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193.처음읽는 일본사 - 전국 역사교사 모임 지음

최해식 2014. 11. 17. 00:10

-일본은 고대부터 우리와 빈번하게 접촉하고 교류를 해온 나라이다.

일본은 우리와 반목과 대립이 깊어졌는데,그로 인해 서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도 자라났다.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기 잣대로만 판단해 버리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음 을 알기에 무엇보다 먼저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일본의 역사를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지피지기,백전불퇴 라 했다.)

일본에 대한 편견 중 하나는 모방에만 능한 국가라는 오해다. 외국의 사상이난 문물이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역으로 일본도 다른 나라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에도 바쿠후' 시기에는 발전된 문화 역량을 바탕으로 도자기와 그림 등을 해외에 수출하여 유럽 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고대 이래로  현재까지 늘 외국 문화의 수용에 적극적이었으며,외국에서 배운 것을 자신의 사정에 맞춰 응용하며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해 냈다. 이를 가리켜 좋은 것은  받아들여 내것으로 만든다는 뜻의 '이이토고토리' 라고 한다.

일본은 1871년 메이지 유신 신정부 주역들은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성하고, 서양에 파견하여 그들의 군사적,경제적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파악한 뒤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헌법과 의회,민주주의 제도 등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이것들은 다시 동아시아 국가들에도 여향을 미쳐서 이들의 근대화에도 기여했다. 사람들은 이런 일본의 모습에 대해 외국을 베끼는 '모방 능력' 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뛰어난 창조적 능력' 이자  '일본 문화의 저력' 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아무리 좋은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모방만 하다 실패한 사례도 많다. -12~ 13-

 

 

-'쇼토쿠 ' 태자는 덴노 중심의 국가체제를 정비한느 데 온 힘을 다했다. 특히 그가 몸소 실천한, 남의 것이라도 좋다면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이이토코토리(良이토코取리)' 정신 은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유익하고 필요한 것은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이 태도는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 또한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는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 라는 뜻의 '사부라우모노'에서 ㅇㅍ래했다.  나중에 는 '부하를 거느릴고 말을 탈 자격이 있는 상급 무사' 란느 의미로 바뀌었다. -87-. -39-

 

 

-'사무라이(侍)' 는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 라는 뜻의 '사부라우모노'에서 유래했다.  나중에 는 '부하를 거느릴고 말을 탈 자격이 있는 상급 무사'   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87-.

 

-군사적 교류관계에서 살펴보면,일본이 고구려,백제,신라등과 각축을 벌이면서 동아시아 질서의 형성에 적극 참여한 측면들이 발견된다. 백제의 왕자로서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된 동성왕,무령왕을 빼더라도 <삼국사기> 에 실린 신라  '박제상  설화' 를 보면 당시 일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402년 신라왕이 왜와 강화를 한 뒤 왜의 요구에 따라 왕자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신라가 동아시아의 대제국인 고구려와 더불어 왜를 전략적 동반자로 삼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통치자는 광개토대왕이었다. 이는 그만큼 왜의 위상도 만만찮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 이며,왜가 고구려,백제.신라의 항쟁 구도 '밖' 에 있었던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저울추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광개토대왕이 재위하던 전성기의 고구려와 대등하게 왜가 신라를 자국 편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은 삼국 시대에 왜의 국력이 오늘날 우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낮은 수준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일본은 자국 중심의 외교를 지향하며 한반도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려 했다. 8세기 후반에 율령에 통일 신라를 번국(蕃國),즉 제후국으로 표현하는 등의 외교를 펼쳤다가 한반도와 공식 관계가 끊어졌다.

고대 한일 관계를 다룰 때 한국 입장에서 문화 전파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고대 일본의 후진성을 부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도 나름대로 사회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바탕 위에,한반도로부터의 문화 수용이 일본의 발전에 어떤 역할을 했으며,일본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이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꼼꼼히 따져 보는 것이  자세가 아닐까? -89~ 90-

 

 

- 1192년 '겐페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나모토 요리토모' 는 가마쿠라 바쿠후를 성립했다.

1221년 조큐의 난 ; 일본 연호  '조큐 3년에  일어나  '조큐의 난' 이라 불린다. '호조 마사코' 를 중심으로 하는 무사들은  '가마쿠라' 에 집결하여 불과 1개월 만에 교토를 점령했다.  이 사건은 덴노 측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1270년 원을 건국한 쿠빌라이는 고려를 정복했다.

1274년 려(여)원 연합군 2만 3,000명 1차 일본침입.  원나라는 일본이 남송과 무역을 하고 있어 남송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복속시켜려 했다.

1281년 원나라 연합군 14만 명  2차 일본침입.

1333년 가마쿠라 바쿠후 멸망. (원의 침략으로 바쿠후와 고케닌의 반발이 심화되자 유력 '고케닌'인  '아시카가 다카우지' 가 바쿠후를 배반하고 텐노 편에 가담하여  텐노와 바쿠후 두 세력 간의 결전으로 결국 가마쿠라 바쿠후는 최후를 맞았다. )   (*고케닌(御家人) 이란 쇼군에게 충성을 서약한 무사를 말한다. 쇼군은 고케닌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고,영지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지면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대신 고케닌은 바쿠후에 충성을 다한며 바쿠후의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군사력을 제공했다.* )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다이고' 덴노를 가두고 새로운  '고묘' 덴노를 즉위 시켜 그는 쇼군의 지위를 얻어내었다. 

1338년 쇼군에 임명된 '다카우지' 는 교토에  '무로마치' 바쿠후 를 세웠다. (쇼군의 저택이 교토의 무로마치에 있었기 때문에 무로마치 바쿠후란 명칭이 붙었다.)

1336~ 1392년 까지를 '남북조 시대' 라고 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북조의 '고묘'  덴노를 옹립하고 1392년 무로마치 바쿠후의 주도로 남북조가 합쳐진 때까지를 말한다. )   -93~ 108-

1467년 오닌의 난. (8대 쇼군 '이시카가 요시마사' 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요시마사의 동생을 지지하는 호소카와의 동군 과  요시마사의 아들을 지지하는  야마나 의 서군 과의 싸움으로 1477년 11년간 전쟁이 지속되었다가 결국 호소카와 가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센고쿠 시대(戰國時代,1490~ 1590) 의 서곡이 되었다. -129-

1490~ 1590년  戰國時代라고 한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바쿠후 수립.   -172-

1867년 메이지 덴노 즉위 하다. 일청 전쟁과 일러 전쟁 ,한국 병합 등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강력 추진함.

1871년 패번치현,이와쿠라 사절단 출발

1877년 세이난 전쟁

1879년 류큐 복속,오키나와 현으로 편입

1894년 일청전쟁 (~1895)

1904년 일러 전쟁

1910년 한국 병합   -214-

1923년 간토 대지진

1931년 만주 사변

1937년 일중 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1945)

1945년 히로사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투하. 일본 패전 -274-

 

 

 

 

 

 

 

 

-1397년 3대 쇼군 '이시카가 요시미쓰'의 저택이 완성되었다.

요시미쓰는 새로 지은 저택을 한참동안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후 이곳은 연못에  세워진 금으로 장식된 누각 때문에 킨카쿠지
(金閣寺) 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킨카쿠지는 1층은 후지와라 시대의 귀족풍,2층은 가마쿠라 시대의 주택 양식,3층은 당나라의  불교양식으로 꾸며졌다.  

1482년, 8대 쇼군 '이시카가 요시마사'가 긴카쿠지(銀閣寺)를 지었다.긴카쿠지는 은은하고 소박한 분위기를 풍겼다.긴카쿠지는 실제로 은을 입힌 것이 아니라 겨울 눈 속에 비친 누각의 모습이 은을 칠한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시대 '무로마치 바쿠후'의 무사들도 화려함보자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귀하게 여겼다. 이끼 낀 돌과 흰모래만으로 장식한 긴카쿠지의 정원은 은은 한 정취를 자아낸다.  -120-

 

 

-'요시미쓰' 가 킨카쿠지를 지었다. 반면 '요시마사'는 긴카쿠지를 지었다.  이들 두 사람의 상반된 성격이 건축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킨카쿠지가 권력을 향해 치닫는 욕망을 표현한 화려함의 절정이라면,긴카쿠지는 권력과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은둔의 공간이었다. -122-

 

 

- 일본에서 무사는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문무를 겸비해 나랏일을 꾸리는   조선의 양반과 같은 사회 지도층이었다. -132-

 

- 戰國時代 3人의 영웅 ;

오다 노부나가 ; 새에게 울라고 명령한 다음,새가 울지 않자 "울지 않는 새는 새가 아니다! " 라며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 버렸다. =勇將

도요토미 히데요시 : 새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새를 놀라게  하는 등 갖은 꾀를  써서 기어이 울게  했다.  =智將

도쿠가와 이에야스 :  "네가 언젠가는 울겠지. "  하며 새장 밑에 드러누워 새가 스스로 울 때까지 기다렸다.  =德將  -137-

 

-오다 노부나가가 쌀을 씻고,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불을 지펴 익힌 천하라는 밥, 힘 안 들이고 먹은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라네. -139-

 

 

- "누구냐? 내 신을 이렇게 따뜻하게  해 놓은 자가? "

"접니다. 주군. "

노부나가느 자신의 신발을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데운 부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히데요시는 이처럼 노부나가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며 그의 신임을 얻디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은 운만이 아니라 노력의 결실이가도 했다.  -148-

 

 

-조선통신사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10년 만에 쓰시마 번을 통해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요청해 왔다. 이리하여 사신을 파견했는데 

1636~ 1811년 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됐다. (......)

당시 조선은 유교 국가로  과거사험을 봐야 관리가 될 수 잇엇고,고급 관리가 되려면 글씨가 뛰어나야 했다. 반면에 일본은 고급 관리 자리에 유학자 대신 무를 중시하는 사무라이들을 채용했고 글에 능숙한 유학자나 승려는 권력자의 조언자 역활이었다, 여기에는 일본이 유학의 본고장인 중국과 멀었을 뿐만 아니라 쇼군을 비롯한 번주,그리고 고급 관리들이 세습직이라는 점도 한몫을 했다. -208~ 210-

 

-적봉환 공포 ;

1869년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판적봉환을 발표했다. 즉 토지와 백성을 덴노에게 반환한다" 고 발표했다.  " 모든 토지와 백성은 덴노가 지배한다" 는 원칙이 1000여 년 만에 다시 부활한 것이다.

폐번치현 공포 :

1871년 신정부는 덴노의 군대 1만여 명이 도쿄를 에워싸고 번주들을 위협하여  봉건적 제도인 번을 해체하고 현으로 바꾸었다  그 후 통페합이 계속되어 1都,1道,2府,43縣이라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번이 폐지되면서  신정부는 군사와 세금 징수의 권한을 모두 장악하게 되엇다. 이들 '판적봉환' 과  '폐번치현' 의 정책들을 실시하여  사스마 번과 조슈 번의 하급 무사들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신정부중앙 집권화 를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232~ 234-

 

 

- "후쿠자와 유키치"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서구 열강에 의해 비참한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그들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며 국민 계몽에 힘썼고 나아가 먼저 근대화를 완수한 일본이 아시아를 선도하고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도했다.-246-

 

 

 

-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 은 1872년에 간행되어 근대화의 길목에 선 일본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제시한  책이었다,이 책은 300만 부 이상이 팔리면서 10명 중 한 명 꼴로 읽은 베스트셀러가 됐다.-271-

 

 

-반외세 운동의 하나였던 5.4 운동이후 결성된 중국 국민당은 군벌을 제압하고 통일된 중국을 만들기 위해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국공 합작의 시작이었다(1924). 그리고 국민당의 장제스가 전국 통일에 나서기 위해 북벌을 단행하고 차례차례 군벌들을 제압했다. (.......)

그리고 북벌이 끝나자 국민당의 장제스는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國共 內戰의 시작이었다.  국민당은 공산당의 군대인 홍군을 토벌하는 데 열중했다.

1936년,장제스는 시안으로 향하면서 장쉐량에게 홍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쉐량은 반대로 장제스를 체포하고 모든 내전을 중지할 것을 호소했다(시안 사건).

장쉐량의 요청을 받고 시안으로 급히 달려온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 는 장제스에게 내전을 멈추고 항일운동을 함게하자고 설득했다.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을 계속 공격하는 일이 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37년,중국 공산당은 항일 운동을 위해 혁명 노선을 포기했고 국민당도 중국 공산당의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제2차 국공 합작이 성립하면서 중국은 전 국민적인 항일 운동에 돌입했다. -306~ 309-

 

 

-1946년,연합국 총사령부는 일본의 전쟁 범죄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도쿄에서 전범 재판을 열었다(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전범 재판은 A급 범죄자를 처리하는 재판이었고,전 수상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7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B, C급 전범  재판 은 미국,영국,중국,필리핀 등 9개국에서 열렸다. B, C급 전범 가운데는 300여 명의 조선인과 타이완인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동남아시아에서 포로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었느데,포로 학대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330-

 

 

- 일본의 거품 경제 :

일본은 1974년부터 1976년까지 경제 성장이 주춤하자,일본은 부가 가치가 낮고 공해가 많이 발생하는 철강,화학 분야를 한국 등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기술 집약적 첨단 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고도화함으로써 1970년대 말에는 불황를 극복하고 완만하고 안정적인 성장 추세를 회복했다.

1980년대 말경에 이르러 일본 경제는 세계 1위인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절정에 달했다. (........) 1980년대 중반,재정과 무역 부문에서 심각한 적자로 고생하던 미국은 달러에 대한 엔화 가치를 올릴 것을 일본에 강력히 요구했고,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그 결과 일본 상품의 가격이 상승하면서 해외 시장에서 일본의 경쟁력이 약해졌다. 이에 일본 정부는 저금리 정책을 폈고,금리가 낮아지자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고,사람들은 쉽게 대출을 받아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다. 사회 전반에 투기 심리가 만연했고,무분별한 주식 투자와 부동산 구입은 당시 일본 사회에  유행처럼 번졌다. 경제 호황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투기에 나섰다. 너도나도 땅과 집을사고,공장을 지었다.돈이 토지와 주식으로 흘러 들어가 땅값과 주가는 전례 없이 폭등했고 투기가 과열했다. 기업들은 해외로까지 진출해 미국의 고층 빌딩과 회사 들을 사들였다.

세계는 이런 일본을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봤지만,거품은 곧 꺼졌다.

1991년에 이르러 일본의 호황은 주춤하더니 1992년 하반기에는 국민

총생산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대출을 받아 샀던 땅과 주식의 가격이 연일 폭락했다. 수입이줄자,소비가 줄고,공장이 멈추고  실업자가 늘어났다.  수입이 감소되면서 다시 소비가 주는 악순환이 10년 넘게 지속됐다. 경제성장률이 10여 년간 0에 가까웠던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10년' 이라 부른다.

거품 경제가 붕괴된 이후 일본의 불황은 심각했다. 많은 공장이 인건비가 싼 해외로 빠져나갔고,금융 기관들의 대출 정지, 기업들의 경영 합리화를 위한 '구조 조정' 이 일반화됐다.오랫동안 일본 사회를 지탱해 온 종신 고용의 종말이었다. -360~ 363-

 

 

 

 

-일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가 집단주의이다.

바쿠후의 통치아래 점차 사회 조직이 집단화 되면서 구성원들은 집단에서 쫓겨나지 않고 계속 그 안에서 보호를 받기 위해 분투했다. 지금도 직장을 평생 일터로 생각하며 어쩌다 해고라도 되면 2등 인생으로 전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전통 때문이다. 집단주의적 태도는 화합을 중시하고 책임을 서로 분담하는 문화로도 이어졌다.(....) 종신 고용제와 부모가 퇴직한 뒤에도 자녀를 우대해 채용하는 회사까지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960년대에 시작한 고도성장은 일본을 선진국 대열에 우뚝 서게 했으며,이후 세계 각국은 일본에  시찰단을 파견하여 그들의 성공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 일본은 1871년 메이지 유신 신정부 지도자들은 100여 명의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성 하여 유럽과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서양과 같은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2년 동안 미국을 거쳐 유럽 곳곳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 .

이렇듯 일본의 역사를 알아가는 것 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으로 보아 오던 것을 넘어서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종군 위안부 문제,독도 영유권 문제,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은 문제 등 두 나라 사이에 풀어야 할 숙제는 남아 있지만 활발해진 교류나 시민 단체 간의 연대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379~ 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