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통쾌한 반격의 기술, 오자서 병법 - 공원국 지음
-[오자서병법] 의 핵심, 즉 '반격의 실천' 을 이해한 사람들:
1.촉한을 건국한 유비 ; 도덕적 근본은 알지만,전략적으로 정밀한 부분은 잘 응용할 줄 모르느 사람이다. 하지만 남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2.명나라의 건국자 주원장 ; 다른 나라와 싸움할 때 시간과 공간을 적절하게 배합하는 데 천재였다.
3.한나라를 세운 유방 ; 작은 것을 잃어도 더 큰 것으로 보상받는 데 귀재였다.
4.현재중국을 설계한 모택동 ; 가지에서 뿌리까지 [오자서병법]을 이해한 최고수였다.
이들 네 사람은 모두 처음에는 약자에서 출발했지만 비슷한 전략을 가지고 강자들을 상대해왔다. 이들의 성공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 하나, 상대보다 빠른가? 둘, 상대보다 명분의 우위를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나보다 강한 ) 적보다 빠를지 않고,명분도 약하다면 그 싸움은 포기하는 것이낫다.
손자는 "전쟁은 승리를 위해 상대를 속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현장이며 존속과 패망의 갈림길이니, 반드시 신중히 살펴야 한다." 했다.
오기는 "다섯 번 승리한 자(나라)는 화를 입었고,네 번 승리한 자는 피폐해졌으며,세 번 승리한 자는 패자가 되었으며, 두 번 승리한 나라는 왕자가 되었으며, 오직 한 번 싸워 한 번 승리한 자가 황제가 되었다" 고 했다. 이렇듯 여러 번 이긴 자는 결국엔 망한다. -10~11-
-전쟁의 신 '오기' 는 누구인가?
그는 '76전 64완승12무승부' 의 대전략가다. 당대에 오기만한 지략을 갖춘 이는 없었다. 전장에서 그는 천문 대신 사람과 지략으로 싸워 이겼다. -오기,[오자병법]에서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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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는 전국시대 초기에 손자와 쌍벽을 이룬 뛰어난 장수였다. 그가 쓴 [오자병법] 은 [손자병법] 과 함께 '손오병법' 이라 불렸다. 오기의 이론은 손자에 비해 약간 부족한 부분이 ㅇ있지만 전쟁 수행능력은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전군을 호령하는 장수면서도 사졸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엇다. 편한 잠자리를 마다하고 땅바닥에서 잠을 잤고 행군할 때도 말으 타지 않으며 자신의 식량은 직접 어깨에 지고 다니는 등 일반 병사와 고통을 분담했다, 병사의 종기를 입으로 고름을 빨아주었다는 소식을 들은 병사의 어머니는 오열을 하여 " 남편이 군대에 있을 때 오기 장군이 고름을 빨아서 병을 고쳐준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들이 똑같은 일을 당했으니 장군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열심히 싸우다 제 아비처럼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을 것 같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고 대답했다.
[오자병법]의 도국 편에서 밝히듯 오기가 "76번 출전하여 64번의 승리를 거두고 나머지는 화해를 하고 영토를 1,000리나 넓히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잇었던 요인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은 용병술이었다. [손자병법에서 인생을 배우다 - 저우이펑 지음, 황보경 옮김]-203-
-오기 :
오기가 편찬한 유명한 병법서인 [오자병볍] 은 손자와 더불어 [손오병법] 이라 불린다.
오기는 노나라 사람으로 " 오기가 (제나라)아내를 죽여 장수가 된다" 라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기원전 389년, 그가 위나라 장수 시절 5만 병마를 이끌고 자신의 병사 보다 10배나 많은 진나라 군대를 격파한 '음진 전투' 에서 눈부신 전례를 남겼다. 이 사건은 중국 전쟁 역사상 ㄴ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긴 대표적인 예이다.
오기는 평생 노,위,초 3국에서 장수와 재상을 재냈으며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후세의 용병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도설천하,손자병법-도설천하 국학서원 역]-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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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는 "강한 적 앞에 오히려 허술한 진을 쳐서 적이 달려들 게 만들고, 막상 달려들면 또 뒤로 물러난다. 적을 기뻐하게 만들고,적이 기버하면 더 기뻐하도록 아군은 슬픔을 가장한다. 적이 완전히 승리를 자신할 때까지 끝까지 기다렸다가 일거에 달려드는 서 것이 오자서의 전술이다. '육손' 이 '유비'를 칠 때 이 방법을 이용했다. 중요하다,매우. -63-
- 약점을 드러내 상대를 안심시킨다. -유비 :
[삼국지]의 유비는 원래 밑천이 부족했던 이 사람이 군웅이 자웅을 겨루던 전장에서 일가를 이루고,촉이라는 국가를 이루어 일세의 영웅 조조와 대결한 것은 우연처럼 오자서의 병법과 맞아 떨어진다.
유비는 마치 겁쟁이처럼 숟가락과 젓가락을 떨어뜨리며 조조를 안심시켰다. 이렇듯 유비는 늘 인의도덕을 말했지만 시실은 속임수에 능했다. 지신의 약함을 드러내 상대의 의심을 거두게 한 것이다.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깔보도록 만드는 '示弱' 의 책략 을 썼다. 오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적이 기뻐하면 우리는 일부러 슬픈 기색을 내보이고,적이 승리를 자신하면 우리는 기꺼이 엎드려 기다린다." 이처럼 조조가 자신의 우세를 자신할수록 유비는 더욱 엎드렸다. -79-
-손권의 물음에 제갈 량이 대답한다.
" '전횡'은 제나라의 장사에 불ㄹ과했으나 오히려 의리를 지켜 치욕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우리 유예주는 왕실의 후손으로 재주는 세상을 뒤덮고 여러 선비들이 사모하여 우러러보기를 마치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것처럼 합니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하늘이 하시는 일일 따름인데,어찌 조조 아래 들어가는 치욕을 견딜 수 잇겠습니까?
오자서가 쓴 "허로 실을 상대한다." 는 것이 이런 말이다. 유비는 조조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숨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손권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과장하고 있다. (*전횡 ; 진나라 말 농민기의군을 이끌고 중앙에 항거하여 제나라의 왕이 된 사람이다.) -93-
-오자서 병법의 중요한 요결은 "열세에서 바짝 엎드렸다가 상대를 태만하게 하고, 상대가 극도로 태만해 졌을 때 기회를 타서 질풍처럼 반격하는 것" 은 오자서가 유독 강조하는 바다. 그렇다면 조조는 왜 패했느가? 그는 형주를 수중에 넣고 교만해졌다. 그리고 손권 역시 닭 쫓던 개처럼 유비가 형주르 차지하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유비의 행동은 빨랐고 상대를 교만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조조가 교만에 빠지지 않고 형주의 군민들을 위로하여 자기 수족으로 만들었다면, 삼국의 형세는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기고나서 사람들을 위무하는 것이 조조의 장기인데도 손쉽게 형주를 얻은 탓에 그런 실수를 했던 것이다.-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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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 진영의 모사 '사마의' 가 오자서의 작전을 들고 관우의 빈틈을 파고 들었다. '사마의' 는 오자서에 버금가는 병법가다. -105-
-오자서는 말한다.
"필사의 각오로 전장에 나가라. 그러나 아군은 필생의 땅에 두라" 그래서 나는 유비를 두고 대체는 알지만 응용은 미숙했던 초보자로 분류했다.-111-
-명나라를 세운 탁발승 주원장:
그는 이른바 임기응변과 순간포착의 달인이다. 훗날 농민군을 이끌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결국 몽골족 인 원나라 를 북방으로 밀어내고 명나라를 세운 명태조 '주원장' 이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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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전의 명수 모택동 :
20세기를 산 사람으로 죽어 신이 된는 일은 쉽지 않다. 과학이 점령한 이 시절에 사람으로서 신이 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사망과 동시에 신이 된 사람, 바로 중국 공산혁명의 아버지 모택동이다.(.......)
그는 [오자서병법] 의 완성자이며 실천자다. 지금 자신의 약한 힘을 쥐어짜서 강한 상대를 이겨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면 '모택동' 이 온몸으로 체득한 [오자서병법] 을 배우진 않을 수가 없다.-176-
-1927년 가을, 중국 중남부 강서성의 '정강산'으로공산당 비적,즉 공비共匪들이 몰려들었다.(...........) 모택동은 [손자병법] 의 유격전 부분을 연구하고,결국 자기 것으로 만드렀다. 또 [손자병법] 의 유격전략을 전술 부분까지 확장시켜 체계화한 것이 바로 [오자서병법] 이다. 만약 [오자서병법]이 먼저 나와 알려졌더라면,아마도 손자대신 오자서를 더 많이 업급했을 것이다. (........)
나는 모택동이 유격전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오자사병법]을 어떻게 적용하였는지를 3단계로 분석할 것이다.
1단계; 생존단계 - 1928ㄴ년 육겨전 개시부터 대규모 티각, 즉 대장정이 마무리된 1935년까지
2단계; 성장단계 - 1935년에서 1945년 사이 對일본 반제국주의 전쟁 시기
3단계; 반격단계 - 내전을 끝내고 건국을 선언한 1949년까지이다.-178-
-장개석은 신해혁명으로 청나랄가 멸망한 이후 각지의 군벌들을 제압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1928년 남경에 국민정부를 세워 자신이 총통이 되었다. 그러나 이 통일 과정에서 노련한 기회주의자들은 싸움 없이 항복하여 세력을 보존했고 통일 과정에서 장개석에게 도움을 준 세력들은 새로운 군벌이 되어 독립적인 지위를 누렸다. 그중에서 광서군벌 '이종인' ,화북및 서북 군벌'염석산'과 '풍옥상' ,동북군벌 '장학량' 등이 있었다. -183-
-모택동은 손자가 말한 "적의 예봉을 피하고 적이 지쳐 물러갈 때 공격하라" 는 말을 자주 쓴다. 그런데 만일 [오자서병법]을 먼저 알았다면 오자서의 말을 인용했을 것이다. [오자서병법]은 [손자병법] 의 유격 부분을 정밀하게 발전시킬 것이다. 오자서느 이렇게 말했다.
"군대를 진격시킬 때는 적의 전진과 후퇴에 따라 우리 군을 전진시키고 후퇴시켜야 한다. " (........)
오자서는 "적의 견실함을 태만함으로 바꾸라" 고 말했다.
적이 진을 견실하게 치면 우리는 소수의 병력에 허술한 진으로 상대하고,적이 기뻐하면 우리는 일부러 슬픈 기색을 내보이고,적이 승리를 자신하면 우리는 기꺼이 엎드려 기다린다. 적이 우리를 가볍게 보고 무턱대고 달려들 것이니, 그때 우리는 질풍같이 들이친다. -185~186-
-모택동은 "일본이 화북으로 진출하고 있는데 동족끼리 싸우지말고 대일 항전 태세로 들어가자" 라고 외쳤다 이 구호는 아편전쟁 이래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에 무수히 난타당하는 것을 보아온 애국주의 세력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장개석은 이 구호를 독 안에 갇힌 생쥐의 비명 정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모택동은 끊임없이 장개석 진영 내부의 균열을 파고 들었다. 그는 한손에는 총을 들고 한손에는 붓을 들었다. 그는 끊임없이 장개석이 일본군을 버려두고 내전에 집중하는 것을 이적행위라고 보았다. (.......) 남동쪽에 기반을 둔 장개석은 동 북군벌 '장학량',서북군벌 '양호성'을 이용해 공산군의 근거지를 협공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들은 쉽게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군벌이란 이익에 민감한 이들이다. 공산당 군대를 이겨서 얻을 것은 무엇인가? 또한 장학량과 양호성 역시 중국인이었다. 장학량은 자기의 근거지인 동북을 일본이 장악하는 것이 두려웠다. 모택동은 항일전쟁과 동시에 국민당 내에 분열이 일어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분열이 일어났다. 공산당 토벌을 계속 주저하는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1936년 겨울,장개석의 비행기가 '서안' 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온지 일주일이 된 12월 12일,장학량은 돌연 동북군을 움직여 장개석을 감금했다. 그리고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그내용은 한마디로 "내전을 당장 멈추고 일본과 싸우라" 는 것이다. 이제 공산당 측의 반응은 어떨가? 장개석을 가둔 장학량과 힘을 합칠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는 방침으 세웠다.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군이 "적은 그르고 오직 우리가 옳다" 는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모택동은 전략가였다. 정말 적이 그르다는 것을 만방에 포고할 기회가 온 것이다. 연안에서 파견된 '주은래'를 통하여 의외의 주장을 펼쳤다. " 장개석을 당장 석방하고 함께 일본과 싸우자" 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여론 때문이얶다(......)
1937년 7월7일,일본은 전면전을 일으켜 북경과 천진이 넘어갔고 8월에 상해가 무너지자 일본군은 남경을 향했다.장개석은 바로 남경을 버릴고 중경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남경에서는 아직도 얼마인지 집계가 안 될 정도로 무수한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수도를 버리고 떠난 지도자 대신 민간인이 대규모로 학살되었을때, 그 지도자는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는 것이 역사의 상도다. -194~198-
-중국 공산군은 국민당군보다 훌씬 강한 일본군과 더 격력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다. 화력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기에 전선은 점점 서쪽으로 이동해 갔다. 일본은 유격전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악랄한 **삼광정책**을 써서 유격 근거지들을 무인지대로 만들어 버렸다. 이때 등장한 것이 "적이 진격하면 나도 진격한다" 는' 敵進我進' 전략이다.
(**삼광정책** ; 모두 죽이고 ,빼앗고,불태우는 작전으로 공산군의 배후 촌락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다.).
이전략은 같이 달려들어서 사생결단을 낸다는 뜻이 아니라 유격대를 적의 전선 후방으로 들여보내는 전략으로, 적이 깊숙이 전진하면 적의 전위와 맞싸우는 대신 적읜 후방을 친느 것은 오자서식 유격전의 한 형태다.-203-
-국민당 군대는 장강 유역의 대규모 도시들을 방어하느라 수십만 병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민심도 잃었다. 사람들은 전쟁 기간 동안 마구잡이로 찍은 돈 때문에 한 해에 몇 백 퍼센트으니 물가 상승을 감내해야 했다. 가진 재산이 휴지조각이 된 사람들이 정부를 신뢰할 수는 없었다. 나라가 넘어질 지경인데도 관리들은 자기 잇속을 챙기는데 바빴기 때문이다.-207-
- 1947년 3월 국민당군은 '연안'까지 접수했다. 장개석은 전쟁는 사실상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귀찮게 달라붙는 전술' 을 사용하여 적의 후방을 노리고 있었다.(.......) 국공내전에도 서서히 최후의 순간이 오고 있었다. 공산군은 후퇴하는 듯했지만 바로 돌아와 근거지를 되찿았고,국만당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211-
-장개석은 왜 항상 병력은 분산시켜서 각개격파되었을까? 왜 항상 중심을 비워두고 외부에 집중했을까?
이유는 국민당 군대가 한 덩어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개석은 항상 자신의 주력은 아끼고, 다른 군벌 휘하의 장병들을 희생시키려 했다.
반면 모택동의 군대는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잇었을까?
공산당은 농민들의 욕구에 부응하여 자기 군대와 인민을 결합시키려 했다. 이것은 "싸움을 할 때 백성를 해치는 자,내부 규율을 파괴하는 자들을 먼저 손본다" 는 '오자서' 의 주장을 실천한 것이다. -216-
- [오자서병법]의 저자 는 오자서 본인은 아닐지라도 역사적으로 오자서가 만들고 실전에 응용한 전략을 대단히 정밀하게 이해한 사람, 즉 '오자서의 병법' 계승자 라는 사실뿐이다.
[손자병법] 은 종적이 묘연한 손무의 이름을 빌어 아마도 복수의 저자가 썼기 때문에 종합적인 전술의 성격이 강하다.
[오자서병법] 은 사료에 뚜렷이 남아 있는 오자서의 구체적인 행적를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유격전을 집중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227-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