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열하일기 - 박지원 著, 전규태 譯
-정조 4년, 1780년 청 고종의 古稀를 축하가기 위한 '진하사' 를 따라 청나라에 가게 되어 盛京,북평,열하 등을 둘러보면서 당시 중국인들의 이용후생하는 실생활을 보고 돌아와 마침내 <열하일기> 를 쓰게 되었다.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열하일기> 는 청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했던 당시 보수파에게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6-
- <박지원의 문학관>
그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사실주의적 입장 에 투철했다. 그는 문장은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된다 고 하였다. 억지로 옛 사람이 쓴 글을 생각하고 지나치게 근엄하고 장중하게 꾸미려는 것은 원래의 모습을 다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 이렇게 되면 그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살아 잇는 참 모습을 그리기는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에는 있는 그대로를 꾸밈없이 쓰는 진실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
예컨대 <열하일기> 에 보면 평양과 패수의 위치 문제를 고증하는 데 있어 종래의 통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여 민족적 자주성을 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즉 그는 고질적인 모화 사상에서 벗어나 근대적 민족주의 의 사상적 기반을 이 책을 통해 다졌다고 하겠다. -8~9-
- [도강록 ]
6월24일. 아침에 보슬비가 내렸다 다시 갰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30리를 간 뒤 구련성九蓮城에서 묵었다. (.....)
後晉의 유후가 지은 [唐書] 를 다시 생각해 보면, '고려 때의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발원 되는데, 그 물빛이 오리의 머리 부분처럼 푸르스름해서 압록강이라고 불렀다.' -17-
- [연행길]
한성 - 압록강변 의주 - 의주 성문 - 구룡정 - 나루터 - (도강) - 후산(虎山) (조선 선비들은 '마이산'이라고 했다. 고구려 시대에는 '박작성'이 있었다)
( ** 후산은 해발 146M 밖에 되지 않지만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단동과 신의주 일대의 전망을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사슴 한 마리가 놀라서 갈대밭을 헤치며 뛰어 넘어가는 모습이 마치 보리밭 위를 날아가는 새같다. 일행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두 놀랐다.
10리 길을 가서 삼강三江에 도착하니,강물은 비단결처럼 잔잔한데 이곳을 애라하愛喇河 라고 한다. (.......)
애라하의 넓이는 우리 나라의 임진강의 넓이와 비슷하다. 여기서 곧바로 구련성九蓮城까지 향해 있으며 푸른 숲이 마치 장막처럼 우거졌는데 간느 곳마다 나무를 찍어내는 소리가 온 들녘에 울려퍼진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니 산이 곱고 물은 맑은데다 사방이 탁 트였다. (........)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구려 때 이곳을 도읍으로 정한 적이 있었다." 라고 하니, 이것은 바로 국내성을 말하는 것이다. -30~33-
*** [퍼온글] http://blog.naver.com/mongenlee/60143886665
연행 길에 오른 조선의 선비들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에 첫발을 내딛던 기록들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소서강과 중강 사이에는 섬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고, 중강을 지나면 중국 땅인데, 중강 건너 10리(5km) 지점에 “애라하”라는 강물이 있어서 소서강, 중강, 애라하를 합쳐 홍대용은 “삼강”이라고 했고, 이덕무는 “삼파강”이라고 했다.
위의 기록들이 만들어진 18세기 당시에 비해 지금의 압록강 흐름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애라하는 곧 지금의 아이허(靉河)이고, 사행들이 건너던 삼강은 아이허의 서쪽 지류였다. 아이허의 주류는 후산(虎山)의 서쪽에서 곧바로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중강)에 합류하는데, 우리의 사행들이 통과하던 당시의 이 아이허 주류는 지금과는 달리 서쪽으로 흘렀던 물줄기였다. 의주를 떠난 사행은 곧바로 구련성(九連城)으로 향했으며, 구련성은 의주에서 정서(正西)방향인데 비해 지금 아이허의 주류가 압록강에 합류하는 지점은 의주 앞강에서 거의 정북(正北)방향에 위치한다.
............................................................................................
-곧 날이 개면서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드리워져서 손으로 만져보고 싶을 만큼 반짝거렸다. -35-
-이윽고 하늘이 활짝 개 뭇별들이 총총 나지막이 드리웠다.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만져질 것만 같다. -20-[열하일기 -박지원 저,리상호 옮김]
.......................................................................................
-봉황성에 도착하기까지는 30리 가량 남앗다. 옷은 푹 젖고 길 가는 사람들의 수염이 이슬에 젖어 볏모(秧針앙침) 에 구슬을 꿰어 놓은 것같이 보인다.
서쪽 하늘가로 짙은 안개가 트이면서 한 조각의 파란 하늘이 조심스럽게 나타나다. 한 조각의 구멍으로 영통하게 비치는 것이 조그만 창에 끼어 놓은 유리알 같다. 잠깐 동안 울안의 안개가 모두 아롱진 구름으로 화한 듯하여 그 무한한 광경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돌아서서 동쪽을 바라보니 이글이글 타고 잇는 듯한 한 덩어리의 붉은 해가 세 발 정도 올라왔다. -40-
-우리나라 선비들은 아직까지도 요동이 원래 조선으 땅이며,숙신.예.맥 등 東彛동이. 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의 조선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나 영고탑이나 후춘 등지가 원래 고구려의 옛땅인지를 모른다. (........) 압록강을 '패수' 라 하고 청천강을 '패수' 라 하였으며 또는 대동강을 '패수' 라고도 했다.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의 위치가 앞으로 나갔다 뒤로 물렀다 하는 건 그때 그때의 사정에 따르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느 것이 아니라 여진에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한서]나 지리지에도 현도나 낙랑은 있어도 진번이나 임둔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조선 시대 세조 때의 학자 '김윤' 이 말한 바, "우리 나라의 국경 안에서는 마을들을 찾을 수가 없으니 그것은 응당 지금의 영고탑 등지에 있었기 때문이나라." 라느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진번이나 임둔은 漢末에 바로 부여 ,읍루,옥저와 합쳐진 것이다. 왜냐하면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변해서 물길(勿吉)이 됐고, 또 변해서 말갈이 되었으며, 다시 변해 '발해' 도 되고 또다시 '여진' 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발해의 무왕 '대무예' 가 일본의 '성무왕'에게 보낸 글 중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다시 찾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받았다." 라고 하였으니,이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있고 그 절반은 여진으로 나누어 있어서 서로 포옹하고 잇대어 있었으니, 이것은 원래부터 우리의 영토 안에 있었음이 더욱 명확한 일이 되었다. (...........) 옛날의 조선과 고구려의 국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생각하고 다음에는 요동에 가서 패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패수가 정해진 연후에는 강역이 뚜렷하게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진 다음에는 구금의 사실과 부합될 것이다. 그러면 봉황성은 틀림없이 평양이라고 할 수 잇느냐고 묻는다면 ,이곳은 기씨. 위씨. 고씨 등이 도읍한 곳으로 한 개의 평양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50~52-
-심양 은 원래 우리 나라 땅이었는데 혹자는 이르기를,
"漢이 4군을 두었을 때는 낙랑의 군청이었지만 元魏,수.당나라 때 고구려에 속했다" 라고도 한다. 지금은 성경 이라고 부르는데 봉천 부윤은 백성을 다스렸으며,봉천 장군인 부도통은 팔기를 통합하고....... -94-
..............................................................................................
**심양과 성경은 :
참조 ; 연암이 전하는 중국 짝퉁의 기술 -
http://bookdb.co.kr/bdb/Column.do?_method=ColumnDetail&sc.webzNo=6873
** 제목 ;성경,심양 - http://baedalguk.com/bbs/zboard.php?id=free&no=5720
심양에 가보면 왜 성경인지 압니다.
고분부터...궁전까지 그냥 다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북경까지 거리도 여러 기록에 아주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금나라때 기록이나
송나라 때 기록이나
원나라 때 기록이나
청나라 때 기록이나 거리가 거의 다 일치합니다.
역사 사실을 허위로 가설을 정하고 어거지로 짜 맞추면 곤란합니다.
역사 기술에서
한나라 때 요수는 대릉하이고,(수경에서 백랑수가 요수로 들어가니까)
요나라 이후부터, 청나라, 현재까지 요하는 지금 요하일 뿐입니다.
..................................................................................
-황민호 라는 擧人거인이 묻기를, "조선 땅의 넓니는 얼마나 되나요?" 라 하기에 나는, "옛 기록에 으하면 5천 리라 하나 단군 조선은 당.요와 같은 때였으며, 기자 조선은 주무왕 때에 봉한 나라였고,위만 조선은 秦나라 때에 연나라 사람들이 피란을 와서 부분적으로 한쪽만을 차지하였으니, 땅은 5천리를 차지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전조前朝 때에는 고구려.백제. 신라 등을 합해서 고려가 세워졌으니 남북이 3천리고 동서가 1천 리였습니다. -123-
-달빛은 뜰에 가득히 비치고 때마침 담너머 장군부에서는 벌써 초경을알리는 야경소리가 고요를 깨뜨린다. (.......) 달이 이토록 밝은데 어느 누가 마시지 않으랴. 드디어 가만가만히 잔에 가득 따라서 마시고는 촛불을 훅 불어 끄고 방에서 나왔다. 홀로 뜰 한가운데 서서 교교한 달빛을 바라보고 잇노라니 괴이한 소리가 담 밖으로 부터 들려왔다. 이것은 낙타가 장군부에서 우는 소리가 틀림 없었다. (.........) 오른쪽의 행각에 들어가 보니 역관 세 사람과 비장 네 사람이 한방에 누워 자는데,머리와 다릴를 서로 뒤섞고 아랫도리는 채 가리지도 않고 잇엇으며,천둥소리처럼 우악스레 코를 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어떤 자는 물병을 세워 물을 쏟아내는 그런 소리요,어떤 자는 나무를 켜는 톱니 긁히는 소리였으며,어떤 자는 혀를 쉴 새 없이 차며 사람을 호되게 나무라는 소리요,어떤 자는 투덜거리면서 남을 원망하는 소리를 내고 잇었다.-130~131-
-이경을 알리는 야경 소리가 마치 깊은 산중에 사는 접동새 울음소리처럼 들려왔다. 뜰 한가운데를 홀로 왔다갓다하면서 달리기도 하고 발자국을 크게 떼어 보기도 하면서 그림자와 서로 희롱했다. 명륜당 위에 서 있는 고목들은 짙은 그늘을 만들고,서늘한 이슬은 잎사귀 끝에 방울방울 맺혀 달빛에 어려 영롱한 구슬을 드리운 듯하였다.
담 밖에서는 또 삼경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아, 아깝도다. 이 아름다운 달밤을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으니, 이 시간엔 어찌하여 모두 하나같이 잠들었는가. 도독부의 장군들도 역시 모두 잠들었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며 즉시 방에 들어가 쓰러지듯 드러누우니 베개에 머리가 닿자 저절로 잠이 들었다. -132-
- < 산장잡기 >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
古北口는 동으로 산해관까지는 700리이고, 서쪽으로 거용관까지는 280리로,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어 지세가 험하다.따라서 방어하는 데는 고북구만한 곳이 없다.
나는 중간重關을 나와서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 그 높이를 헤아려 보니 10여 丈이나 되었다.
나는 붓가 벼루를 끄집어 내어 술을 부어 먹을 갈고 성을 어루만지면서 글을 쓰니,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밤 삼경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 라고 썼다.
성 아래는 모두 날고 뛰고 치고 베던 싸움터로서 지금은 사해가 군사를 쓰지 않아 오히려 사방에 산이 둘러써여 골짜기마다 음삼陰森하였다.
마침 달이 상현이라 고개에 걸려 넘어가려 하는데, 달빛의 싸늘하기가 날카롭게 간 칼날 같았다. 조금 있다가 달이 고개 너머로 더욱 기울어지자 오히려 뾰족한 두 끝이 불빛처럼 붉게 변하면서 횃불 두 개가 산 위로부터 솟아나오는 것 같았다. -231~ 233-
- 때는 가을 달이 은은하게 비치고, 관내의 양쪽 언덕은 百丈백장.의 높이로 깍아 세운 듯한데 길이 그 가운데로 나 있다. (........)
이제 밤중에 홀로 만리장성 아래에 섰는데, 달은 기울고 강물은 소리를 내며 흐르며,바람은 처량하고 반딧불이 날아서 접하는 모든 경치가 놀랍고 두려우며 기이하고 신기하였으나, 홀연히 두려운 마음은 없어지고 기이한 흥취가 발동하였다. -235-
-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나는 밤중에 하수를 아홉 번 건넜다."
하수는 두 산 사이로 흐르며 돌과 맞부딪치며 흐르는데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살과 울부짖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으르렁거리며, 숨가쁘게 호령하는 듯 장성을 깨뜨릴 형세이다. (...........)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 종류를 비교해 보니, 솔숲 바람소리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는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많은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대피리가 수없이 우는 것은 듣는 이가 노한 탓이요, 천둥과 우렛소리로 들리는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요,찬물이 끓는 듯이 문무文武가 겸한 것은 듣는 이가 아취를 자아내는 탓이요,거문고가 궁우에 맞는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요,창호지에 바람이 우는 것은 듣는 이가 의혹됨이 많은 탓이니,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마음속에 품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것이다. (...........)
지금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위험는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귀에 드리리는 것을 무서워하여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이제야 나는 道를 알았도다.
"마음이 깊고 고요한 자 " 는 보고 듣는 것에 따라 마음의 누累가 되지 않고, "이목만을 믿는 자" 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서 도리어 병이 되는 것이다. -236~238-
- [매화포기梅花砲記]
날이 이미 황혼이 되자 대포가 동산 가운데에서 나오는데,소리는 천지을 진동시키고 매화꽃이 사방으로 흩어져 마치 숯불을 부채질하면 불꽃이 화살처럼 튕겨 흐르듯 했다. (.........) 불꽃 모양을 한 새와 짐승과 벌레와 고기들이 날아가고 뛰놀고 꿈틀거리는 것이 모두 갖가지 자기의 모양을 갖추었는데, 새는 혹 날개를 벌리기도 하고, 또는 입부리로 깃을 문지르기도 하며, 발톱으로 눈갈을 비집기도 하고, 벌과 나비를 쫓기도 하며, 꽃과 과실을 쪼아먹기도 한다. (..............)
대체로 여든한 가지 유희의 매화포 불꽃놀이로써 그것을 끝맺는데, 이것을 九九大慶會 라고 불렀다.-252~254-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