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무경십서3 -신동준 역주
-세계 유수 대학의 경영대학원이 [손자병법] 을 택스트로 삼고 있다.
리더십,조직관리,경영마인드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ㅇ원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ㅇ다. 빌 게이츠, 손정의 등은 [손자병법] 의 전략을 구사해 초일류 글로벌 기업을 일구는데 성공했다. 조조, 모택동,나폴레옹,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전략가인 '다케다 신겐竹田信玄' 등이 [손자병법] 을 숙독해 천하를 호령 했다.
중국의 '잭 웰치'로 불리는 하이얼그룹의 '張瑞敏(장루이민)' 회장은 [손자병법] <허실> 에 나오는 '水無常形' 을 경영전략으로 하여 세계 제1의 백색 가전 브랜드로 키워냈다.
"물이 일정한 형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병도 고정된 방법이 없다"
[도덕경] 에서 나온 구절로 허허실실의 임기응변과 '勿失好機'의 과감한 결단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부전승이 병가의 치도라면, 임기응변과 과감한 결단은 병가의 치술에 해당한다. 승패를 좌우하는 전장의 전략전술과 기업흥망의 관건인 상략상술은 같은 곡을 달리 연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15-
-IMF는 중국이 2016년이면 GDP면에서 미국을 누르고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있다.
공자와 관중이 문화대국 건설의 대전제로 내세운 부민부국을 착실히 실현해가는 셈이다. 경제대국 다음의 목표는 不問可知다. 이는 경제차원을 넘어 정치와 군사외교는 물론 문화전반에 걸쳐 명실상부한 슈퍼파워가 되는 것을 뜻한다.
관중의 상가 이론 은 동양 전래의 자본주의 이론에 해당한다. 이것은 이념적으로는 유가와 제휴하고, 실천 방안에서는 병가와 손을 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관자] 를 보면 [손자병법] 을 방불케 하는 병가의 전략전술 이론이 많다.
"천지만물의 운행원리인 도를 밝히는 것이 皇道, 도를 살피는 것이 제도, 덕을 통하는 것이 王道, 전략을 세운 뒤 용병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이 覇道다." -23-
- [관자]<승마> 의 한 대목이다.
"천시를 좇아 일을 처리하는 것은 실로 매우 미묘한 일이다. 다른 사안들처럼 뒤로 미루어두거나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룻밤을 넘겨 다음 날이 되면 어제의 보물 같은 시간을 영영 잃고 만다. 지난날은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때를 놓치면 같은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군사작전에서 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국에 '물실호기勿失好機' 로 작용할 수 있다. -27-
- [장원將苑]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장수의 자질과 덕목을 논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는 뜻이다. -47-
-[자치통감]을 저술한 사마광은 재능과 덕을 같은 맥락이라 보았다. 재능이 없으면 덕은 빛을 발할 길이 없고, 덕이 없으면 재능은 오합지졸처럼 잔재주에 그치고 만다. 이를 '재덕상보才德相輔'라고 한다.-49-
- [장원]에서는 용병에 대하여 4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1. '용현축악用賢逐惡' 이다.
뛰어난 자를 불러들여 참모로 삼고, 무능하고 패악한 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2. 신상필벌 이다.
3. 동고동락 이다.
이를 몸소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오자병법] 의 저자 오기다. 제왕으로서 동고동락을 실천한 인물로는 당태종 을 들 수 잇다. 그는 고구려 원정의 와중에 손수 흙을 나르는 등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4. 교련정사敎鍊整師'다.
병사들을 철저히 훈련시켜 정예병을 만들고, 평소 군율을 바르게 세워야 유사시 작전에 효과적으로 투입할 수 잇다는 뜻이다. -51~54-
- 현능한 인재를 발탁하려면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어야 한다. 이를 키우려면 세상을 넓고 깊게 알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하다. 독서는 선현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준다. 평소 역사서를비롯해 제자백가서를 두루 읽어야만 한다. 조조,강희제, 조선조의 세종 등은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수불석권手不釋券' 의 자세를 견지했던 이유다. -51-
-장수가 능히 권모와 지략을 발휘하고 전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잇으면 그의 부대는 맹호가 날개를 단 것처럼 사해를 날아다니며 임기응변으로 천하를 호령 할 수 잇다.
권모와 지략에 밝지 못하면, 마치 어룡이 강호를 떠나 바다의 격랑 위에서 노닐려 하는 것과 같다. -58-
- [장원] 제1장<병권> -권모술수를 써라-
무릇 병권은 전군의 승패와 명운을 가르는 관건이다. 장수의 위세도 이에 직결되어 있다. 장수가 능히 권모와 지략을 발휘하고 전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으면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마치 맹호가 날개를 단 것처럼 사해를 날아다니며 임기응변으로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 정반대로 권모와 지략에 밝지 못하고 전세의 흐름을 통제하지 못하면 마치 어룡이 강호를 떠나 바다의 격랑 위에서 노닐려 하는 것과 같다. 전쟁은 천지를 뒤흔드는 바다의 거센 파도와 같은데 과연 강호에 노닐던 어룡이 바다으 격랑 위에서 노닐고자 할지라도 그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63-
- [장원] 의 특징 ;
장수의 덕과 재능, 용병, 지략 등 4가지 차원에서 병법의 이치를 논論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병서에는 찾아볼 수 없는 면모다.-60-
-제갈량은 태화 원년(227) 3월에 드디어 북벌을 결심하고 출병에 앞서 한주 '유선'에게 표문을 올렸느데 그것이 바로 <전출사표>다 '출사표' 는 출병하는 뜻을 적어 올리는 글을 말한다.
<전출사표> 는 너무 유명해 많은 사람이 즐겨 암송했다. -129-
- 후흑술은 [한비자] 가 역설하는 제왕지술을 다른 각도에서 파헤친 것이다.
병가의 궤사와 종횡가의 음모, 법가의 후흑 모두 같은 곡을 달리 연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종오는 후흑술의 최고 경지인 '불후불흑' 을 이같이 풀이해놓았다.
"후흑의 1단계는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속마음이 숯덩이처럼 시꺼먼 단계다.
제2단계는 낯가죽이 두꺼우면서 딱딱하고, 속마음이 검으면서도 맑은 단계다.
낯가죽이 두꺼운 자는 어떤 모욕을 가할지라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유비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속마음이 시꺼면 자는 마치옻칠한 간판이 그렇듯이 남에게 대접을 받는다.조조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3단계는 낯가죽이 두꺼우면서도 형체가 없고, 속마음이 시꺼먼데도 색채가 없는 단계다. 이 단계에 이르면 하늘은 물론 후대인마저 그 사람을 후흑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불후불흑의 인물로 여기게 된다 "
불후불흑은 음모기책의 정수에 해당한다.
제갈량은 '양모 정책' 을 고집하는 바람에 북벌에 실패했다. 국가안위를 책임진 위정자는 적국을 속이기 위한 양동작전의 계책이 아닌 한 함부로 양모정책을 구사해서는 안된다. 제갈량은 진수가 [삼국연의] 에 묘사된 것처럼 신출귀몰한 軍神이 아니었다. -143-
- [당리문대]
이것의 원래 명칭은 [당태종이이공문대] 이다.
당태종이 묻고 이위공 이정이 대답한 것이라는 뜻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부친은 北周와 수나라에서 대대로 대장군을 지냈고 唐國公으로 봉해진 '이연' 이다. 그래서 '唐' 이라는 국호는 여기서 나왔다.
이세민 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626년부터 23년간 재위했고, 천하통일은 628년에 이루어졌다. 그의 즉위는 친형과 아우를 죽인 '현무문의 변' 에서 시작하여 보위에 오른 그는 청조의 '강희재'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147-
- 이세민은 부친 이연이 수나라의 '당국공'으로 있을 때 부친의 배려로 태원에서 이미 태자에 준하는 교육을 받았다.
'장후윤'을 이세민의 스승으로삼았다.
장휴윤이 가르친 것은 춘추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춘추좌전] 이었다.
이는 재왕학의 최고 교범에 해당한다.
[춘추좌전] 은 유가의 경전인 동시에 , 제왕학의 교범이다. 역대 왕조 및 제왕의 흥망성쇠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사평을 가한 책이다. 따라서 이세민이보위에 오른 후 '정관지치'를 이루게 된 것이다. -152-
-당태종은 태자 '이건성' 을 폐하고 후임으로 이치' 를 선택한뒤 밥을 먹을 때 태자 '이치'에게 [순자]에 나오는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잇지만 배를 뒤엎을 수도 잇다" 구절을 인용해 태자 이치를 가르쳤다. -158-
- 이세민은 공자처럼 죽을 때 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手不釋券' 을 실천했다. 독서를 하면자신을 이롭ㅂ게 할 뿐 아니라 국가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된다 고 했다. 그가 분서갱유를 행한 진사황과 학자를 경시한 한고조 유방을 비판했던 이유다.
수불석권의 자세를 견지한 이세민의 학문적 식견은 매우 높았고,
특히,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해 유려한 필적을 남기기도 했다. 20세기의 모택동 만이 그에 비견되는 높은 수준의 필적을 보였다. -160-
- 당나라 개국공신中 '방현령' 은 산동성 齊州임치 출신이다. 그는 18세 때 수나라에서 실시한 진사히험에 급제했다. 수나라 때의 진사 시험은 당나라 때 보다 어려웠다. 이세민의 '장자방' 으로 불린 그는 '현무문의 난' 을 기획했던 인물이다. 사람들이 그를 두고 후한 광무제 때의 명신 '등우' 에 비유했다. -166-
-이세민은 강대한 수나라가 농민봉기로 일거에 무너지는 것을 목도했다. 수나라의 패망을 거울로 삼았기 때문에 그는 늘 세심히고 신중하게 국정을 운영하여 신하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백성을 착취해 군주를 섬기는 것은 자기 몸의 살을 도려내어 먹는 것과 같다. 배는 부를지 언정 육신은 망가져버리듯이 군주는 부유해도 국가는 망해버리기 때문이다.
군주의 재앙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170-
- 이세민은 청조의 강희제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황제로 칭송받고 있다. 이는 남북조 시대가 빚어낸 '호환융합' 의 결과물 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의 수도인 장안성에서 동서의 문화가 하나로 합쳐져 찬란히게 꽃을 피웠다. 당시 장안성에는 아랍인, 페르시아인. 유럽인들이 무시로 많이 드나들면서 동서 문화교류으 새로운 장을 열었다.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대제국이 우뚝 섰던 배경이다. -172-
- [손자병법] 은 내용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이론상으로도 매우 체계적이어서 병서의 으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오자병법] 은 병법이론 등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기는 하나 현실에 기초한 전쟁론과 군사운용 등을 설파하고 있는 점에서 [손자병법] 의 전술이론을 보완하고 있다.
[사마법] 은 춘추시대 중엽 이전의 군사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울료자] 는 법가사상을 토대로 한 병법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점에서 전국시대의 군사사상을 대표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육도] 는 先秦시대의 병법이론을 종합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삼략] 은 도가사상에 기초해 정치군사의 일원화를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176-
- [당리문대] 의 특징 ;
1. 事理幷重이다. 구체적인 사례와 병법이론을 동시에 중시했다 는 뜻이다.
2. 기정병용이다. 이는 모든 병서가 하나같이 강조한다.
[당리문대]는 이를 가장 체계적으로 이론화해놓았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만큼 폭이 넓고 깊이가 있다.
3.主客幷存이다. 주객은 攻守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공격 속에 수비가 있고, 수비 속에 공격이 담겨 있다 는 의미다.
외양상의 수비가 사실은 공격의 의미를 담고 있는 以守爲攻 과 외양상의 공격이 사실은 수비의 성격을 띠고 있는 以攻爲守 의 묘리가 바로 주객병존主客幷存이다. 이는 [손자병법] 을 제외한 여타 병서에서는 찾을 길이 없는 [당리문대] 만의 자랑이기도 하다. 이에 해당하는 대목이 '권 下'에 나온다.
당태종이 이정에게 물었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서로 엇비슷할 때 어떤 전술로 임해야 하오?"
이정이 대답했다. "손자병법에서 말하기를 '승리의 가능성이 없을 때는 공격을 삼간 채 수비에 치중해야하고, 가능성이 있을 때는 때를 놓치지 말고 공격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이는 적과 싸워 승리할 가능성이 없을 때 잠시 방어에 치중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마침내 그런 기회가 왔을 때 결단해 공격하란느 취지입니다. 결코 양측의 강약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공격과 방어는 그 취지가 다른 만큼 결코 하나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당리문대] 는 구성이 문답식으로 되어 있어, 체계적이기는 하나 추상적인 용어로 꾸민 [손자병법] 보다 이해하기 쉽다. 역대 병서의 병법을 구체적인 전례에 적용한 [당리문대] 를 보면 전략전술의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179-
- 5대10국 ;
당나라 말기는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다. 왕조는 이름나 만 잇을 뿐 사실상 각지의 절도사들이 독립국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5대 10국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가 당나라 후기부터 근 2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183-
- '개소문' 은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양왕' 을 시해하고 '보장왕' 을 세운 연개소문을 말한다. 중국사서에는 그의 성씨가 泉으로 되엉 있다. [삼국사기] 에도 '천' 으로 나온다.
660년 백제가 멸망 한 후 나당연합군의 협공 속에서 저항하다가 665년 병사 했다.
고구려는 그의 사후 내분이 일어나 668년 멸망 하고 말았다. -187-
- 수양제 양광 ;
강도江都 (지금의 양주 )에서 '우문화급' 에 의해 시해를 당한 뒤 후대인들에게 폭군으로 매도 되었다.
수양제의 업적은 대운하를 개착하여 남북교역을 활성화하고 장성을 수축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胡漢融合'을 통해 중국의 여러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604년 말에 보위에 올랐다.( 수양제 의 '대업' 원년은 605년이 된다.)
618년 수양제는 '우문화급' 에 의해 교살 당하였다
수양제는 황하 이남 백성 100만 명을 동원해 운하를 뚫었다. 낙양의 西苑에서 승선하면 황하로 들어가 하남의 변수와 산동의 사수를 거쳐 회하에 이르게 되는 거대한 운하다. 그리고 다시 강도 (지금의 양주 ) 에서 항주 에 이르는 강남河 도 뜷었다. 후대인들은 이들을 묶어 '대운하' 로 통칭했다. 뱃길이 열리면서 '호한융합' 이 촉진되고 남북교역이 활발히 전개되어 부국강병을 실현했지만 백성에게는 재앙이었다. -233~234-
- 수양제 양광이 시도한 거대한 규모의대운하 건설 당시 수만척에 이르는 거대한 배를 건조 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가 남쪽 강도로 순행할때 탄 '龍舟' 는 높이 45척,길이 200장에 달하는 4층 높이의 거대한 누선樓船이었다. ( 1척은 24센티미터, 1장는 10척이얶다. 4층에는 회의실인 정전과 침실인 내전, 집무실인 조당이 있었다, 2~3층에는 120개의방, 1층은 내시들이 사용했다.)
황후를 위한 배는 '상리주'로 불리는 별도의 누선을 만들었다. -235-
- 수문제 양견 때 영양왕을 '요동공'에 봉하였다. 그러나 영양왕은 말갈의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요서를 쳤다. 대로한 수문제 양견이
아들 '양량' 에게 명해 수륙 양군을 이끌고 가 고구려를 쳤다.
수양제 양광 은 대업6년(610) 에 '배구' 가 고구려를 칠 것을 건의 했다. 이에 수양제는 영양왕 '고원高元'의 입조를 명했다. -243-
- 612년 (대업 8년), 1차 고구려 원정, 그러나 실패.
613년 (대업 9년), 2차 고구려 원정,또 실패했다.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에 매달려 민심을 잃게 되자 예부상서 '양현감' 이 반기를 들었다. 반란은 실패하여 연루된 3만여 명이 참수되고 '양현감' 이 창고를 를 헐어 곡식을 나누어줄 때 이를 받은 낙양의 백성은 산 채로 성의 남쪽에 매장되었다.
614년 (대업 10년), 3차 고구려 원정, 곧 철군하여 또 실패했다.
615년 (대업 11년), 북쪽변경 순시中산서성 대현인 '안문'에서돌궐족의 공격을 받아, 근왕군의 지원으로 풀려났다. -245~248-
- 江都의 亂 ;
대업 14년(618) 정월, 강도에 머문지 이미 2년이 된수양제는 연일 술을 마시며 황음무도한 행각을 벌였다.
강도의 양식이 점차 다해지자 금위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우문술에게 2명의 아들이 있었다. 우문지급 과 '우문화급' 이 그들이다. 이들은 금위군을 지휘하는 장군 '사마덕감' 과 함께 수양제를 제거하기로 밀모하여 변란을 일으켰다.
금위군 교위 '영호행달領狐行達' 이 달아난 수양제를 체포하여 황제 집무실인 조당으로 데리고 갔다.
'사마덕감' '우문화급' 금위군 장교 '마문거' 우문화급의 휘하 '봉덕이 ' 등이 수양제의 죄를 성토했고 수양제가 탄식했다.
영호영달외 몇 사람이 달려들어 수양제가 쓰고 있던 두건인, 백련건으로 수양제의 목을 졸라매 숨통을 끊었다. 당시 나이 50세 였다. -254~257-
- 수나라- 고구려 침공사 ;
1차 원정 - 수문제 양견은 개황 18년(598), 수문제의 4남인 한왕 양량과 왕세적이 권정, 참패로 끝났다.
2차 원정- 수양제 양광은 3차례에 걸쳐 운정. 밀패로 끝남. -297-
- 연개소문의 세력이 강해지자 귀족들과 영류왕이 그를 제거하려 하자.이를 미리 알아챈 연개소문은 , 정관16년(642) , 군사를 모아 영류왕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영양왕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영류왕은 주화파였고, 연개소문은 주전파였다. 영류왕은 을지문덕과 함께 수나라를 격파했다. 하지만 영류왕은 수나라와 화평을 맺고 신라와 백제를 먼저 굴복시켜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수나라가 고구려 원정 실패로 피페해진 틈을 타 중원을 장악할 수 잇다 "고 주장했다.
당나라가 들어서는 시점에 영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당나라와 화평을 추구하는 정책ㅇ르 채택했다. 하지만 연개손문으 을지문덕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연개소문은 "수나라 군사를 격파했을 때 곧 대군을 내어 토벌했다면 중원을 평정했을 수 있었는데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아숩다" 고 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비롯한 주화파를 힘으로 제압했던 배경이다. 나름대로 천하정세를 정확히 분석햇던 것이다. -300~301-
- 당나라 - 고구려 침공사 ;
제1차 고구려 원정- 정관 19년(645), 고구려원정 실패.
제2차 고구려 원정- 정관 21년(647), 고구려원정 실패.
제3차 고구려 원정- 정관 22년(648), 고구려운정 실패.
정관23년(649) 당태종 이세민 병들어 죽었다.
천하의 성군으로 꼽히는 당태종 역시 수양제 양광의 행보와 하등 다릅 바가 없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3차에 걸친 원정을 감행했다가 실패로 끝났고 그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308-
-수양제 양광의 패망 사례를 알고 있던 이세민은 왜 그토록
고구려 원정에 집착했던 것일까?
중국사는 크게 보아 한족과 북방민족이 번갈아 세운 왕조으 역사이다. 한족의 왕조가 쇠퇴하면 북방 민족이 치고 들어와 영토를 점거하고 중원의 패권을 ㅏ 차지하는 식이다 위진 남북조 시대가 그 시작이다
수당제국은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 및 북주와 마찬가지로 북방민족의 일원인 선비족이 세운 정복왕조다. -309-
-수당제국을 세운 선비족은 고구려의 부용세력으로 '부용' 은 대국에 복속된 소국을 뜻한다.
거란족의요,몽골족의 원, 여진족의 금, 만주족의 청 등이 모두 고구려보다도 더 열악한 부족단위에서 시작해 천하를 제패했다. 고구려는 시종 만주와 반도애 걸쳐 광대한 영토를 지닌 강국이었다. 수당제국이 건국 초기부터 비록 대륙을 석권햇으면서도 계속 강대한 세력을 유지하고 잇는 고구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이유다. 고구려 정벌을 제국의 안정과 생존 차원에서 접근했던 결과로 볼 수 잇다. -310-
- 설인귀는 고구려 정벌의 장본인이다.
당태종이 사망하는 정관23년(649) 당시 고구려는 당나라에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내부적으로 크게 피폐해 있었다.
수나라 때 고구려가 수문제와 수양제의 침략을 효가적으로 막아냈던 이유는 거란과 말갈의 군대를 동원해 선제공격을 가하거나 견제세력으로 활용할 수 잇ㅆ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세적과 설인귀 등이 모두 북방민족 출신 장수들이다.-349-
-당나라는 영휘5년(654) 때, 신라의 김춘추가 보위에 올랐다.
영휘6년(655) 김춘추가 측천무후에게 원정군을 요청함
현경5년(660) 당나라 군사가 신라와 합세해 의자왕을 사로잡음. ( 요동방 면에서 당나라의 군사를 막기 위해 여념이 없었던 고구려는 의자왕의 구원 요청에 응할 수 없었다. 이때 연개소문은 병으로 누워 있었다.)
-350-
-중국 사서에 따르면 인덕 2년(665) 연개소문이 병사했다. 영류왕은 연개소문으 장남 '남생' 을 막리지로 삼았다.
연개소문에게 숙청디어 앙심을 품고 있던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2남 '남산' 과 3남 '남건'을 부추겨, 남산은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된 뒤 '보장왕' 을 시켜 남생을 소환톨록 했다. 결국 그는 당나라로 투항했고, 건봉 2년(667 ) 당나라가 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듬해 건봉3년( 668) 년 당나라는 고구려가 사분오열된 틈을 타 평양성을 공격, 고구려는 무너지고 말았다,
측천무후는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뒤 설인귀로 하여금 군정을 실시하게 했다.
당시 당제국은 엣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외 5개 도독부를 설치하ㅏ고,고구려 지역에는 9개 도독부를 설치하여 당제국의 판도에 편입시켰다. 신라을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했다. 당시에는 아직 고구려가 건재하고 있어서 신라는 당제국과 충돌하지는 않았다. 당제국은 신라를 자국의 한 지방행정구역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함형2년(671) 신라가 백제의 고토를 거의 회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측천무후가 대로했다.
함형3년( 672) 고간이 대군을 이끌고 와 신라 군사와 격돌했으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351-
-고구려를 정벌한 설인귀는 일개 농민에서 대장군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당시 또다른 입지전적인 인물은 측천무후의 부친 '무사확' 을 들 수 잇다. 단지 측천무후로 인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랬을 뿐이다. 무사확은 설인귀와 달리 재산이 많았다, 설인귀처럼 백의종군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장교 자리부터 시작했다.
그는 당고조 이연을 만니게 되면서 부터 운명이 바뀌었다. -353-
-21세기 디지털 시대는 잡스처럼 기술과 예술을 결합시킨 제품ㅁ으 만들어내거나 인류의 이용후생 증진에 도움을 주지 않는 제품을 만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윤은 잡스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제품' 을 만든 데 따른 부수적인 수입에 불과하다. 이윤을 만드는 동기가 '위대한 제품' 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보다 앞설 경우 제품 자체가 조악해질 뿐만 아니라 이내 소비자의 외면을 받아 기업 자체가 글로벌 시장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
삼성의 입장에서 볼 때 잡스의 퇴진은 제갈량이 사마의와 결전을 앞두고 오장원에서 진몰했던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문제는 잡스 퇴진에 따른 반사이익이나 챙기려 든다면 이는 패망의 길이다. -379-
-삼성과 애플의 격돌은 세계경제의 중심축을 근 200년 만에 서양에서 동양으로 되돌리는 '세기적 대결' 에 해당한다.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순환하듯 세상에 영원한 1등이란 없다.
이제 21세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결합한 스마트 시대로 접어들었다. 삼성과 애플의 격돌은 불가피하다. 싸움에서 2등은 없다. 이는 조조에게 패한 원소의 전철을 밟는 것이다. 누가 조조 내지 원소가 되는 것일까?
잡스는 생전에 매우 자유분방하며 창의적인 사고를 지닌 동시에 제왕 리더십을 발휘했던 점이다. 삼국시대 당시 천하를 호령한 조조의 리더십과 꼭 닯았다. 군웅 가운데 뒤늦게 일어난 조조가 먼저 천하통일의 가능성을 연 것은 '제폭구민' 을 전면에 내세워 백성의 지지를 얻어던 덕분이다. 잡스가 '기술기업을 넘어선 예술기업' 을 기치로 내걸고 스마트 시대를 열었던 것과 유사하다.
기업이 국가사회 전체를 위하는 존재가 되어야 대중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지지를 토대로 혁신의 가능성을 키울 수 잇고,결과적으로 더 큰 이익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안방과 문밖의 구별이 사라진 21세기 상황에서는 국가사회 발전, 크게는 인류공영의 기치를 내걸어야만 소후와 소왕을 뛰어넘어 전 세계의 시장을 호령하는 素帝 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중소기업을 쥐어짜는 한국 기업풍토에 일대 경종을 울린다. 그렇지 못하면 소제로 군림하는 애플 제국으 책봉을 받아 울타리 역할이나 하는 하청업체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한때 야인으로 멸시하던 만주족이 천하르 호령한 상황에서조차 좁은 반도 안에 틀어 박힌 채 小中華 운운 하며 自高自大하던 조선조으 군신이 걸은 길이다. 21세기에 이런 식으로 접근했다가는 이내 안방까지 내준 채 폭삭 주저 앉고 말 것이다.-380~381-
-잡스도 처음부터 소제로 등극했던 것은 아니다. 온갖 수모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했던 결과다. 조조 역시 끊임없이 노력한 덕분에 천하를 호령할 수 잇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제폭구민' 의 公義를 기치로 내걸고 세상의 인재를 그러모은 데 있었다.
조조는 희로애락으 정서를 거의 여과 없이 드러냈지만 천하의 선비와 백성 모두 그의 파탈 행보에 감복했다. 잡스 역시 새 제품을 발표할 때 마다 정장 대신 청바지를 입고 온갖 독설과 자화자찬을 늘어놓지만 소비자는 환호했다. 그가 직접 나선 신제품 발표회장은 전 세계 취재진으 눈에는 마치 애플 제국으 신민들이 잡스를 향해 '소제素帝 만세' 를 외치는 것처럼 보였다.
조조와 잡스가 그랬듯이 자유롭고 창조적인 발상과 기존으 관행과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파탈의 창조적인 행보' 가 요체다. 이는 천하를 삼켰다 뱉을 정도의 응흔한 기개와 포부, 작은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자강불식의 자세, 천하의 인재를 그러모아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아는 탁월한 용인술을달리 표현한 것이다. 기존의 가치와 통념 속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삼국시대의 원소와 초한전 당시 항우가 걸었던 길이다.
조조와 잡스는 '적수공권' 에서 시작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천하 사람들을 감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좌절과 성공이 끝없이 교차된 이유다. -382~383-
- 세상 사람들이 잡스에게 열광하는 이유 는 기존으 가치와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세계를 열어준 창조정신과 끊임없는 도전정신에 감복한 결과로 볼 수 잇다
그를 분발시킨 가장 중요한 동기는 인생이 짧다는 사실 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잇ㅆ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숭고한 삶이다. -384- 끝.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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