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62 / 징비록 -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최해식 2015. 1. 3. 20:23

-150507에  읽은책이다.

 

-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에  환란이 없도록 조심한다' 라는 말이 있으니, 이야말로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16-

 

-前 전적(조선 시대 관직, 정6품이다) '이로' 가 내게 글을 보내왔다.

"삼가 지방만 보더라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막고  있소.

어떻게 왜적이 그곳을 뛰어넘는단 말이오.  그런데도 무조건 성을 쌓는다고  백성을 괴롭히니 참으로 답답하오"

넓디넓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막지 못한 왜적을 이까짓 한 줄기 냇물로 막을 수 있다니 내가 더 답답했다. -37-

 

- 임진강 전투에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온 도원수 '김명원' 과 지사 '한응인'은 임금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들을 문책하지도 않았다. 경기 감사 '권징' 또한 싸우지 않고 가평으로 피해 들어가자 적들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서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참으로 한심하다. 도원수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그 죄를 묻지도 않으니, 국정운영이 개판이다.)-89-

 

- 군량이 바닥이나자 제독(이여송)이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경기 좌감사 이정형을 불러들였다. 뜰 아래 우리를 끓어앉히고는ㄴ 큰소리로 문책했다.  나는 우선 사죄하면서 제독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나라의 모습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164-

 

- 진린의 군사가 고을 수령을 함부로 때리고 욕하며,찰방 '이상규' 의 목을 새끼줄로 매어 끌고 다니며 피투성이를 만드는 모습을 본 나는 통역관에게 그를 풀어 주독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211-

 

 

-  이순신의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다 . 그의 조상 가운데 '이변' 은 벼슬이 판부사에 이르렀는데 강직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증조부인 '이거' 는 성종 임금을 모셨는데,  세자 연산을 가르쳤으나 엄하다하여 꺼려했다. 그가 장령으로 일할 때에는 모든 관료가 호랑이 장령이라 불렀다. 

할아버지 '이백록' 은 가문의 덕을 입어 벼슬을 했으며, 

아버지 '이정' 은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219-

 

 

- 적은 파죽지세로 몰아닥쳐 불과 10일 만에 한양까지 들이 닥였다. 이때부터 적은 항상 이긴다고 만 생각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여러 갈래로 흩어져 마음대로 날뛰었다. 그러나 군사는 나누면 약새지기 마련이다. 1000리에 걸쳐 전선을 형성하고 시간이 니나니, 아무리 강한 화살이라 해도 멀리 갇다 보면 낡은 헝겊 한 장 뚫지 못하는 이치와 같았다. -229-

 

 

- 임진년,당시 고양 출신 진사 '이로' 가 두 친구와 함께 활을 가지고 창릉과 경릉에 갔는데,그곳에서 적의 무리를 만나 우거진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숲에 숨어 활을 당겼다. 왜적은 순식간에 활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부터 일행이  숲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화살을 쏴 대자 적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후로 적은 숲만 보면 도망쳤기 때문에 두 능을 지킬 수 있었다. 이로부터 지형을 선점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정해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신립과 이일 등이 이러한 계책을 쓸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즉 토천과 조령 사이에 궁수 수천 명을  매복시켜놓고 숲을 활용했다면 적은 우리 병사의 숫자도 파악하지 못한 채 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합지졸을 데리고 평탄한 들판에서 대적했으니 질 수밖에 없었다.  앞서 이 내용을 기록했지만 다시 한 번 특별히 기록하는 까닭은 후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다. 231-

 

 

- 1593년 계사년 4월,왜적이 한양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갓다. 

그해 10월 어가가 해주에서 한양으로 돌아왔다.

11월경, 명나라 조정에서 天使(천자의 사자를 이르던 말) '사헌' 을 파견했다. 사헌은 선조에게 양위를 빨리 하라는 언질을 주었고,명나라 군사들이 조선에 끼친 피해를 물어보면서 한말이다. "내가 들으니 조선 사람들이 말하기를 , 왜적은 얼레빗 같고, 명나라 군사는 참빗 같다고 말한다는 데 사실입니까?"   내(유성룡) 가 대답했다.

"옛 사람이 말하길, 군사가 주둔하는 곳에는 가시덤불이 난다고 했으니 작은 피해야 어찌 없을 수 잇겠습니까. 그러나 참빗이라는 말은 천만부당한 일이니,바라건대 이런 헛된 말을 결코 믿지 마십시오" -298-

 

-임진왜란은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에도 커다란 부담이었다.그런까닭에 명나라 관리들 가운데 조선 문제로  골머리를 썩은 이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선조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자는 의견도 분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식이 선조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니 이 무렵부터 선조는 끊임없이 퇴위하겠다는 뜻을 표한다. 그러니 선조 또한 참으로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르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왕을  곁에서 보필해야 했던 유성룡을 포함한 고위 관리 또한 괴로웠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99-

 

- 이순신이 전사한 것은 노량해전도 막바지에 접어들던 1598년 11월19일 새벽 의 일이다. 후퇴하는 적선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의 죽음을 두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다.

이와함께 임진왜란도 끝이 나고 이순신으 파란만장한 삶도 끝이 났으며, 유성룡의 임진왜란 종군기도 끝을 맺는다. -313-끝.잘 봤습니다.

 

 

-[퍼온글]  http://blog.naver.com/kimseye3/220283791675

......선조는 아군 장수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김덕령을 죽였고,유성룡과 이순신과 곽재우를 죽이려고 했다.....

유성룡은 악폐를 해소하기 위해 면천법과 호포법을 실시하고 속오군을 설치했다.

면천법은 노비들이  군공을 세우면 노비에서 해방시켜 벼슬을 주는 法이고, 호포법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걷는 法이다. 속오군은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지게 하는 法이다. 또한 작미법도 추진했다.

이는 뒷날 대동법이라고 불린 혁신적인 세제였다. 쉽게 말해서 농토가 많은 양반들은 그만큼 세금을 더 내는 法이다.

왜군들이 물러가지 시작하자 선조는 유성룡을  내쳤다. 유성룡의 탄핵 사유는 '종계변무' 를  위한 명나라 사신행을 자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계변무' 란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고려말기 네 왕을 시해했다'  는 잘못 기록된 명나라 법전.역사서인  '대명회전'  의 내용을 고쳐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는 태조 3년 (1394)부터 시작돼 200년을 끌어온 사안으로 유성룡의 탄핵 사유가 아니었다. 설득력이 약하자 서인과 북인들 반대파에서는 유성룡이 왜와 강화를 주장했다는 협의을 뒤집어씌웠다. 그러나 유성룡은 7년간의 전쟁 내내 강화를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선조31년(1598) 11월19일 파직당한 유성룡은 고향 하회마을로 향했다.

선조37년(1604) 63세가 되어  '징비록'  을 완성했다.

선조40년(1607)5월6일 세상을 뜨니 향년 66세였다. 이듬해 2월 선조도 죽었다.

유설룡의 사후 개혁입법은 모두 폐기되고 나라가 다시 양반의 세상이 되자  백성들은 낙담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30년 후에 일어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백성들이 아무도 나라를 위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모두 그런 까닭이었다.  그래서 민심이 천심이라는 것이다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거나 망각해서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서울경제,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