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 후흑학 - 신동준 지름
- 현재 북한은 중국에 기대어 잔명을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이 인공호흡기를 떼는 순간, 북한은 자멸할 수밖에 없다.
한.중 간 교역 규모도 날로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교역액의 4분의 1에 육박하는데, 이는 미국과 일본과의교역액을 합친 것보다 많다.
조만간 닥칠 북한의 급변 사태는 한민족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될 수밖에 없다. -7-
- 청조 말 '이종오' 가 [후흑학]을 저술했다.
'후흑'은 두꺼운 얼굴을 뜻하는 '面厚' 와 시커먼 속마음을 뜻하는
'心黑' 을 줄인 말이다. -10-
- 조선은 구한 말 薄白으로 패망한 적이 있다. ( 厚黑에 반대되는 薄白박백의 모습을 보였다. 귀가 얇고 경박했다는 뜻. 월왕 구천의 厚黑과 이에 넘어간 오왕 부차의 薄白이 선명히 대비되는 대목이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패도로 무장한 사무라이들을 접하면서 조선이 왕도를 견지하면 島夷들도 언젠가는 감복할 날이 올 것이라고 떠벌였다. 난세의 시기에 붓을 들어 칼에 맞서고자 한 꼴이다. 미국통과 일본통만이 잇는 현재의 상황도 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전 국민이 후흑으로 무장해 있는 중국을 상대하면서 계속 이런 한심한 박백으로 대처한다면 통일시대고 뭐고 다 날아갈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날로 확대되고 있는 이때,
중국의 후흑학을 읽는 것은 필수 과제에 속한다.
2011년 벽두에 '중국부' 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중국청'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고 역설한 어느 CEO의 얘기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잇다. -13-
- 이종오의 부친은 말했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어서 무엇하겠는가? 한 권의 책이라도 읽다가 좋은 구절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잇으면 반드시 죽을 때까지 기억해 두고 그것대로 실행에 옮겨라. 그 이외에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책들은 볼 필요가 없다. "
그가 가장 아끼는 책은 청나라 건륭제가 시행한 것을 모아놓은 것인 [성유광훈]으로 다음 구절을 큰 소리로 읽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 부모에게 효도할 줄 모르는 자는 왜 홀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인가?" -31-
- 제1의 난세= 춘추전국시대
제2의난세=삼국시대
제3의 난세= 근현대의 난세(1840~1949) 라고 할 수 있다.
후한 제국 말기에 등장한 삼국시대 는 그 시기도 100년에 달하는데 전투도 치열해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이것이 삼국시대를 춘추전국시대에 이어 제2의 난세로 간주 하는 이유다.
삼국시대도 천명이 다한 후한 제국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가리기 위한 각축전이었다는 점에서 '초한지제' 와 다를게 없다.
1840년 아편전쟁 발발을 시작으로 1911년 신해혁명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때까지 약 100여 년의 기간 역시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 못지않은 난세의 시기로 볼 수 잇다. 약 100여 년에 걸친 근현대의 난세의 시기를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에 뒤이은 제3의 난세로 간주할 수 있다.
난세의 시기는 '군벌 각축' 이다. 사서는 이를 '군웅축록' 으로 표현한다.
군웅들이 가시권에 들어온 사슴을 잡기 위해 서로 각축을 벌인다 는 뜻이다. 여기의 사슴은 곧 대권을 상징한다. 천하를 거머쥐는 것을 득록, 천하를 잃는 것을 실록으로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34~35-
- 중국의 역사를 개관하면,
진시황 사후 진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유방이 귀족 출신인 항우를 제압함으로써 최초으 농민 출신 황제가되고,
조조와 유비, 손권이 천하를 3분하는 삼국시대 를 이끌어내고,
300년에 걸친 남북조시대 를 종식시킨 수나라 가 무리한 고구려 정벌로 내분이 일어난 것을 이용해 이연과 이세민이 당 제국 을 건립하고,
조광윤이 5대10국 의 혼란기를 수습해 북송 을 세우고,
주원장이 비밀결사인 백련교도에서 몸을 일으켜 농민반란군의 수장이된 후 북경으로 진격해 명 제국 을 일으키고,
만주족이 명나라 장수 오삼계의 투항을 계기로 북경에 입성해 청조 를 세우는 과정 등이 '중장통' 과 '라이샤워' 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원세개의 북경 정부가 발족한 1912년부터 모택동이 천안문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으 성립을 선포한 1949년까지으 과정도 예외가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도 청조의 뒤를 이은 새로운 중화 제국이다. ' 해리슨 솔즈베리' 가 쓴 [새로운 황제들] 에서 모택동과 등소평을 역대 황제에 비유했다.
장개석이든, 모택동이든 더 철저하게 후흑을 연마한 인물이 중국을 통일해 전 세계를 향해 힘찬 포효를 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21세기에 들어와 중국이 G2로 우뚝 선 게 그 증거다. -38~39-
-[논어]<위정> 편에서 공자는 안회를 다음과 같이 칭송하였다.
"내가 안회와 더불어 온종일 얘기했다. 그가 내 말을 어기지 않아 일견 어리석은 듯했다. 그러나 그가 물러간 뒤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니 그 내막이 충분히 드러났다.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다."
공자가 안회를 칭송한 것이 소위 '대지약우大智若愚' 이다.
크게 깨달은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는 이종오가 말하는 후흑의 최고 단계인 '불후불흑' 에 해당한다. -49-
- 중국 전래의 처세술인 '대지약우' 및 '난득호도難得糊塗' 이다.
21세기 현재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최상의 후흑은 소위 '난득호도' 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총명해지는 것도 어렵지만 어리석은 체하는 건 더 어렵다 는 뜻이다. -55-
- 월왕 구천은 범리에게 분부하였다. 범리가 오왕 부차에게 말했다.
"월나라가 두 여인을 바치니 이는 구천이 오나라에 충성스런 증거이다."
그러자 곁에 있던 오자서가 간했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두 여인에게 빠져 정사를 소흘히 하여 결국 오나라는 패망하였다. 그는 후흑에 반대되는 박백의 모습을 보였다. 귀가 얇고 경박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미인계를 구사한 월왕 구천의 후흑과 이에 넘어간 오왕 부차의 박백이 선명히 대비되는 대목이다. -69-
- 무경칠서中 가장 간결한 [삼략] 은 장량이 '황석공黃石公' 에게서 전수받은 비전이다. 저자와 관련해서는 태공망 여상의 저서라는 설도 있다. -90-
- 한신의 책사 '괴철' 은 말했다.
"功業은 이룰기는 어려우나 실패하기는 쉽고, 時機는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쉬운 법입니다. 시기 선택은 반드시 해당 시기에 맞춰야 하니 이는 시기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신은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했다. -94-
- 토사구팽은 원래 병서 [삼략] 에 나오는ㄴ 말이다.
기원전 201년 10월,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지 3년째 되던해, 한신이 모반을 꾀한다고 하여 유방은 한신을 체포했다. 한신이 탄식했다.
"범리가 구천 곁을 떠나면서 '교활한 토끼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고, 높이 나는 새의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을 창고에 집어넣으며, 적국을 격파하면 謨臣을 죽인다' 고 말한 게 사실이구나. 천하가 평정되자 나 또한 팽을 당하는구나"
토사구팽은 원래 병서 [삼략] 에 나오는 말이다 -96-
- 조조는 인재를 알아보는 지감이 탁월하여 순욱,곽가 등의 책사와 , 화 흠,왕랑,서황 등의 용장들이 조조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전국책] 의 <조책> 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내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이들 모두 자신을 알아주는 은혜를 베푸는 소위 '지우지은知遇之恩' 을 찾아 조조 밑으로 모인 것이다.-106-
- 조조가 유재시거 원칙에 입각해 맹상군의 '계명구도' (비굴하게 남을 속이는 하찮은 재주나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 를 흉내 낸 것처럼 유비 역시 능력만 잇으면 누구든 자신의 곁에 두고 활용코자 했다.
조조와 유비의 인재경영은 '동공이곡'(同工異曲 ; 재주나 솜씨는 같지만 표현된 내용이나 맛이 다름) 에 해당한다. -114-
- 사마의는 제갈량으로부터 건괵을 선물 받는 모욕을 당하고도 이를 능히 참아냈으니 뻔뻔한 것이 유비보다 더했다. ( '건괵'은 고대 중국의 부녀자들이 의관용으로 머리에 쓴 일종의 두건을 말한다. )
여기서 소위 '巾괵之辱' 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큰일을 이룰기 위해 반드시 참아야만 하는 작은 모욕을 말한다. 사마의는 '건괵지욕' 을 참아냄으로써 천하를 거머쥐는 결정적인 전기를 맞게 됐다. -138-
- 장개석과 모택동 모두 독서광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대조를 이루는 것 중 하나가 독서 성향의 차이였다.
장개석은 [주역]을 즐겨 읽었고, 모택동은 대장정의 기간은 물론, 연안 시절을 포함해 죽는 순간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유일한 책은 사마광의 [자치통감] 이었다.
일각에서는 경서를 탐독한 장개석은 패했고, 사서를 열독한 모택동은 승리했다는 식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시경] 의 <대아 .탕> 편에 '은감불원' 이라는 말이 나온다.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이 달기에게 빠져 정사를 소흘히 하자
'서백'( 주나라 문왕 ) 이 다음과 같이 간했을 때 나온 고사성어 이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을 만한 것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이전의 왕조인 하나라 걸왕 때 있습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갇혀다가 푸려나온 뒤 자신의 아들인 주 무왕이 역성혁명에 성공해 주 왕조를 세우는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은감불원' 은 "다른사람의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으라 " 는 뜻이다.
동양의 역대 제왕이 수천 년 전부터 역사를 '치국평천하' 의 거울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치통감] 의 '통감' 이라는 말 자체가
역대 왕조사를 두루 꿰는 역사의 거울이라는 뜻이다.
모택동은 [자치통감] 을 죽는 순간까지 옆에 끼고 살면서 치국평천하의 기본서로 활용했다. 이게 장개석과 모택동,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서는 스스로를 수양하고 심지를 굳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나 천하의 흥망과 왕조 교체의 원인을 아는 데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는 반드시 사서를 통독해야만 가능하다. 사서에 후흑의 비경이 있기 때문이다. 모책동은 역사에 관심 커서 그는 학교 수업 후 도서실로 달려가 사서를 탐독했다. 이때 그에게 평생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서가 눈에 띄었다, 바로 사마광의 [자치통감] 이었다. 그는 이 방대한 사서를 죽기 직전까지 모두 17번이나 읽었다. 이는 사마광이 불우한 처지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자치통감] 을 저술한 것을 높이 평가한 것과 무관치 않다.
그는 이책을 읽을 때마다 새삼스런 수확을 얻는다. 정말 보기 드물게 훌륭한 책이다 라고 칭찬했다.-162~164-
- 首鼠兩端 ; 수서양단
"의심이 많은 쥐가 구멍에서 목을 내밀고 사방을 엿보듯이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 " 을 말한다.
군주는 자신이 믿는 바를 굳건히 밀고나가는 '견인불발' 을 견지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하는 군주와 처지가 다르다. 그러므로 견인불발과 동시에 환면술을 함께 사용해야 한다. 환면술을 쓰다보면 상황에 따라 수서양단의 비판을 받는 게 당연하나 , 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181-
- 수 양제는 대운하를 개설하고 그 시발점인 '양주'를 수도인 '장안'이나 부도인 '낙양'보다 더 사랑했다. 이는 그의 치세 때 완성된
'경항대운하' 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의 북경 부근 탁군에서 남쪽으로 멀리 양자강을 지나 지금의 항주에 이르는 '경항대운하' 는 그의 치세 때 완성되었다. 이 대운하의 출발 기점이 양주 다.
소주 및 항주와 더불어 3대 藝鄕 으로 불리는 양주 에는 지금도 수 양제와 관련한 일화가 많다. 양주의 대표적인 음식 양주초반( 양주볶음밥 ) 을 수양제가 즐겨 먹었다 고 한다. -185-
- 수양제의 최후는 비참했다.
수양제가 강도(江都;양주) 로 도읍을 옮길 무렵 권신인 '우문술'은 큰아들 '우문화급'이 뇌물을 받고 관직이 박탈된뒤 칩거하고 있는 아들을 부탁하여 '우둔위장군' 에 임명되었다. 그후 '우문화급'은 병변을 일으켜 수양제를 죽이고 수양제의 조카인 진왕 '양호' 를 옹립했다. 얼마후 양호마저 죽이고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며 국호를 허, 연호를 천수라했다.
그후 왕세충과 이밀의 군사에게 대패하여 패잔병을 이끌고 위현'으로 도주하다가 그는 부하에게 살해됐다.
그후 우문화급 토벌군의 우두머리격인 당 고조 이연이 당 제국을 창건
하엿다. -187-
- 전국시대 당시 '전국4공자' 가 있었다.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 이다.
[사기]< 맹상군열전 > 에 '교토삼굴狡兎三窟' 이 나온다.
제나라 재상인 맹상군 전문田文 의 식객 中에 '풍환' 이라는 인물에 관한 일화에서 비롯 되었다.
'교토삼굴 狡兎三窟' 은 "교활한 토끼는 구멍을 3개나 뚫습니다" 라고 했다. 역사상 퇴로에 관한 일화 中에 가장 유명한 것으로 이 '狡兎三窟' 을 들 수 있다. -192-
-맹상군은 '풍환' 덕분에 죽을 때까지 화를 입지 않았다. 풍환이 마련해 준 교토삼굴 '狡兎三窟' 덕분이다. 이 일화는 한 치 앞도 제대로 헤아리기 어려운 난세의 시기에는 미리 여러 상황에 대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사실 '교토삼굴' '狡兎三窟' 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매사에 완벽한 준비르 해둬야 뜻하지 않은 불행을 미연에 막거나 최소화할 수 있다. '有備無患' 이라는 성어가 바로 이를 의미한다.-195-
- 관직을 구하려면 권세에 빌붙어야 한다 는 것쯤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구멍이 있으면 반드시 비집고 들어가고, 구멍이 없으면 뚫어서라도 들어가야 한다. 구멍이 있는 자는 그것을 확대하고 구멍이 없느 자는 송곳을 꺼내 새로 구멍을 뚫어야 하는 법이다". 라고 했다.
이는 중국 전래의 '반룡부봉' 을 말한다. 이는 "용의 비늘을 휘어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었다 " 는 뜻으로, 훌륭한 사람에 붙어 출세하는 것을
의미한다.이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196-
- 용봉으로 상징되는 군도 는 만인 위에서 치국평천하의 논리를 펼치는 까닭에 역린의 위험이 없다
반룡부봉의 신도 는 스스로읜 힘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게 아닌 까닭에 일종의 무임승차 이다.
한비자는 무임승차에 따른 위험을 역린으로 표현했다.
반룡부봉은 이처럼 용봉에 올라타 조종하는 2인자 리더십의 정수를 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역린 등으로 인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한 제국 말기에 新나라를 세운 '왕망' 이다.
'왕망' 은 부정적인 의미의 '반룡부봉' 을 행한 대표적 인물이다
사가들은 기만적인 수법으로 반룡부봉하여 군권을 장악한 뒤 전한 제국을 무너뜨리고 참람하게 새 왕조를 세운 점을 논거로 그를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하고 잇다.
한무제 - 유거 - 한선제 - 한원제 (유석) ,황후는 '왕정군'이다. - 한성제 - 한애제 - 한평제 - 유영(2세) - 왕망(왕정군의 조카)(유씨 왕조를 뒤엎고 왕씨 왕조인 新나라를 세움.)
(*왕망이 관직에 들어선 후 신나라 황제가 되기까지 31년의 긴 세월 동안 왕망을 반대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음에 주목할 필요가 잇다. )
당시 상황을 보면 설령 왕망이 아닐지라도 민란이 일어나, 왕조가 뒤집힐 상황이었다. 탈법과 부정 비리가 판을 치던 상황에서 그는 뇌물을 탐하지 않았고, 개인 생활 또한 청렴결백했다. 당시 그의 행보는 확실히 칭송을 받을 만했다. -201~205-
- 왕망 즉위 전후로 그가 실시한 여러 정책 모두 백성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그가 지식인과 서민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성인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신나라가 불과 15년 만에 무너지자 사가들은 왕망을 신랄히 비판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2천 년 넘게 신나라 건국이 부정적인 의미의 '반룡부봉' 의 결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6-
-다음은 당현종 때 '이림보李林甫' 이다
그도 역시 부정적인 의미의 '반룡부봉' 을 행한 대표적 인물이다.
당 제국의 300년 역사는 '안사의난' 을 계기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는 번성기, 후기는 패망기다.
당 고조 이연과, 아들 당 태종 이세민은 뛰어난 신하들을 곁에 두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치세 중 하나로 꼽히는 '정관지치' 를 구가 했다.
측천무후의 집권기를 거쳐 당현종 때에 '개원지치' 의 성세가 나타났다.
당 현종 때 대지주의 토지 겸병이 극심했고 이 와중에 황제의 사치가 심해지고 이를 지탱하기 위한 새금과 요역이 늘어나자 땅을 잃고 유랑하는 농민이급증하여 '안사의 난' 이 폭발하였다. '안사지란'은 9년만에 진정됐으나, 이민족의 침입,환관의 횡포 등 그 후유증은 컸다. 그 결과가
'황소의난' (875)으로 나타나, 이 난 역시 9년 만에 평정됐으나 당 제국은 껍데기만 남게 됐고, 왕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功을 세운 절도사
'주전충' 에 의해 907년에 당 제국은 멸망했다. -206~207-
- 당현종은 즉위 초 검박한 생활을 했으나 말년에는 안일과 쾌락에 빠지게 되었다.
당현종으 아들인 수왕 '이모' 의 부인인 '양귀비' 를 후궁으로 삼고 아들에게는 다른 여자를 주었다. 양귀비는 6년 뒤 귀비로 책봉됐다.
당시 명문 귀족 출신인 '이림보' 는 權貴들 뿐만 아니라 권귀의 부인들과도 매우 가까웠다.
고금 동서를 막론하고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하는 데 권귀의 부인들만큼 확실한 통로는 없다. '이림보' 는 태자 자리를 둘러싼 궐내의 암투 상황을 파악해 출세의 사다리를 만들고자 했다. 이에 '이림보'와 손을 잡은
'무혜비'는 틈만 나면 당현종 앞에서 '이림보'를 칭송했다.
당현종의 총애를 입고 있던 환관 '고력사' 가 있었다. 고력사는 매우 총명한 인물로 당현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정도로 충성스러웠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이림보를 당해내지 못했다.
당시 당 현종은 모든 정무를 '이림보'에게 맡기고 후궁에 파묻혔다.
'이림보' 는 당 현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당대 최고의 권신으로 군림하면서 끝없이 욕심을 치워나갔다.
이림보는 국내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민족이나 서민 출신을 절도사로 임명했는데 이때 '안녹산' 이 발탁되었다. 당시 절도사느 중앙 조정의 통제가 약화되자 정치와 행정에 까지 영향혁을 미치는 지방 군벌이었다.
이림보 사후, 양귀비의 6촌 오빠 '양국충' 이 재상이 되자 '안녹산' 의 출세 가도에 제동이 걸렸다.
안녹산이 "간신 '양국충' 을 토벌한다" 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사람들이 '이림보' 를 두고 "입가에는 꿀을 바른 듯 언행이 부드러우나 뱃속에는 칼을 감춘 듯 음흉하기 짝이 없다" 는 의미로 '口蜜腹劍' 이라 칭했다.
이는 후흑과 사뭇 닮았으나 후흑은 구국을 전제로 한 것인 데 반해 이림보의 '구밀복검' 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란 점에서 천양지차가 잇다.
아직도 사람들이 왕망의 '반룡부봉'과 이림보의 '반룡부봉' 을 똑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잇으나, 왕망의 경우는 다른다 고 생각한다.따로 떼어서 생각할 필요가 잇다. (맞다.동감이다.) -208~210-
- 한국 전쟁중, 유엔군의 북진이 계속될 경우 만주가 전쟁터로 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은래가 중국의 외교부장 자격으로 포문을 열었다.
"중국은 절대로 외세의 침략을 용납할 수 없고, 이웃 나라가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중 인도 대사를 시켜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해올 경우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는 경고를 미국 정부에 전하게 했다.
(* 이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이 개입할 당시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이때도 일본이 조선국을 점령하면 중국 국경이 위협을 받게되니 요동지방에 있는 군사를 파병 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은 자국영토내에서 전쟁하기를 거부하였다. 전쟁을 해도 조선영토에서 하는서 것이 더 낫다( 형용사; 보다더 좋거나 앞서 있다 ) 고 판단한 것이다. )
그러나 미국은 중국이 허장성세의 엄포를 놓은 것으로 간주한 것은 트루먼의 실수였다.
허장성세는 군사와 외교 방면에서 자주 구사되는 술책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막강한 무력이 뒷받침될 때 효과를 발휘할 수 잇다.
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게 바로 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실력을 기르는 '도광양회' 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중국이 개혁개방 30년 만에 G2로 우뚝 선 비결이기도 하다.
이것이 중국인의 '허풍' 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이다.
중국 속담에 "군자는 10년 뒤에 복수해도 결코 늦지 않다" 는 말이 있다. 오바마 정부의 빈 라덴 살해를 두고 '군자' 운운한 논평이 그 증거다. 월왕 구천이 그랬듯이 자부심이 강한 그들은 훼손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10년 동안 칼을 가는 것을 당연시 한다. -219~220-
중국인들이 처세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 중 하나가 이 '도회' 韜晦다. 자신의 생각과 목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추었다가, 목표를 이루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비결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도광양회' 와 유사하다. ) [후흑- 판후이성 지음,허유엉 옮김] - 196-
-----------------------------------------------------------
- 이 세상에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식물도 칭찬에 만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경우야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작가' 켄 블랜차드'는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 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칭찬을 적극 사용하라고 주장한다. 이는 범고래의 조련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매우 설득력이 있다.
고래 반응의 실천법 ;
첫째 신뢰를 쌓는다.
둘째 칭찬을 아낌없이 한다.
셋째 상대방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모른 척하며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린다.
칭송이 먹히기 위해서는 먼저 신뢰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잇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이 신뢰가 형성된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기 때문ㅇ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으 역대 왕조에서 소위 '엄당( 환관의 당 )' 이 황제와 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이유가 여기에 잇다. [삼국지] 에 나오는 후한 제국 때의 '삽상시의 난' 은 환관들이 주축이 되었으나, 명 제국 때의 경우는 환관 이외에도 내노라하는 사대부들이 엄당에 몸을 담았다. 중국처럼 황제의 권한이 막강한 까닭에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시봉하는 환관의 위세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환관이 황제와 태후의 신임을 얻을 수 잇는
결정적인 수단은 바로 칭송이엇다. 그 어떤 황제와 태후일지라도
자신들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으면서 극찬을 쏟아내는 그들을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십상시 ; 중국 후한 말
'영제' 때 권력을 잡은 환관 을 말한다.)-222~225-
- 후흑을 배우는 자는 반드시 협박과 아첨을 함께 병행할 줄 알아야 한다. 협박을 잘하는 자는 상대방을 치켜세우면서 은근히 위협을 가한다,[삼국지연의] 에 따르면 적벽대전 당시 제갈량은 손권을 배견하면서 일종의 협박을 했다. 그 수법이 교묘했다.
제갈량이 손권에게 느긋하게 대답했다.
"지금 조조의 군사는 먼 길을 달려와 피곤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듣건대 유예주를 추격할 때 輕騎로 하루 밤낮에 300여 리를 달려왔다고 하니 이는 소위 '강노의 화살도 마지막에는 노나라의 얇은 천
조각을 뚫지 못한다' 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손자병법] 도 이를 꺼려 '장군이 경솔하게 행군하여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면 상장군이 포로가 되거나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고 경고한 것입니다. 이처럼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해 조조와 싸움에 나서도록 부추겼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갈량이 시종 손권에게 겁을 집어먹도록 조조군의 군사력을 과장되게 언급한 뒤 손권의 자존심을 자극해 발끈하도록 만든 점이다. 이것이 "솜에 바늘을 숨기고 때를 노려라" 라고 하는 '면리장침綿裏藏針' 이다. -233~238-
-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이 G2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2011년 벽두에 미중정상회담 이후에 중국이 조만간 미국을 누르고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 내다보느 견해가 훨씬 많아졌다.
지난 2010년 말 미국으 역사학자 '알프레즈 맥코이 는 미국이 2025년쯤 급격히 몰락할 것이라 진단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제국의 몰락에는 오직 경착륙만 있고, 연착륙은 없다.포르투갈은 1년, 소련은 2년, 프랑스는 8년, 대영 제국은 17년 만에 몰락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2003년을 기준으로 22년째가 되는 2025년에 대영제국과 유사한 몰락의 과정을 맞으리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맥코이의 분석이 타당한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잇겠지만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영원한 1등 제국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현실에 만족하며 안주하는 자는 칼을 갈며 분발하는 자에게 정상으 자리를 내주고 마는 것이 만고의 이치 이다. 이와관련한 일화로서,
삼국시대 오왕 손권이 무예에는 능하나 학문이 약하다고 장수 '여몽'을 나무라자, 여몽은 느끼는 바가 있어 학문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이후 '노숙' 이 찾아와 전과 달라진 '여몽' 의 눞은 식견에 놀라워하자 그가 이같이 말했다.
"사흘을 떨어져 잇던 선비를 다시 대할 때는 눈을 비비고 대해야 합니다." 여기서 '괄목상대 刮目相對' 라는 성어가 나왔다. 영원한 1등이 없는 논리와 같다. 소니의 하청 업체에서 출발한 삼성전자가 전 세계 전자업계를 석권한 게 그 증거다. 삼성도 기왕의 성과에 안주하면 소니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고식적인 방법과 관행을 거부하는 데서 이런 임기응변이 가능하다. 아무리 병서를 꿰고 잇을지라도 반드시 승리를 거둘 수 잇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말기 명장 '조사' 는 그의 아들 '조괄'에게 '지상담병' 의 누를 범하지 마라 고 하였다. 이는 종이 위에서 병법을 말한다 는 뜻이다.
명장 조사는 병법 이론에 능통한 아들 조괄에게 군사 지휘를 한 번도 맡기지 않았다.
조나라 혜문왕은 조괄을 대장으로 삼았으나 진나라와 싸움에서 춘추선국시대 시대의 격전인 '장평대전' 에서 조나라 군사는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는 임기응변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21세기 경영 환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가는
경쟁 업체에게 뒤집기를 당하기 십상이다. -289~292-
- 서양인 중에 후흑을 터득한 사람이 미국 최고 통치권자인 오바마다. 지난 2009년 11울 중순에 이뤄진 동아시아 순방에서 그의 취임 후 첫 아시아 순방이었다. 당시 오바마의 중국 체류 기간은 3박 4일이었는 데 반해 일본 체류는 1박 2일로 잡혀 있었다. 그는 일본 측이 불쾌하게 샹각할까 봐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을 먼저 방문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 천황을 예방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 언론들로부터 그는 '비굴' 내지 '굴욕 외교' 등의 표현까지 써가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오바마의 '난득혹도' 행보를 제대로 읽지 못한 소치다.
그는 미국 언론의 비난이 거세어질수록 향후 대일 외교에서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리라는 계산을 했다.
오바마는 미국을 낮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일본이 스스로 하도록 만든 것이다. '난득호도' 의 경지에 달한 후흑의 달인이나 구사할 법한 수법을 써먹은 셈이다.
오바마가 중국 방문에서 보여준 행보는 일본에서 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난득호도' 였다. 즉, '미국의 첫 아시아 태평양대통령' 이라고 표현한 것과, 또 " 강력하고 번영하는 중국은 국제사회의 힘의 원천이고, 미국은 중국을 제어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미국과 함께 천하를 양분해 제후국들을 호령하자는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것은 후흑의 깊고 심후한 뜻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298~299-
- 현재중국 수뇌부는 후흑으로 안전무장해 잇고, 일본 역시 '일본 제왕학의 태두' 로 칭송받고 있는 '야스오카 마사히로' 의 방대한 동양학 저서를 치열하게 연구하고 잇다. '야스오카學' 은 일본판 후흑학에 해당한다. 유독 우리나라만 이런 논의가 미미한 실정이다.
우리도 우리의 역사문화에 기초한 리더십 이론을 만들 필요가 잇다.
조선조의 군신들이 '왕도' 를 맹종하다가 '패도' 로 무장한 일제에게 총 한 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한 채 나라를 통째로 넘기고 백성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든 게 불과 100년 전으 일이다. 역사문화 배경이 전혀 다른 나라의 리더십 이론을 무차별적으로 수입해 쓰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 점에서 난세의 리더십 이론으로 등장한 [후훅학] 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307-
- 위나라의 명장 '장합' 은 제갈량의 총 4차례에 걸친 북벌때까지 촉한의 주력군을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
제갈량의 북벌이 실패로 끝난 것은 위나라의 용장 '장합'때문이다.
전장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조조는 장합의 이런 측면을 높이 평가했을 듯싶다.-323-
- 인조 14년(1636) 겨울 청 태종은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다. 조선의 군신은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독 안에 든 뒤' 신세를 자차한 셈이다. -325-
- "부하의 처세술" 에 대해 [한비자]<세난> 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군주에게 간언을 하거나 논의를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과연 군주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지 아니면 미움을 받고 있는지부터 잘 살핀 연후에 유세해야 한다. 무릇 용이란 짐승는 본래 유순해 사람이 잘 길들이며 능히 타고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용에게는 턱 밑에 한자나 되는 역린이 달려 잇다. 만일 이를 잘못 건드리면 용을 길들인 자라도 반드시 죽임을 당하게 된다. 군주 역시 용과 마찬가지로 역린이 있다. 유세하는 자가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설득할 수만 잇다면 거의 성공을 기할 수 잇다. "
이는 [한비자]<주도> 편에서 역설한 '난세의 군주 리더십' 의 덕목과 대비되는 '난세의 신하 리더십' 에 해당한다.
난세를 방불케 하는 21세기 글로벌 경제 전쟁상황에서는 기업의 총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사와 하사의 리더십을 공히 발휘해야 한다 는 점이다. 문제는 상사와 하사의 리더십이 충돌하는 데 있다.
난세의 군주는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여서는 안되고, 반대로 난세의 신하는 군주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군주의 속마음을 정확히 헤아려야 한다. 또한 난세의 군주는 자신의 지혜와 힘을 써서는 안 되고, 반대로 난세의 신하는 자신의 지혜와 힘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된다.
[후흑학]이 거듭 상사의 의중부터 정확히 헤아려라 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331~332-
-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자신이 세운 공을 자신의 입으로 공치사하고도 잘된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술에 취해 함부로 떠벌이다가 비명 횡사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아무리 자신으 갖은 노력으로 큰 공을 세웠을 지라도 절대 자신으 입으로 이를 떠벌여서는 안 된다. 시기하는 자들이 곳곳에서 털을 불어가며 허물을 찾아내고, 사안을 침소붕대해 무함에 나서기 때문이다. 상사를 모시는 하사는 큰 공을 세웠을 경우 반드시 그 공을 상사에게 돌릴 줄 아는 처세술을 터득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게 고속 출세의 비결 이기도 하다. -342-
-.....-349-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