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일본사 여행 - 하종문 지음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市 :
가나자와 시는 에도 시대에는 '가가' 번의 조카마치城下町(제후의 居城을 중심으로 해서 발달된 도읍 ) 로 급성장했다. 가가 번은 '가가 100만 석' 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막부 다음가는 경제력을를 자랑했다.
가가 번의 주인은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1537~1598) 의 후손이다.마에다 도시이에는 '오다 노부나가' 의 가신에서 출발했다가 오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에 서서 세력을 이어갔다. 세키가하라 결전(1600) 은 마에다 씨에게 최대위기이다. 도시이에의 장남 '도시나기'利長(1562~1614) 는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했지만,차남 도시마사利政(1578~1633)는 출진하지 않고 형세만 관망했다. 동군과 서군 중에서 누가 이기든 가문을
온중하겠다는 의도였다. 가가 번의 영주 마에다 도시이에는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에 즈음해서는 최대 4,0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에도를 왕복했다.
가나자와 역사의 조감도를 보려면 현립 역사박물관이 좋다. 그 옆에는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3대 정원 중 하나인 '겐로쿠엔兼六園이 있다. 언덕위에 조성되어 있어 걸음을 옮기다 보면 조카마치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데, 특히 겨울이 절경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가나자와 성내에는 육군 제 9사단 사령부가 있었지만,미군의 공습을 받지 않아 시가지 곳곳에 역사적 풍광이 잘 남아있다. 무가의 저택을 보고 싶다면 '나가마치長町'르 찾으면 되고,에도 새대 서민의 정취를 맛보려면 '히가시야마東山 의 히가시챠야가이(히가시茶居街 ) 등 찻집 거리 세 곳을 둘러보면 충분하다.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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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 현 후와 군, 시즈오카 현 시즈오카 市 :
1600년 '세키가하라' 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동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심복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1560~1600)가 이끄는 서군 간에 벌어진 싸움은 더욱 극적이다. 이에야스를 역사의 주역으로 등그시킨 '세키가하라' 는 기후 현 후와 군에 있다. 위 전투를 좀더 자세히 둘러 보려면 '세키가하라 역사 민속 자료관' 이 유용하다.(JR 세키가하라역 부근에 있다.)
이에야스는 은퇴 후 '슨푸' 성에서 거처하였는데 시즈오카 시에서 권장하는 탐방 코스는 슨푸 성을 둘러 본 뒤 동문(東御門) 을 나서서 이에야스 관련 유적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58-
- *** 아이치 현 기요스 市, 시후 현 기후 市,시가 현 오미하차만 市 :
나고야 성은 폐허가 된 옛 성터에 1612년 신축한 것이다.
나고야 성 은 용머리의 금으로 만든 '샤치'(머리는 호랑이,몸은 물고기인 상상으 동물) 장식으로 유명하며,효고현의 히메지 성,구마모토 현의 구마모토 성 과 함께 일본을 대표한다.
오다 노부나가' 의 마지막 근거지느 '아즈치' 성으로 시가 현 '오미하차만' 市이다. 수륙교통의 길목인 데다 교토가 지척인 군사 요지이다. 하지만 심복의 배신으로 '혼노本能' 寺에서 부서졌고(혼노사의 변,1582) 주인을 잃은 '아즈치' 성도 폐허가 되었다 일부의 성벽과 돌계단 등이 쓸쓸히 남아 았을 뿐이다.
기후 시에서는 매년 10월 첫 번째 주말에 '기후 노부나가 마쓰리' 가 열린다. -59-
- *** 시즈오카 현 이즈 市 :
가마쿠라 막부를 열어젖힌 '미나모토 요리토모' 는 1160년 '헤이지 平治' 의 난에 13세의 나이로 출전했다. 패전으로 아버지와 두 형의 목숨을 앗아갔으나,요리토모 자신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시즈오카' 현
남부의 '이즈'로 유배되엇다.결혼도 두 번이나 하여 두 번째 부인이 '호조 도키마사北條時政(1138~1215) 의 장녀 마사코政子(1157~1225) 가 바로 그녀다. 처음에 '도키마사'는 반대하였으나 마사코가 고집을 부리자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하듯,헤이 씨를 물리치고 무가의 자존에 오른 '겐' 씨의 적통 '요리토모' 를 사위로 맞이한 것은 호조 씨에게 다시업는 행운이었다.
매년 7월에 '요리이에 마쓰리' 가 열린다.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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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타마 현 히다카 市 :
"고마高麗.신사" 는 이름에서부터 한반도와 연관이 감지된다. 실제로 신사에 모셔진 고마잣코는 고구려 왕족 출신이다. [일본서기] 에 따르면 고마 잣코는 660년 사신1(1537~1598) 의 후손이다. 으로 일본에 왔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 귀국을 단념했고,716년 고마 군이 설치되자 각지에 살던 고구려인 1799명과 더불어 정착했다. 사후에 그를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 고마 신사이다.
한반도의 삼국시대 정세 변화는 일본 열도 이주 증대로 이어지며 그 주류는 왜와 관계 깊은 백제였다. [일본서기] 에 백제가 자주 엄급되고 신라를 폄하하는 기술이 많은 것은 백제계 도래인이 편찬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신라계 도래인으로는 '하타奉' 씨가 대표적이다. 일본의 국보 제1호 미륵반가사유상이 안치된 고찰로 유명한 교토의 '고류' 사는 원래 '하타' 씨 일족이 세운 '우지데라氏寺' 였다.-39-
-에도 시대의 정원 :
*리쿠기엔六義園 ; 도쿄 북쪽 '혼코마고메' 에 있다.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澤吉保(1658~1714) [= 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야스德川綱吉(1680~1709)의 총애를 받았다.] 의 저택에 딸린 정원이었다. 1702년에 완성되어 쓰나요시 쇼군이 58차례나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메이지 유신이후 미쓰비시 재벌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 岩崎彌太郞암기미태랑(1835~85) 의 손에 넘어갔다가 1938년 도쿄에 기증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도쿄공습때도 손상을 입지 않아 화려한 '겐로쿠' 시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봄에 피는 철쭉은 압권이다.
*고이시카와 고라쿠엔小石川後樂園 ; 미토 번주의 정원으로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도쿄돔 부근 일대에 있다.
* 하마리큐(浜難宮빈난궁) 정원 ; 전철로 갈수 있다.
* 시바리큐芝難宮지난궁) 정원 ; 전철로 갈 수 있다. -43-
-막부의 원점,가마쿠라 : 가나가와 현 가마쿠라 市에 있다.
가나가와神奈川 현의 가마쿠라鎌倉겸창. 는 도쿄에서 전철로 한 시간 거리인 해변 도시다. 가마쿠라 막부의 원점으로 무가의 발상지 또는 성지로 무사 정권의 흔적이 역력하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 신사 ; '미나모토 요리요시' 가 <전9년의 역(1051~1062) > 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1063년 새웠다.
<전9년의 역(1051~1062) > : *** '미나모토 요리요시' 는 아들 '요시이에' 와 함께 1062년 말 '아베'씨를 멸망시켰다. 12년에 걸친 싸움이자만,사료의 표현을 따라 '전前9년의 역役' (1051~1062) 이라한다. -186-
<후 3년의 역(1083~1087) > : 1083년 '요시이에' 가 혼슈의 최북단 '무쓰' 의 고쿠시로 부임하여 기요하라' 씨 일족 간의 내분에 끼어들어 기요하라淸衝(1056~1128)와 손을 잡고 혈전 끝에 1087년 말 간신히 평정에 성공했다. '후 3년의 역'(1083~1087) 이다-186-
가마쿠라막부의 창시자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원뢰조. 1147~1199) 가 진주한 뒤 현재 위치로 옮겨와 1180년에 대대적으로 증축되었다. 이곳은 무기류가 국보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사의 수호신아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난다. 높이 13.35m의 가마쿠라 대불은 국보이다.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으로 도시가 쇠락하여 에도 시대에 이르면 에도 근교의 행락지로 변모한다. 근대에 와서는 근대 문학의 최고봉 '나쓰메 소세키'(1867~1916),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 등이 대표적이다.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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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역사서[고사기]는 712년에,[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다. 고사기는 神代에서 '스이코'(593~628) 천황까지를 대상으로 했고,일본서기는 초대 진무(기원전660?~585?) 천황부터 지토(690~697)천황까지를 편년체로 기술한 한문 역사서이다.-137-
-[일본서기]에서 진구 황후는 신라 정벌의 신탁에 따라 서기 200년 임신한 몸으로 바다를 건넜다. 신라는 싸우지도 않고 조공을 맹세했으며 고구려와 백제도 조공을 서약했다는 상투적인 영웅담이 뒤따른다.
진구 황후의 이야기는 마땅히 신화로 읽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 본분을 벗어나 현실 역사에 끊임없이 호출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은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 이래 일본의 속국이었다며 침략군을 보냈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조선이 옛날 일본에 신속臣屬했다고 하는 스승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가르침에 따라 대한제국을 침탈했다.-139-
-일본의 옛모습을 전하는 역사서 는 중국에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 [한서] 의 <지리지>에 따르면,100여 국으로 분립된 '왜인' 의 사회는 한반도의 낙랑군에 정기적으로 사자를 보냈다고 한다.
[후한서] 에는 금인의 기록과 함께 서기 107년에 왜국 왕 '수승' 이 노예 160명을 바쳤다고 쓰여 있다. '수승' 이야말로 역사서에 등재된 일본 最古의 이름이며,그의 근거지는 규슈 북부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대세이다. 이 시대는 '야요이' 시대로써 이런 기록들과 고고학 성과를 다 같이 고찰해야 '야요이' 시대의 상像.이 한층 더 생동감 있게 다가올 것이다. (....)
이후의 기록은 [위지魏志] 의 '왜인전' 에 나온다. 중국에서는 220년 후한이 멸망하면서 魏.蜀촉.吳 의 삼국시대(220~ 280)가 펼쳐지던 시기이다.
중국 북부의 위는 오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왜와 외교 관계를 맺었는데,그것이 사서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3세기 초 일본의 ' 야마타이' 邪馬台(사마태) 국의 지배자는 '히미코(170?~248?) 이었다. 239년 히미코는 대방군 통해 魏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親魏倭王' 의 칭호와 함께 금인,동경 등을 선물로 받았다.248년에 히미코가 죽자 그 뒤 히미코의 일족 '이요'(235?~ ?) 가 왕에 올랐다.
晉의 역사를 기록한 [진서晉書] 에는 266년 '이요'로 추정되는 왜 여왕이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150년간은 중국 사서에 왜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후 413년에 '왜5왕' ( 讚,珍,濟,興,武 의 이름이 남조의 사서인[宋書]<왜국전>에서 150년 의 침묵의 기록을 깨고 나온다.기록은 413년부터 502년까지 이어진다 ) 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에도 히미코의 이름이 나오는데, 173년 신라에 사자를 보냈다는 서술이 있다.
30여 소국의 연합체 야마타이 국은 인구는 약 35만이다. 야요이 시대에 크게 성장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일정 범위 이상의 촌락들이 지역 연합을 구성하고 나아가 정치적 통합을 이뤄낸 것이 '야마타이' 국이라 할 수 있다. 야마타이 국의 소재지는 '기나이' 설(교토와 오사카 일대를 망라 한 야마토大和.) 과 규슈 북부에 있어다는 '규슈 설' 이 팽팽히 맞서고 잇다. -140~ 141-
- 최초의 통일 세력 야마토 정권 :
4세기 일본 열도는 '의문의 세기' 라고 불린다. 중국 사서에서 일본에 관한 기록이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야마토 정권의 초기 상황은 중국 측이 혼란기를 맞은 탓에 중국 역사서에 담기지 못했다.일본의 4세기가 거대한 전방후원분의 존재했지만 문헌 기록이 없다.하지만 한반도로 눈을 돌리면 중요한 실마리가 남아 있는데,七支刀와 광개토왕碑가 그것이다.
1.칠지도七支刀 ;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일곱 개의 날이 달린 칼이 건너간 사실인데,제작 시기는 물론이고 '헌상' 과 '하사' 를 놓고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이런바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 의 근거 중 하나로 여겨졌다. 하지만 1970녀대 이후로 힘을 잃고 최근에는 거의 사라졌다. 다만 귀중한 자원인 철을 입수하기 위해 왜가 백제나 가야와 긴밀한 통교를 가졌다느 점은 분명하다.
2.광개토왕碑 :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는 구절해석을 놓고 일본은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을 삼았다 " 라고 해석하고 ,한국에서는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 로 해석하고 있다.
어쨌든 일본 측은 '왜' 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정복할 만큼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랬으며,이는 일제 강범기에 칠지도와 마찬가지로 왜가 한반도르 지배했다는 증거로 부풀려졌다. 연구의 진전에 힘입어 왜가 야마토 정권이라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중이다.-143~ 144-
-무사의 성장 ;
10세기 중반에 두 차례의 반란,즉[다이라 마사카도] 의 난가 [후지와라 스미토모] 의 난이 종식도자 그중 '스미토모' 의 난을 토벌한
'미나모토 쓰네모토' 를 [중앙 군사귀족]이라 칭한다.
'미나모토 미쓰나카源滿仲원만중.(912?~997) ('미나모토 쓰네모토' 의 아들 )
'미나모토 요리미쓰源賴光원뢰광.(948~1021) ( '미나모토 미쓰나카源滿仲원만중' 의 아들 )
'미나모토 요리노부 源賴信원뢰신.(968~1048) ( '미나모토 미쓰나카源滿仲원만중' 의 아들 )
'미나모토 요리요시 源賴義원뢰의. (988~1075) ( '미나모토 요리노부' 의 아들 )
'미나모토 요리이에 源賴家원뢰가 (1039~1106) ( '미나모토 요리요시' 의 아들)
'미나모토 요리토모 源賴朝원뢰조(1147~1199) ( '미나모토 요리노부' 의 후손 ) (가마쿠라 막부의 창시자 )
**** '미나모토 요리요시' 는 아들 '요시이에' 와 함께 1062년 말 '아베' 씨를 멸망시켰다. 12년에 걸친 싸움이자만,사료의 표현을 따라
'전前9년의 역役' (1051~1062) 이라부른다.
1083년 '요시이에' 가 혼슈의 최북단 '무쓰' 의 고쿠시로 부임하여 기요하라' 씨 일족 간의 내분에 끼어들어 기요하라淸衝(1056~1128)와 손을 잡고 혈전 끝에 1087년 말 간신히 평정에 성공했다. '후 3년의 역'(1083~1087) 이다.-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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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0~ 1185 겐페이 쟁란
1192 가마쿠라 막부 탄생 -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창업
1221 조큐의 난
1274 원의 1차 침입
1281 원의 2차 침입
1333 가마쿠라 막부 멸망
1334 겐무의 신정
1338 아시카가 다카우지, 정이대장군에 오름.
1392 북조의 남조 흡수 - 남북조 통일
1429 류큐 왕국 건국
1467~ 1477 오닌의 난. -196-
-가마쿠라 막부의 탄생(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 )
군사독재 헤이 씨 권력은 '고사라카와' 상황의 유폐에 이어1180년 다이라 '기요모리'의 외손자 안토쿠 천황이 즉위하면서 최고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운다고 했듯이,정점에 이른 권력 앞에는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다.조정 내에서는 반 헤이 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고,중앙에 대한 지방 세력의 저항도 고개르 쳐들기 시작했다. (....)
1180년 6월 '고사라카와' 상황의 아들 '모치히토' 왕과 겐 씨의 장로 '미나모토 요리마사'의 군사행동으로 비화되었고 이 행동이 실패로 끝나자 5년 전란,곧 겐페이 쟁란의 기폭제가 되었다. (........)
( *겐페이 쟁란 :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 두 무가 가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
하지만 그해 9월에 들어서자 이즈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기회를 엿보던 '미나모토 요리토모' 의 봉기 소식이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헤이 씨 타도라는 모치히토 왕의 격문을 받고도 4개월 동안 정세를 관망하던 끝에 복수의 칼을 든 것이다. 요리토모는 거병 직후의 전투에서 병력의 열세로 인해 패배했지만,관동 남부를 장악한 데 힘입어 11월에느 가마쿠라 를 근거지로 삼아 도약의 발판을 다져갔다.(....)
1185년 4월 25일 야마구치 현의 단노우라는 겐페이 두 무가 간의 최후 결전장이었다. 승패는 불과 몇 시간만의 전투 끝에 판가름 났다. 헤이 씨 측의 무장과 여자들은 피눈물을 훔치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중에는 8세의 안토쿠 천황도 있었다. ( *단노우라 전투 : 야마구치 현 단노우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나모토 씨는 헤이 씨를 물리치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시모노세키 시 미모스소가와(みもすそがわ ) 공원에는 단노우라 전투 현장을 알리는 석비와 겐 씨(미나모토 요시쓰네 ) 와 헤이 씨(다이라 도모모리 ) 양 군의 수장 조각상이 있다.
그리고 고시라카와 상황이 (1192년 상황은 파란만장한 64년의 삶의 종지부를 찍었다.) 죽은 뒤 1192년 요리토모는 대망의 정이대장군,곧 쇼군에 올랐다. 가마쿠라 막부의 창업자가 세워졌다.
( *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헤이지' 의 난으로 20년 동안 '시즈오카' 현 '이즈' 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했고 1183년 '고시라카와' 상황이 '요리토모' 의 삭탈된 관직을 회복시켜주고,관동 지역의 통재권을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상황편에 서서 사촌인 '요시나카' 軍과 '헤이' 씨를 격파했다) -198~ 201-
****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 市 :
결전의 무대,단노우라 ; 단노우라 전투= 야마구치 현 '단노우라' 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겐 씨(미나모토 요시쓰네) 는 헤이 씨(다이라 도모모리) 를 물리치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 市 '미모스소가와' 공원에 에 가면 단노우라 전투 현장임을 알리는 전적비와 양군의 수당의 동상이 있다.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고대 율령국가에서 겐페이 쟁란을 끝으로 무로마치막부의 무사가 지배하는 것이 중세사의 기본적인 흐름이다.-196- ) 결전의 무대 단노우라는 시모노세키 市 인근에 위치 한다. '간몬' 교를 건너면 기타큐슈 市의 '모지' 區이다. 혼슈와 규슈 사이의 해역이 '간몬' 해협이며,제일 짧은 곳의 폭은 겨우 600m에 지나지 않는다. 물살이 거세고 조류는 하루에도 4번이나 변하는 험한 곳이다. 헤이 씨(다이라 도모모리) 의 영화는 거기서 수장되었다.
1180년부터 1185년까지 무가의 댱대 영웅 겐페이源平 간의 처절한 혈투가 벌어졌다. 일본에서 운동회는 홍백으로 나눠 치러지는데,이는 겐 씨가 백기를 ,헤이 씨가 홍기를 사용한 데서 유래한다. 한국의 경우도 일제 강점기 때는 홍백전이던 것이 해방 후에는 냉전의 서슬 때문인지 청백전으로 바뀌었다.
히노야마火노山.공원에서 보면 '단노우라' 일대를 넓게 볼수 있다.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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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큐의 난(1221) [** '고토바 상황이 막부 타도를 외치며 1221년 6월 상황이 손수 朝敵 '요시토키' 에 대한 토벌 명령을 내리며 '조큐承久의 난' 을 일으켰다 ] 에서 승리를 거둔 '호조 요시토키' 는 3년 뒤 1224년 62세로 눈을 감았다. 막부의 지휘봉은 초대 '로쿠하라탄다아' 로서 후계자 수업을 쌓은 맏아들인 '호조 야스토키北條奉時 '(1183~1242)에게 넘어갔다.
야스토키의 손자 '호조 도키요리'北條時賴 '(1183~1242)는 1252년 소군 '후지와라 요리쓰구(1244~1252)를 쫓아내고 천황의 맏아들을 6대 쇼군으로 영입했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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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市 :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橫兵 시 가나자와金澤 구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2대 싯켄執權(막부의 실질 권력자 ) '호조 요시토키'北條義時 '(1163~1224)의 아들 대에서 갈라진 '호조 사네토키'北條實時 '(1224~1276)가 건립한 '가나자와 문고' 가 있다. 1275년 무렵에 세워졌으니,700년이 넘는 사설 도서관이다.
교토 총독 격인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 ' 로 부임했던 후손도 공가(교토의 귀족)사회와 접하면서 많은 문헌을 모았다.
가나자와 문고는 중세 연구의 일급 사료 [아즈마카가미] 와 관련이 깊다. 이 책은 1180년 '미나모토 요리토모' 의 거병부터 1266년 첫 번째 황족 쇼군의 경질까지를 기록한 역사서다.
1930년 가나자와 문고로서 재차 부흥의 발판이 마련되었고,1990년에는 신관이 완성되어 중세에 관한 박물관 겸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잇다. '가나자와분코 역 '의 전철역에서 내려 20분이나 걸어가야 하지만,발품을 판 대가에 흡족할 것이다.
역사 탐방을 마친 뒤에는 해변 테마파크(Sea Pradise)와 해변공언을 찾아가보자 8월 넷째 토요일에 열리는 불꽃놀이는 바다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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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닌의 난(1467~ 1477) :
유력 슈고들이 연루된 가독 상속 분규에다 쇼군의 상속 분쟁을 둘러싸고 '호소카와' 씨와 '야마나' 씨가 벌인 전쟁이다.
1473년 호소카와 씨와 '야마나' 씨 양 당주의 잇단 病死로 두 가문이 화의를 맺으면서 11년에 걸친 분란은 막을 내렸다.
장기간의 내전으로 무로마치 막부는 뿌리째 흔드렬ㅆ다. 이윽고 일본 열도는 약 1세기에 걸쳐 하극상과 약육강식의 전란에 휩싸인다. '센고쿠戰國 시대' 가 시작된 것이다. -241~ 242-
-센고쿠다아묘의 탄생 :
오닌의 난 이후 교토의 정가를 좌지우지하는 호소카와 씨에 밀려 쇼군과 막부의 존재감은 한없이 작아져만 갔다. 일본 열도 전체를 아우르던 절대 권력에 공백이 생긴 것이다. 센고쿠 시대의 문은 활짝 열렸고,각지에서 그 문을 통과한 이는 새로운 지배자인 '센고쿠 다이묘' 로 우뚝 섰다. ( ..... ) 1493년 호소카와 씨에 의한 쇼군 폐위는 주종 관계의 와해를 촉발시킨 결정적인 계기로 평가할 수 잇다. ( ..... ) 1540년대에 접어들면서 슈고를 비롯한 전통적 지배층은 몰락하고 대신 고쿠진 중에서 두각을 드러낸 센고쿠 다이묘가 지역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중에 간레이 시바 씨의 가신이던 오다 씨가 일족의 경쟁을 물리치고 '오와리(아이치 현 서부)'를 통일한 것은 1559년이었다. 그가 오다 노부나가이다. -243-
-보통의 센고쿠 다이묘의 관심사는 그가 스스로 일군 '나라'의 경영 쪽에 심혈을 기울였다.즉 지역 밀착형 권력을 강구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 1582)' 는 달랐다. '오와리'의 센고쿠 다이묘로 출발한 노부나가는 1565년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1546~1565)가 살해된 것을 계기로 기린의 '린麟' 자를 수결로 쓰기 시작했다. 태평성세에 출현한다는 상상의 동물 기린에 자신의 꿈을 실은 것이다.
노부나가의 집안은 오다 씨의 방계인 '데다 간레이 시바' 씨 밑의 일개 호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1510~ 1551)는 오와리 지역의 유력자로 발돋움했고 아버지의 타계로 "가독"을 이은 노부나가는 1559년까지 안팎의 경쟁자를 제압하고 오와리의 패자가 되었다. -252-
-오랜 내란을 수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5년 명 정복을 피력했고,1587ㄴ녀 쓰시마를 통해 조선에게 조공을 바칠 ㅅ 것을 요구했다. 1590ㄴ녀 조선에서 파견된 사절 황윤길.김성일 ㄷㅇ에게 맡긴 답서에서 태양의 아들인 자신이 명을 정벌하고자 하니 길 안내를 하라(嚮道征明향도정명)고 했다. 히데요신느 분명 과대망상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침략 전쟁 발발의 본질은,냉혹하며 현실적인 정치가 히데요시에 초점을 맞춰야 파악할 수 있다.( ) 7년에 걸친 조선 침략의 참혹한 전란은 열도의 통일 과정에서 구축돈 대외 침략의 필연성에다 히데요시 개인으 허황된 야망이 더해지면서 저질러졌던 것이다.-256-
-도쿠가와 이에야스 와 에도 막부 :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 ; 참조 블로그 ; http://toads.blog.me/20207234385
1600년10월21일 오전5시. 혼슈의 거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분지인 기후 현 세키가하라 ( 関ヶ原 ) 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센고쿠 시대의 마침표를 찍는 대결전의 무대는 갖춰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동원한 동군의 병력은 약 74,000 이에 비해 서군의 총수 이시다 미쓰나리는 약 82,000의 군사를 모았다 ( ........ ) 동군은 전체가 잘 기동하는 데 비해 서군은 미스나리,우키타,고니시 등의 군사만 분전하고 나머지 부대는 방관만 햇다. 정오가 지나 고바야카와 부대가 배신을 하자 전세의 균형은 무너졌다. 미쓰나리는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8일을 숨어 나녔지만 결국 포박되어 고니시와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고, 동군을 이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천하 통일을 이룩했다. ( ........ )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혼노 사의 변'(1582) 은 천금의 기회였음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허리까지 굽혀야 했다. 그는 조선 침략에 출정하지 않고 힘을 온존한 것도 대권 행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 점에서 이에야스는 꾹 참고 때를 기다리는 강태공에 비견되곤 한다. -259~ 260-
-3장 근세 : (근세는 중세의 완성이다.)
근세 일본은 강력한 영주권을 지닌 막부(=쇼군)와 번(=다이묘大名)이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전국의 땅과 인민의 궁극적인 지배자는 쇼군이었으며,다이묘는 지배를 '위임' 받은 데 지나지 않았다.
1603~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쇼군 취임(초대 )
에도 막부 성립. (260여 년에 걸친'에도 시대'의 시작이다. )
1605~1623년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쇼군 취임
1623~1651년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쇼군 취임
? ~1837년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 취임
1837~1853년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 쇼군 취임
1853~1858년 두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 쇼군 취임
1858~1866년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 쇼군 취임
1867~1868년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쇼군(15대,마지막)-250-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 쇼군은 다이로大老.(장관급)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1815~1860)를 임명하여 반막부파를 철저히 탄압했고 '이이 나오스케' 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 1830~ 1859)등 지사들이 처형되였다. 1858년( =安政5년 :安政은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연호인가? )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진 '안세이安政(1854~1859)의 대옥大獄' 이다.
그러나 권력 회복을 향한 막부의 몸부림은 오래가지 못했다. 때늦은 눈발이 날리던 1860년 3월24일 미토의 탈번 무사 등 18명의 지사가 에도 성 코앞에서 '나오스케'의 가마를 덮쳤다.(에도성 사쿠라다 門 밖에서 '이이 나오스케' 를 암살했다고 하여 '사쿠라다문의 변' 이라고 한다.). 참극의 충격은,선혈에 물든 눈까지 치워가며 함구령을 내린 막부를 비웃기나 하듯 순식간에 에도 성내에 퍼졌다. (이로써 막부의 독재체재는 붕괴하였다.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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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쿠라다문의 변'
98권 [에도 산책] 미야베 미유키 지음,김소연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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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吉田松陰. ( 1830~ 1859)은 고향 조슈 번에 유폐되어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세워 신분을 불문하고 후학을 키웠다. 존왕양이 사상을 훈육하는 와중에 요시다 쇼인은 러시아,미국을 물리치고 일본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수중에 넣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른바 '征韓論' 을 펼쳤다. (....)
흔히 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기도 다카요시를 메이지 유신으 3걸로 부른다. 智人은 지혜로운 '기도'를,정이 깊은 '사이고' 는 情人,
의지가 강한 '오쿠보' 는 意志人으로 묘사된다. 유신초기의 정국은 세 사람에 의해 움직여졌다.-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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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고시마의 대표 인물,사이고 다카모리 :
현청 소재지인 가고시마는 과거 사쓰마 성이 있던 조카마치였다. 4km떨어진 서쪽 바다에는 활화산 사쿠라櫻 섬이 있어 '동양의 나폴리' 라고 부리며(나폴리의 자매도시)아열대의 자연경관도 수러하다.사쓰마 성은 1874년 화재 이후 재건되지 못하고 성벽과 해자 다리만 남아 있다. 성터에 들어선 미술관 옆에는 1937년에 제작된 군복 차림의 사이고 다카모리(1827~77) 의 동상이 잇다. (1898년 제작된 도쿄 우에노에 있은 동상은 평 복 차림이라서 부인이 흡족해 하지 않았다) 가고시마 시 중심의 건물들은 '서남전쟁(1877),태평양전쟁(1941~45)의 전화로 옛 보습을 거의 상실했다. 9개월 동안 치르진 서남전쟁은 가고시마가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무대로서 관련 유적이 많다. '시로야마'공원 부근에는 사이고가 세운군사학교의 건물은 없어졌지만 정문과 총탄 자국이 선명한 벽은 보존되어 있다.
사이고의 죽마고우 '오쿠보 도시미치(1830~78)는 도쿄도심의 아오야마 묘지에 있지만 비운의 사이고와 달리 권력자 이미자가 짙은 오쿠보는 대중적 인기가 낮았다. 오쿠보의 동상이 세워진 것은 사망 100주년이 되는 1979년에 가고시마 시내에 세워졌다. 가고시마를 대표한느 인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정환론' 의 대표 주자였다. -111-
****야마구치 현 하기 市 :
야마구치 현은 조슈長州 번 지역으로 특히 '하기' 시는 조카마치로서 번성했다. 하기 市에는 요시다 쇼인(1830~59)인 경영하던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이 있다. 1907년 쇼인 신사로 재정비되어 '요시다 쇼인' 역사관이 있다. -90-
-교토의 조정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고메이 천황이 36세의 나이에 천연두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고,14세의 어린 메이지(1867~1912)천황이 뒤를 이은 것이다. ( ..... ) 어수선한 정국으로 연기된 즉위식이 교토에서 그다음해 1868년 10월에 거행되었고 9월에는 조서를 발표하여 에도를 도쿄로 개명했고(천도는 1869년), 10월에는 연호를 메이지로 바꾸었다. -330~334-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2월 일본으로 귀국하여 5월 하순에 통감직 사표했다.그리고 한국 병합 방침을 7월6일 각의에서 결정하고 메이지 천황의 재갈르 얻었다. (......) 각의 결정후 80여 일이 지난 10월 26일 안중근의 총에 쓰러진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367-
-경제의 측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러일전쟁후 경기 침체에서 시달리던 일본에게 천우신조였다. 교전국으로부터 군수물자의 주문이 쇄도했고,유럽 역강이 물러간 아시아 시장에는 면직물 등이, 군수경기로 후끈 달아오른 미국 시장에는 생사 등의 수출이 급신장했다. 선박 수요의 급증으로 해운업과 조선업은 공전의 호황을 누렸다. 철강업은 수입 두절과 함께 조선업을 비롯한 각 산업의 성장을 발판으로 눈부시게 도약하여 중화학공업의 본격화를 이끌었다. 그 결과 일본은 1914년 11억 엔의 채무국에서 1920년에 ㄴ느 27억 엔 이상의 채권국으로 면모를 일신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흔히 '대전 경기' 라 부르지만,호경기의 혜택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다. -377-
-1926년12월 '다이쇼'천황이사망하고, 히로히토裕仁가 천황이 되어 쇼와昭和(1926~1988 ) 시대가 열렸다. -392-
-만주사변 ;
1931년9우러18일 밤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만주 펑톚교외의 류타오거우'에서 남만주 ㅓㅊ도의 일부가 폭파되었다. 만주사변의 시작이다.
1928년 말 '장쭤린' 의 동북 군벌을 이어받은 드의 아들 '장쉐량'은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가담했다. 만주 전역에 '청천백일기'( 지금의 대만 국기 ) 가 휘날리게 되면서 국민정부의 중국 통일은 거의 완성에 이른 듯이 보였다. -398-
-1934년10월,마오쩌둥(1893~1976 ) 의 홍군은 장장 1만km를 넘는 대장정'에 들어갔다. 일본의 정복에 대해 중국의 항일운동은 1936년 12월에 일어난 "시안에 주둔하던 장쉐량은 독전하러 온 장제스'를 연금하고 내전 중지 등을 요구한,'시안西安'사건으로 급반전되었다. 릴르 계기로 ㅈ 국민정부는 일본 쪽으로 총그를 돌렸다. -410-
-1965~1970년까지는 '이자나기(신화 속의 신) 경기' 라는 호황이 꽃을 피웠다. 1967년 일본 열도를 달리는 장동차는 1,000만 대를 돌파했다. 1955~1973년까지 일본의 실질적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에 달했다.
1964년10월,개최된 도쿄올림픽은 고도성장을 자축 무대였다. -445-
-1980년대까지 호황으로 배태된 거품경제의 붕괴는 엄청난 충격과 후유증을 몰고 왔다. 1989년 12월39,000엔까지 치솟았던 주가는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에 1만 엔대로 폭락했고,지가는 1991년 이후 10년 내내 하락을 거듭 했다. 혼미한 정치권의 정책 오류까지 겹쳐
1990년대는 '잃어버린 10년' 이라는 심각한 불황을 초래했다. -448-
-오키나와 주민의 집단 자결에 군의 강제가 있었다고 서술한 '오에 겐자부로' 의 저서 [오키나와 노트] 를 당시 군 관계지와 유족이 명에훼손으로 제소했고, 2007년 문부과학성이 교과서에서 군의 강제 부분을 삭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오키나와 140만 현민 中 10%에 해당하는 116,000명이 현민縣民 항의대회에 참가했다.
'미군기지' 와 '집단자결'은 오키나와 근현대사의 비극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집단사는 오키나와 전투의 끝자락에서 발생했으며,미군 기지 문제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아픔이다.
수백의 섬으로 이루어진 오키나와 현은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 중에서 마지막으로 설치되었다. 타이완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잇으며,중국과 마찰을 빚는 센카쿠 제도가 서쪽에 있다. 대대로 이어오던 류큐琉球 왕국은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72년 해체되었고,1879년 대일본제국의 영토인 오키나와 현으로 명명되었다. 오키나와 현으로서 출발은 황민화 작업의개시로써 오키나와 방언으로 표현하면 '야마톤추(=본토인)' 는 ' 우치나추(=오키나와 인)' 에게 충군애국 의식의 함양부터 철저히 요구했던 것이다. 야마톤추 식의 이름을 강요당한 우치난추는 일본의 '내부 식민지' 였다. -450-
-일본 보수 우파의 목표는 헌법 9조를 개정/개헌이다. 이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시스템과 군사력을 갖추고 독자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잇는 국가가 되겠다는 것이다. (........) 2006년9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 신조' 신임 수상은 소신 표명 연설에서 '하토야마 이치로' 수상 이후 실로 51년 만에 개헌을 언급했고,이듬해 개헌 작업의 전초전인 국민투표법이 국회에서 성립되었다. '보통의 나라' 일본의 건설은 시시각각 현실감을 더해가고 있다. (........)
우리는 근현대 일본사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평화국가 일본이야말로 21세기 동아시아의 평화 공존을 좌우하는 중대한 에너지원임을 절감한다. 100년 전의 동아시아가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의 참화 속에 시달렸던 역사를 떠올린다면 더욱 더. (절감한다.) -458-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