대를 빼고는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는 왕조였다.
백성의 90%를 웃돌던, 상민과 천민, 서얼들에게 조선은 정말로 개 같은 나라였다, 그들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한 줌도 안 되는 양반들의 수탈과 억압 속에서 짐승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9-
- 조선 시대 백성들의 참상은 말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잘 살고 잘 처먹는 인간들은 전인구의 10%도 안 되는 양반계층뿐이었다. 근데 왜 다른 역사책에는 이런 스토리가 한마디도 없지? -101-
- 인조반정에서 특등공신은 김류,이귀, 신경진 등이었고, 김자점은 모의에는 참가했으나 별 힘이 되지는 못했다. 김좌점은 1, 2차 조청전쟁 때 도원수를 맡았는데 별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도망만 다녔다. -27-
- 예송논쟁 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논쟁인고 하니,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효종이 죽은 후 상복을 1년을 입느나 3년을 입느냐, 또 효종비가 죽자 상복을 1년을 입느냐 3년을 입느냐 는 것을 가지고 현종 재위 내내 10년이 넘도록 서로 악다구니를 써댄 것이 었다. 미친 놈들 같으니.
이런 쓸데없는 예송논쟁 같은 것이 조선을 중병에 들게 하여 병원이 골수에 침투함으로써 조선은 희생 가능성이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32-
- 조선 시대 백성들의 생활은 짐승들의 생활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는 요새 말고는 역사상 한 번도 잘살이 본 적이 없었다. 명군이라던 세종대나 , 현군이라던 정조대도 마찬가지로 지지리도 가난했다. 공과는 좀더 훗날 평가되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고 있는 것에는 군사독재정부 시절의 박통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박통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역사상의 인물 중 가장 성공한 통치자였다. -98-
- 조선 사신이나 선비들이 연경(북경)에 가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유리창' 이다. 유리창 은 연경에서 서점을 비롯해 붓,벼루 등 선비들의 소요 물품이나 기타 진귀한 노리개감들을 취급하는 업소들이 모여 있는 거리 이름으로, 가게가 1,000개가 넘을 정도로 큰 시장이엇다. -175-
- 규장각 4검서 로 유명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는 연암을 학문적 지도자로 받든 연암학파의 대표주자 들이었다.-178-
- 유득공의 대표작 [발해고]는 발해의 역사를 발굴하여 취합한 것이다. 우리는 유득공의 [발해고] 를 통한 여 발해 역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발해고] 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해관계 역사서이다. 유득공은 [발해고] 를 정조 8년에 썼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로 우리의 역사가 한반도 안으로 축소된 것을 통분히 여겨 기존의 역사인식을바꾸고자 [발해고] 를 썼다. 유득공이 서자 라는신분을 뛰어넘어 중국에까지 알려진 학자였으며, 북학자와 역사지리학자로서 우리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놓은 인물이엇다. -192-
- 박제가는 과거제도 쇄신책을 주장했다. 당시 과거의 부정행위는 극에 달하고 잇었다. 커닝,시험문제 빼내기,대리시험, 합격자 미리 정하기 등 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과거에 합격했다고 벼슬을 얻는 것도 아니었다. 인맥이나 학맥,금맥이 동원되었으며, 이도 저도 없는 놈은 과거에 합격하고도 현직에 나가려면 수년씩 기다려야 차례가 왔다. -196-
- [오주연문장전산고] 를 쓴 정조대의 학자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 은 서얼이었기 때문에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재야에 몸을 담은 채 학문을 닦아 나갔다. 서얼은 정조 때 잠깐 등용되어 빛을 보는가했더니, 정조가 죽은 후 다시 신분 굴레에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참으로 질긴, 개 같은조선의 신분제도다. -266-
- 18세기가 되자 전국에 서원이 1,000개가 넘엇으나 초창기에는 공부도 제법 시키고 하다가, 점차 파벌로 나뉘어 당파 싸움의 온상이 되더니 종장에는 부패의 온상으로 변해버렷다. 유생이 되면 군대를 안가고 부역을 안해도 되니 이놈 저놈 모조리 돈과 빽을 써서 유생으로등록하거나 서원에 취직했다. 거기다, 향교와 촌구석 재배권으 놓고 치고 박고 하고,
또 저희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고 날리였으며, 큰 서원 근처에 식당과 술집이 북적부적해 도저히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298-
- 최익현 이란 인물은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하여 우습게 보이지만 기질이 강한 데다 정치적 술수에 능란한 노론의 골수분자로 대원군 집정시절 대원군을 들이받고 유배가기도 했다. 또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74세의 노령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 법정에서 3년 형을 선고받고 대마도로 끌려간 후 4개월 후에 풍으로 죽느다. 누가 또 단식하다가 죽었다고 헛소리를 했느데 이는 모두 사실이아닌 소설이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소설을 배우고 잇다. 말하자면 최익현은 제 스스로는 조선을 위한 애국자였으나, 애국하는 방법이 수구 꼴통들의 전형적인 방법이었으므로
실상황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316~318-
-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서구 문물을 잽싸게 받아들여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끼게 된 일본은 6년 뒤인 1874년 대만 원정을 단행하여 반식민지로 만들고, 1879년에느 오키나와 제도르 병합한 다음 호시탐탐 조선을 넘보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얘네들, 겨우 개항한 지 20여 년 사이에 웬 힘이 그렇게 붙었지? 그런데 조선으로 하여금 강제 개항을 하게 만든 운양호가 엄청 큰 철선으로 보이시지? 당시 조선이 얼마나 한심한 나라엿는고 하니, 조선을 침공한 운양호란 함정은 철선도 아니고, 겨우 250톤 내외의 작은 목선이엇고, 승무원도 겨우 80명 정도였다. 단지 함선에 장착된 함포가 영국제로서 조선 포대 함포의 사정거리보다 10배쯤 뛰어났다. 조선의 초지진 포대는 이 별 볼일 없는 배에 박살이 난 것이다. 일본군은 영종도에 상륙하여 민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 영종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렇게 일본군들은 10여 일 동안 실컷 분탕질을 치고 돌아갓다. 이 때가 1875년 이다.
다음 해인 1876년 7척으로 구성된 일본 중무장 함대가 일장기를 휘날리면서 800여 명의 정규군을 태운채 남양만에 이르렀다. 도대체 조선을 얼마나 물로 보았으면 겨우 800명을 보냈을까? 이 때 일본의 현대식 군인 복장을 본 조선 관리 들은 "서양 사람들의 강요로 저런 우스운 모양새가 되었다" 라며 비웃었으니,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고 우물 안 올챙이였다. 불상한 것들.
결국 일본 애들하고 한 테이블에 앉아서 지난 번 운양호에 포격ㅇㄹ 가한 것에 대한 추궁과 통상협정을 논의하여 그냥 일본 애들 요구하는 대러 들어주 둘 수 밖에 없었다. 싸워서는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조일전쟁 때는 함포를 수십 문씩 장착한 판옥선을 200척씩이나 보유한 세계 최강의 해군국이었는데, 몇백 년이 더 지난 지금 발전은 커녕 퇴보를 거듭해서 겨우 군함 몇 척, 군인 수백 명의 침입으로 나라가 감당 못해 꼬리르 내리고 하자는 대로 하다니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질 않는다. 당시 쳐들어온 숫자를 보면 몇만 명도 아니고 겨우 몇백 명 수준인데 이런 하찮은 병력을 감당 못해 손을 비비다니, 접시물에 코 박고 죽을 새끼들.
강화도 열무당에서일본 전권대사와 마주앉은 조선 관리들은 이유원,박규수, 이최응, 김병학, 김병국 이었는데. 이중 국익을 위해서 개방해야 딘다고 생각하고 잇는 사람은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뿐이었다.
결국 2울 27일 강화도 조약 (병자수호 조약) 을 맺었다. 일본 상품은 무관세로 들어오고 치외법권을 인정했다. 우리는? 물론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이 1876년 2월26일 조선이 외부 세계에 최초로 공식적인 문호를 개방한 날 로서, 일본보다 개항이 딱 20여 년밖에 늦지 않았는데, 바로 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거 봐라. 이 멍청한 것들이 왕이라고 버티고 앉아서 개뿔도 해놓은 것은 없고, 오래 산 만큼 쌀만 축내고느 그냥들 갔다. 이러니 어떻게 나라가 안 망하고 견디냐? 하여간 일본 놈들은 지네들이 개항할 때 서구 열강들에게 당한 개꼴을 조선에게 똑같이 강요햇다. 망할 새끼들, 지들이 당한 것을 그대로 조선에 강요해? 정말 질 나쁜 새끼들 같으니라고. -323~325-
- 조선 말기에 조선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처넣은 주범은 대원군도 김옥균도 아니고, 부패한 안동 김씨들과 멍청한 고종 그리고 민비의 후원을 받은 썩어빠진 민씨 척족들이엇다. 백성들의 삶을 도외시한 그들의 권력을 향한 더러운 욕심과 재물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조선을 망친 것이지,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이아니엇다. -343-
- 중학생 때인가 수학여행 코스 중에 빠지지 않는 코스가 경주의 첨성대였다. 그런데 첨성대가 뭐에 쓰느 물건인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은 데다가, 건축 규모가 2층 집 크기도 안 되는 아주 아담하고 한심한 규모였다. 지금부터 1,300여 젼 전에 지어졌다던가.
학생들이 첨성대 수학여행을 가면, 지도선생은 5만 명이 들어갈 수 있었던 로마의 원형극장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얘기를 꼭 해 주어야 한다. 아니면 달에서 보이는 만리장성 얘기를 해주든가. 첨성대보다 3,500년도 더 전에 이집트란 나라에서는 첨성대보다 수만 배, 아니 수십만 배 크기의 건축물을 지었고, 그게 지금도 그대로 멀쩡하게 남아 있다고. 첨성대 같은 데 안 데리고 가는 것이 바로 한국인의 자긍심을 길러 주는 거다. -338-
-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는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하자고, 고종에게 코치했다. 이에 이홍장은 3,000명의 병력을 조선으로 파병했다.
당시 淸의 이홍장은 조선의 정책이 영 마음에 들지않았다. 대원군은 청과 상의도 없이 무조건 척화정책을 썼고, 고종도 청을 무시하고 일본과 가까이 지낸다고 생각하고 있던 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판을 엎어달라는 고종의 청이 들어왔으니 , 강을 건너려고 나루터에 왔는데 막 배가 도착한 격이었다 -339-
- 1882년 3월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바다에 대한 금령을 풀고 여러 곳을 개항했느데 이렇게 중국 배들이 인천과 야화진에 다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상인과 노동자들이 조선땅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인천의 차이나 타운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은 중국인들을 엄청나게 박해햇다. 때문에 한국에서 살던 화교들이 기를 쓰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이렇게 해서 미국에 뿌리내린 중국인들은 한국이라면 이를 간다. 어쨋든 프라이팬 하나 가지고 세계를 제패한 중궁인이 한국에서만은 코피가 난 것이다.
청의 이홍장은 그때까지도 조선이야 청의 속국이지 어디 가? 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던 인물로, 독일인 양아치 묄렌도르프를 조선의 재정고문으로 앉힌 다음, 그를 통하여 조선 경제를 중국에 종속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345-
-김옥균은 상해에서 동족인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과영 홍종우는 파렴치한 암살자인가?
홍종우가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자 파리의 박물관 서서로서 프랑스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을 번역하여 출판한 지식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362-
- 을미사변(1895.10.8 / 민비시해사건)
일본은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를 신임공사로 내정했다.
미우라는 1895.7월에 조선에 부임했다. 미우라는 친일성향의 조선훈련대(1895.4월 창설) 의 제2대대장 '우범선'에게 동원령을 내렷다. 일본 낭인 그룹은 경복궁으로 난입하여민비를 죽엿다. 민비를 시해한 낭인은 '데라자키'로 알려져 잇ㅆ다. 민비는 결국 일본 정부의 음모에 희생디어 44세의 나이에 참혹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그녀는 분명히 영리하고 정치적 능력도 갖추고 잇엇으나 그 재능을 조선의 국익과 백성들을 위하여는 쥐뿔도 쓰지 않았다. 민비는 그 능력을 저희 집안 잘 처먹고 잘살면서 권력을 천년 만년 유지하는 데에 바쳤으며, 자신들의 권력을 탄탄히 하고 또 국내 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의 군사력까지 끌어들여 나라의 자주권을 크게 훼손시킨 인물이다.
고종의 아관파천(1896.2월) 으로 친일내각( 제3차 김홍집 내각) 이 무너지자, 민비시해사건의 조선인 가담자인 이두황,우범선,황철 등은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러다 조선 조정에서 보낸 지객인인 '고영근'에게 우범선은 피살되었고, 이두황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사면을 받아 조선에 들어와 살았다. 우범선의 아들이 바로 농학자 우장춘이다. 우장춘 박사는 평생 자신의 부친인 역적 우범선의 죄를 지고 살았으며 고국에 돌아와 죽을 띠까지 육종학에 종사하여 아버지의 죄를 일부나마 속죄했다.역사는 돌고 돈다. -423~424-
- 을미개혁,양력사용과 단발령(1895)
민비를 제거(1895.10.8 )한 일본은 고종을 압박하여 친일내각(제3차 김홍집 내각1895.10월) 을 출범시켰다. 새 내각의 급진 개혁정책을 을미개혁 이라고 한다.
새 내각의 개혁정책 :
1.태양력 사용 ; 음력 1895.11.17을 폐지하고 양력1896.1.1일로 사용.
2.단발령 실시;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었다.
상투를 자르는 것으로 조선 백성들은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조선은 자신들 밖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캄캄 무소식이었다. 그까짓 머리 좀 짧게 깎으라는 것 가지고 전국이 솥에 국 끓듯이 날리가 났다.
그 당시 세계는 독일은 벤츠를 타고 다녔다
미국은 포드를 타고 다녔다.
영국은 런던의 인구는 550만이었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30~40만 정도이다. 런던과 글래스고에 지하철이 다녔고, 거리는 자동차로 넘쳤다. 당시 세계 최강인 영국의 힘은 해군력에서 나왔다. 대영제국의 해군력은 그 다음의 강국들인 2위, 3위의 해군 함대를 모두 합친 것보다 강해야 된다는 것이 영국의 해군 전략이다.
이 함대들이 전세계를 식민지화하는데 앞장섰고 함대의 함포 사거리가 미치는 지역은 모조리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재화로 대영제국은 번연ㅇ했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세상의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전국이 통곡 소리에 파묻히는 희극이 벌어지고, 뻑하면 유생들이 도끼르 메고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나 하고 있었으니 , 서양 사람들이 볼 때 조선은 수백 년간의 정체에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중세에 그대로 머물러 잇는 희한한 나라엿다
동방의 고요한 나라가 아니라, 동방의 미개한 나라였던 것이다.
청나라도 1644년 중국 전국에 변발령이 내려졌다, 중국의 변발령은 우리보다 벌써 250년 전에 있었다. 변발령을 어겻다가는 그냥 사형이었으니, 조선의 단발령은 댈 것도 아니게 엄한 법령이었다. 조선의 단발령은 아무것도 아닌데 왜 울고짜고 들 날리를 죽여? 특히 최익현 같은 꼴통이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 " 고 선언하는 바람에 , 멀쩡한 유생들이 칼로 목을 쑤시느 사고가 속출했다. 듣다 보니 무슨 "닭의 모가지르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라느 어떤 멍한 인간이 한 멘트가 생각난다. 좌우지간 공자가 헛소리 한 마디 늘어놓은 바람에 여러 사람 작살났다. ( '신체와 발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치 말라' 고 헛소리? 를 한 바람에 단발령이 내리자 관리는 공직을 사퇴하고 유생들은 반대 상소문을 쓰느라 종이값이 확 뛸 정도였다.)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유생들의 의병이 일어나, 관아를 공격하고 서울 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했고, 1896. 2.11 에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친러내각이 수립되고 단발령이 철폐되자 잠잠해졌다. -425~428-
- 아관파천(1896.2.11)
한 나라의 국왕이 자기네 나라 주재 외국 공관에 머물면서 자그마치 1년을 버티게 디었다. 그 1년 동안 다른 나라 공사들에게 얼마나 팔렸을까? 아, 도대체 망신스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구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고 친일내각을 무너쯔리자 일본은 닭 쫓던 개 꼴이 되고 말았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보람도, 민비를 사해한 대가도 찾을 길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러시아는 고종을 1년간이나 거저 먹여 주고 재워 주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고종이 1년간 러시아공사관에서 개기면서 밀린 밥값과 숙박료를 러시아는 압록강, 두만강,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과 함경도 경원 및 강릉의 산 채굴권으로 받아갔다. 고종은 결국 1년 동안 남의 집에서 쪽 팔리는 멍청이 짓만 하다가 1897.2월 비빈들과 궁녀들을 이끌고 경운궁으로, 도로 집에 돌아온 것이다. -429~431-
-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 총사령관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었다.
도고느 고집이 엄청 세서 윗사람 말에 전혀 복종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 필자 생각에도 애들은 어렸을 때 좀 못되야 커서 뭘 한다. 애가 어렸을 때부터 너무 착하면 평생 남에게 치어 살기 쉽다. 애 기를 때 참고하기 바란다. -446-
- 태프트 - 가쓰라 회담
1905년 7월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는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 와 비밀회담을 가녔다. 이 회담응 통해 미국은 일본의 조선 점령을 양해하는 대가로 필리핀 식민지 점령을 인정받았다.
미국에게 필리핀은 태평양을 경영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으며 , 이로써 미국은 일본으 태평양 진출을 봉쇄할 수 잇었다.
조선이야 어느 놈이 먹어치우든 미국은 전혀 관신이 없었다. 러일전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요새 기가 살기는 햇지만, 일본이 라는 동양의 조그만 나라가 러시아라는 서양의 대제국을 깨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여간 일본 애들은 동양에서 베트남 사람 다음으로 독종이다. 조선 사람은 ? 조선 사람은 뒤에서 세는 것이 훨씬 빠르다. -459-
- 독도 :
일본해군은 동해에서의 제해권 확보를 위해 전략적 가치가 있었던 독도를 주인 없는 섬이라 우기곤는, 1905년 2월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시마네현의일부로 선포해 버리고 그때부터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상태로 전략한 처지라 외교권이 없는 바람에 아무 데도 항의할 데가 없었다. 미친 놈들, 멀쩡한 남이 땅를 힘 좀 잇다고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
그런제 참으로 묘한 것이, 일본애들 개개인은 세계 어딜 가도 대접받느다. 애들이 그렇게 공손하고 예의바를 수 없기 때문이다. 헌데 이상하게 모이면 양아치가 된다. 거 왜 그러지? 독도 가지고 자꾸 주접을 떨면 대마도를 먹어 버려야 한다, -460-
-........-487-끝.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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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 는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 1906년 2월1일부터 통감부를 설치 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맡았다. 고종은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은 서류상으로만 그런 것일 뿐 실제적인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부터였다. -465-
- 1898년 고종을 몰아내려는 모의 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04년 특별사면을 받은 이승만 을 미국에 밀사로 파견했다. 이승만 의 영어 실력을 믿은 것이다. -466-
- 정조 이후 조선 멸망까지 딱 100년 동안 부패의 극치를 보여준 안동 김씨가 60여 년간 세도 정치를 했고, 뒤를 이어 이들의 세도 정치를 보고 배운 민씨 척족들이 거의 20년간을 갈퀴로 긁어댔다. 그 바람에 조선에 남은 시간은 겨우 20여 년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 20여년 동안에 있었던, 대원군의 섭정 기간이 죽어가는 조선에 마지막 기력을 불어넣은 기간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일본이 삼키지 않았어도 저절로 자빠질 나라였다. -481-
- 지금 세계 어디다 내놔도, 혼혈민족으로서 우성만 물려받은 한국인들의 머리 하나는 다른 인종에게 절대 빠지지 않는다. 단지 그간의 가치관의 왜곡 때문에 싸가지 없는 인간들이 다른 나라보다 좀 많은데다. 부정부패에 대하여 관대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집단건망증이 있어서 금방 잊어버린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앞으로는 조금씩이라도 나아질 테니까, 어쨌든 한국의장래는 조금도 걱정할 일이 없다. 단지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천박한 물질지상주의의 가치를 바꿔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층의 사고방식부터 바뀌야 한다 .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우기고 싶은 사람들은 그의 위치에 합당한 의무감을 가져야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가져야 한다. 멀쩡하던 사람들이 정치판에만 뛰어들면 양아치나 속물로 변신한다. 우리나라는 정치판 쇄신부터 해야 한다.
하여간 지금 같아서는 안 된다. 어째서 청렴한 인물은 없고, 엄청 쳐먹고 뒤로 꼬불치고 나서 29만 원밖에 없다고 오리발 내미는 인간들만 있을까? 지금이 중종 때 조광조가 추진했던 도덕재무장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재벌들은 잘 들어라. 사람인 죽을 때까지 먹고 살기에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 없으며, 자식들의 교육만 똑똑히 시켜놓으면 알아서들 먹고 사니, 주가 조작 같은 거 이제 그만 해라 그래야 존경받는다. 필자도죽기 전에 있는 인간들 존경받는 것 좀 보았으면 좋갰다.
1961년 국민소득 70달러의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여 위 국가가 디기까지 30년 밖에 안 걸린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뿐이다. 다른 나라는 대개 1세기 정도 걸렸다.
과거의 부끄러운 점을 거울삼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과거에 가난했나? 그럴 때도 있을 수 있지 뭐,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니? 지금 잘 먹고 잘 사는데.(끝) -486~487-
- 끝까지 잘 봤습니다.
조선왕조 게보(519년, 1392~1910)
1태조 1392-1398
2정종1398-1400
3태종1400-1418
4세종1418-1450
5문종1450-1452
6단동1452-1455
7세조1455--1468
8예종1468-1469
9성종1469-1494
10연산군1494-1506
11중종1506-1544
12인종1544-1545
13명종1545-1567
14선조1567-1608
15광해군1608-1623
16인조1623-1649
17효종1649-1659
18현종1659-1674
19숙종1674-1720
20경종1720-1724
21영조1724-1776
22정조1776-1800
23순조1800-1834
24헌종1834-1849
25철종1849-1863
26고종1863-1907
27순종1907-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