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해식
2023. 8. 12. 20:56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1915~1987)는 1946년 초 경성에서 경험한 패전과 귀환과정을 매일같이 담담하게 기록했다........................평소에 조선인들로부터 원성을 사 그야말로 생명에 위험을 느낀 사람들은 진작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이들은 뭐든지 먼저 하는 사람이 위험부담도 커지만 기회도 많은 법이라고 믿었다. 반면에 조선을 떠나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뿌리내리고 정착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끝까지 남을 궁리를 했다.-46-
-그의 일기 속에는 빠르게 변해가는 경성의 모습이 담겨 있다...........그러나 일본인이 만든 낯익은 '경성'의 모습은 어느새 이질적인 조선인의 '서울'로 변해가고 있었다.............오래간만에 종로 거리를 둘러보았다. 암시장에서는 물건들 옆에 '배척, 일본인 체류'라고 적힌 전단을 떡 하니 붙여놓고 조선인들이 일본어로 손님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정치적 이념과 현실의 욕구가 교차하는 모순된 상황이 한편으로는 재밌있으면서도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거리를 걷다보니 예전의 말단 직원이었던 조선인 아무개는 무슨 무슨 위원장이라고 적힌 완장을 두르고 다녔다. 반면 예전의 일본인 과장님은 그 옆에서 조선인을 상대로 가재도구를 내다 팔고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이 뒤집어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47-
-1945년9월12일 소공동에 있는 경성YMCA와 경성일본인세화회가 재류 일본인들을 위해 마련한 조선어 강습회가 시작되는 날이었다.-80-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며 내란죄를 적용해 투옥함으로써 조선어를 연구하고보급할 인적자원을 탄압했다.......이렇게 조선어를 금압했던 일본인들이 패전후 돌변하여 조선어 강좌를 부활하고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는가 하면 양 민족의 공생를 이야기 했다.-82-
-1930년을 기점으로 전체 거류민의 30%를 넘어서기 시작한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2세들은 조선어 학습 경험이 전무한 세대였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제 이들도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조선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조선어를 배울 필요 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일본인들이 조선어 강좌로 몰려든 사실은 패전 후에도 조선에 잔류하고 자 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83-
-모리타 구마오는 청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895년4월 병마와 군수품을 실어 나르는 어용선의 선원으로 조선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배는 통영 욕지돌 ㄹ거쳐약 보름 후인 5월11일 인천에 도착했다. 근는 도중에 아산만 풍도 아ㅏㅍ바다르 지나며,"오호! 이 일대야말로 일본 국민이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일청 개전의 단초가 된 곳이다, 우리 해군의 위력을 보여준곳" 이라며서레 설레는 마음으로 주위를 바라보았다.........일본인들에게 인천은 어떤 곳이었는가. 1882년 임오군란 때 경성에서 쫓겨온 하나부사 공사 일행이 항구에 정박 중이던 영국 함선 '플라잉피시'호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기필코 다시 돌아오겠다며 이를 앙당문 곳이 아닌가! 또한 러일전쟁기에는 일본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 순양함 '바리야크'를 뭍으로 인양해 욱일승천기를 매달며 쾌재를 불렀던 곳이기도 했다.
1945년 패전에 즈음해 인천에 거주하던 2만여 명의 일본인들 중 상당수는 1910년 한국 병합 이전부터 그곳에서 온갖 영욕의 역사를 모두 맛본 사람들이라 할 수 있었다.-84-
-1910년대에는 수도권 내륙의 쌀 이출항으로, 1920년대에는 관광지로,1930년대에는 대륙 침략을 뒷받침할 경인공업지역으로 변모하면서 인천은 한반도의 그 어느 곳보다 늘 많은 돈이 돌았던 지역이었다. 특히 월미도는 1917년 인천역과의 사이에 방파제가 완성되고,그 위로 해상도로가 닦이면서 휴일이면 해수욕과 해수탕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붐벼 대표적인 행락지로 부각되었다.송도지구 역시 1937년 수인선이 개통되자 전시체제기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월미도에 버금가는 유원지로 대두했다..........인천의 일본인들 가운데는 일본제국과 흥망을 같이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패전의 아픔도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에서 오래 생활했던 까닭에 이 땅에 대한 미련 또한 상대적으로 강했다.-85-
-예부터 나진.웅기.청진 일대는 적화(赤化) 세력이 강하기로 유명했으며, 함경북도에서도 특히 길주.명천.성진은 남삼군(南三郡)이라고 해서 전국적으로 사상사건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1938년 '미나미 지로' 총독의 '적화 분자 소탕' 지시에 따라 '우메다'는 명천구 화태주재소에 주석으로 부임후 그의 열정으로 주재소 주석에서 일약 명천 경찰서장으로 발탁했고, 1944년엔 다시 웅기경찰서장으로 전보 발령했다. .......천하의 '우메다'가 피난길에서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1938년 적화 분자 대소탕 작전 당시 그가 검거했던 조선인 보안대장이었다. .......조선인 독립운동 세력을 철저 탄압한 공로로 고속 승진한 일본인 경찰 관료가 패전으로 인해 피난길에 올랐다가 막다른 길에서 과거 자신이 검거했던 조선인 보안대장에게 낭패를 당한 것이다. 1945년 11월 2일 오후 6시20분 서울 원남동에서 권총사살을 당하였다. 사망자는 '사이가 시치로'로 1930년대 조선으로 건너와 사상경찰로 악명을 떨쳤다. 1936년 군관학교 학생 사건과 1942~43년 경성방송국 단파 도청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다뤘다....사이가 시치로가 살해당한 이유는 과거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한 원죄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원인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재산을 일본으로 챙겨 가려 한 그의 과욕에 있었다. 사이가는 그 와중에도 재산을 처분하고 돌아가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122-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는 소군정이 식민 지배의 실체였던 군인.경찰.관료들을 압송.투옥.억류하면서 지배 네트워크 자체를 해체해 버렸다. 즉 오로지 노동력 확보에 열을 올리던 소련군은 이들을 북한 내 다른 지역이나 만주.사할린. 소련 등지로 함부로 동원해갔고, 북한에 새롭게 대두한 조선인 정치세력은 구 지배세력에 대한 단죄를 남한에 비해 훨씬 강도 높게 실시할 수 있었다.-125-
-북한의 일본인 중 식민 통치와 직결된 남성들은 점령군이나 새롭게 들어선 현지 정권에 의해 투옥,압송,억류되었다. 이 같은 조치는 식민 자재의 청산을 비롯해 과거 악행에 대한 처벌 등 다양한 동기.명분,필요가 뒤얽힌 상황에서 취해졌다. 결과적으로 이 조치는 식민지에 거류하던 일본인 사회에 '국가 부재'를 인식케 했다. -129-
-조선에 오랫동안 재주한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고향은 북선(북한)이며, 안주할 땅도 북선밖에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조선에 대한 망향의 정서는 오랫동안 재주한 일본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133-
-경성제국대학 이과교원양성소에 다니던 '도코 요시마사는 패전후 먹고살기 위해서 공중 목욕탕에서 일하게 되었다. ....조선인들은 일부러 다른 사람도 들으라는 듯이 여기저기서 더운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네'라고 답하며 곧바로 물을 대령해야 했다. 때로는 꼬마 아이조차 '야! 이르본(일본) 도개비. 설렁설렁 놀지 말고 빨리 물이나 푸라고"하면서 야단을 쳤다. 어이가없었지만 먹고살려면 어차피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오히려 더 기분나쁜 것은 일본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염장을 지른다. '벌거벗으면 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등,패전 덕분에 목욕탕에서 시중드는 '일본인 나리'를 뵙게 되었다는 등 혼잣말하듯 비꼬는 말투는 정말로 참기 어려웠다.-138-
-일본인들은 문화수준이 낮고 구질구질한 조선인과는 잠시라도 같은 공간에 있기가 싫였다. 혹여 조선인을 목욕탕에 들여 보냈다가 만일 일본인 손님에게 병이라도 옮는다면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얼굴장사하는 목욕탕 사업은 그대로 접을 수 밖에 없다. 일본인에게 조선인은 곧 바이러스 그 자체였던 것이다.-141-
-조선인들에게 '아지노모토'는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언제나 먹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자 돈이 없어 살 수 없었던 소외와 콤플렉스의 상징 기제였다. 조선인에게 '근대의맛'은 이제것 보지 못한 신기한 물건과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계기도 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누리지 못함으로써 초라한 자신의모습을 재확인하도록 만든 얄궂은 요물이기도 했다. 1907년 합자회사 스즈키제약소로 시작한 아지노모토 주식회사는 이듬해 동경제국대학 화학과 교수 '이케다기쿠나에' 가 세계최초로 글루타민산나트륨,즉MSG 제조에 성공하자 이것을 조미료로 상품화했다.-154-
-재무관계로 일본인이 다시 출몰한 것은 1947년 봄부터인데 구 식산은행 총재 '아리가 미쓰토요'가 헌병의 경호 속에서 조선은행에 들러 재무 관련 업무를 살폈다. 이때 '아리가'가 조선은행의 어느 과장에게 "자네가 벌써 과장이 되었나?" 라며 빈정거리자, 그 과장이 "자네, 말조심하게. 지금이 왜정 때인 줄 아나!' 라며 쏘아붙였다는 일화가 있었다.-224-
-백남석은 한국 교회사에서 점술가 출신의 맹인 전도사로 알려진 백사겸(1860~1940)의 큰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영서원과 연희전문을 거쳐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심리학,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여 1923년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았다. 백남석은 어문구조법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고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노니...."의 [가을] 동요를 작사한 사람이다. 작곡은 후배교수 현재명이 하였다. 그는 1945년 12월10일 '일본인 밀항 화물 밀수출 원조죄'로 군정재판에 회부되어 1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230-
-체류지와 귀환지에 양 민족이 동시에 거류하고 있을 경우, 어느 한 지역에서 벌어진 동족의 피해 사건이 그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곧바로 다른 지역의 이민족에 대한 보복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43-
-부산의 조선방직 전무는 광목을, 삼화고무 사장은 고무신을 팔아 벌어들인 돈 수십 가마니를 밀항선에 실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부산에서는 그들이 방매한 물건이 기반이 되어 국제시장의 원류인 '도떼기시장'이 형성될 정도였다. -250-
-현재 지하철4호선 회현-명동-충무로역을 중심을 한 지역에는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 일본인촌이 자리 잡았다. 원래 조선시대 이래로 이 일대는 물이 잘 빠지지 않아 우기가 되면 땅이 질퍽거리는 통에 걷기조차 힘들다고 하여 '진고개'라 불렀으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후 남산 기슭으로 모여든 일본인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번화가로 만들어 놓았다. -258-
-요시오카 마리코는 1925년 경성의 적십자 병원에서 태어났다. 이 병원은 관사촌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총독부에서 근무하던 사람은 대개 그곳에서 태어났다.......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성의 하늘은 더 높고 파랬다는 등 자신이 태어난 조선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같은 시공간 속에서 조선인과 다른 체험을 앃아갔던 그녀가 반세기가 넘도록 그리워하던 '서울'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게이조(경성부)'일 따름이었다. 즉 경복궁의 경회루와 창경궁 연못은 그녀에게 스케이트장이었고, 조선신궁이 자리 잡았던 남산 자락은 스모 경기장이었다. 또 부민관은 가부키 극장 혹은 중일전쟁의 부상병을 위로하던 학생들의 합창대회 장소였고, 소공동일대는 일가 친척이 모여 중화요리르 먹던 가조엔雅敍園(아서원)과 프랑스 풀코스 요리를 즐기던 반도호텔 레스토랑이 있어 생각만 해도 즐거운 곳이엇다. -260-
-잘 봤습니다.끝.-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