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퍼온글] 달빛사색

최해식 2014. 11. 28. 23:45

[퍼온글] 달빛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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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번쩍 눈을 떴다. 창문을 통해 비치는 환한 달빛 때문이었다. 은성한 보름달이 온 집안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었다. 잠결에 일어나 팔짱을 낀 채 거실과 베란다를 오가며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환한 달빛 쪽을 향해 따라가면 금방 달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운 빛이 아까워 손바닥으로 받아 모으며 하늘 쪽으로 난 거실 의자에 앉아 밤이 깊도록 달빛만을 바라보았다.

 만산홍엽이 빛을 내려놓은 늦은 가을이다. 이제 나무는 말간 맨몸으로 바람 앞에 섰다. '입동'과 '소설'이 지났으니 득달같이 겨울바람이 들이닥칠 것이다. 달빛에 젖은 바깥세상은 따스하지만, 열린 창문 틈으로 한기가 출렁 다가와 전신에 감긴다. 

 달빛 아래서는 만사가 고요하고 맑다. 무엇인가를 쌓기에 바빠 피곤하던 몸이 한순간 깃털이 되고 지극히 순수한 나를 만난다. 하루를 내려놓고 묵상에 든 베란다 화분 식구들, 어항 속에서 재롱을 떠는 새끼금붕어가 편안한 평화다. 거실 구석에서 묵묵히 주변을 지키는 키다리 '행운목', 여름내 황금나팔을 불어주던 '천사의 나팔', 어둑발만 치면 금세 꽃대를 움츠리는 부끄럼쟁이 '사랑초' 일가가 단잠에 들었다.

 
 달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의식 안의 묵은 때들이 가뭇없이 사라진다. 고요나 순수, 청빈 같은 말이 별빛으로 쏟아지고 눈길 닿는 주변 것들이 다 꽃잎으로 열린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 내 안이 충만으로 가득하다. 달빛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넉넉한 것을, 눈앞에 펼쳐진 것에 충실하면 되는 것을, 무엇을 쌓기에 허덕이느라 달빛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지냈는가.
 
 법정 스님은 '어제는 부도난 수표와 같고, 내일은 알 수 없는 어음이어서 오늘만 현금처럼 쓰는 것이다.' 라고 적으셨다. 현재에 충실한 이가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거라고. 그래서 삶은 오늘에 온 힘을 다하며 가벼운 마음이어야 하고, 가벼워야 날아오를 수 있다고 했다. 오늘이 행복해야 더 행복한 내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삶은 '오늘'의 연속이다. 부도난 수표, 알 수 없는 어음보다 '오늘'이라는 현금을 쓸 줄 모른다면 헛방이다. 부질없는 수표나 어음에 매달려 바위처럼 무거운 삶을 살거나,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은 본인의 견해차이다.

 나이가 더할수록 점점 몸이 무겁다. 반갑지 않은 신체의 변화에 내가 끌려가는 일상이다. 세월이 보태진 몸은 어지간히 옷을 걸쳐도 맨 몸인 듯 시리고, 한번 진행된 허리 통증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거기다가 성격도 변해간다. 순간 감정을 가감 없이 밖으로 배출해야 직성이 풀리던 천성이 자꾸 이리저리 재거나 뜸을 들이며 소심해진다. 대신 실수가 적은 것이 장점이긴 하지만, 환영할 일만은 아니다. 복잡하기보다는 단순한 것이 훨씬 정신건강에 이롭지 싶어서다.

 종종 머릿속 깊숙한 곳에 각인된 흑백필름을 꺼낼 때는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오지만, 이것이 다 '팔자소관이 거니….'하고 한 호흡 늦추면 구름은 서서히 흩어진다. 부도난 수표 때문에 가슴을 친다한들 달라질 것이 무에 있으랴. 앞으로 내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고요와 평화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걱정 중에는 실재하는 것도 있겠지만, 생각이 빚어낸 걱정이 대부분이다. 욕심과 집착이 빚어낸 것, 나보다 잘난 사람에 대한 비교나 질투에서 오는 잡다한 감정은 다 생각이 만든 것이다.
 올해 달력도 나뭇잎과 함께 떨어지고 달랑 한 장뿐이다. 뭐가 그리 좋은지 달빛은 환하게 웃고만 있다. 야밤에 청해 듣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에 전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