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4/ 영어 조선을 깨우다 - 김영철 지음
-조선 해안에 나타나 처음으로 교역 요구한 최초 서양선 로드 암허스트호는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으로 중국과 조선,오키나와, 대만 등의통상에 적당한 항구등을 조사하기 위해 1832년 극동지방에 파견한 1000톤 급 함선이었다. -57-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2년 영국 여행 도중 런던의 한 호텔에서 중국학자를 만나 두 나라의 서양어 수준에 ㄷ 관해 이야기르 나눴다. 대화록에 따르면 당시 중국에는 11명, 일본에는 500명의 외국어 구사 능력자가 있엇다. 이 여행 후 후쿠자와는 네덜란드어 보다 영어가 세계어로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세운 蘭學塾난학숙을 영학숙으로 바꿨다. 1863년의 일이다. 바로 게이오의숙의 전신이다. -128-
- 조선은 일본의 문물을 조사하여 그수준을 확인하기 위해 1차 수신사를 파견뒤 4년만인 1880년 제2차 수신사 일행을 일본에 파견햇다. 예조참판 김홍집을 수신사로 한 58명은 1880년 6.26일 부산을 떠나 7.6일 도쿄에 도착했다. 이전 수신사들의 일본 방문 목적이 詩文을 뽐내기 위해서였다면 김홍집 일행은 겉으로는 일본 사절의 방문에 대한 답례를 표방했지만, 실제론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과 일본의 문물 수준을 파악하려는 분명한 '정보수집'의목표를 갖고 떠난 것이다. -162-
-주일 청국 공사 '허루장何如璋' 이 쓴 [조선책략]은 조선의 대외관계뿐만 아니라 인재양성이란 측면에서도 조선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친중,결일.연미'의 외교방책이었다.....그러나 당시 [조선책략]에 따른 개화정책에 대한 반동도 만만치 않았다. 조정이 개화정책을 잇달아 취하자 이에 반대한 유생들인 1881년 2월 영남유생를 시작으로, 만인소를 올리며 격렬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170-
-개화의 대세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엇다. 고종은 밀사를 파견해 '연미책'을 강구하는 한편, 서구의 앞선 문물을 배우기 위해 시찰단 파견을 강행했다. 바로 朝士조사시찰단과 영선사의 파견이다.
영선사 파견은 이홍장의 권유로 [조선책략]이 전해지기 전인 1880년4월부터 논의되어 왔던 것이고, 조선책략이 전해해진 뒤 1881년 1월에는 일본에 朝士조사시찰단= 과거 신사유람단. 파견을 결정했다. 조사시찰단은 일본 문물을 배우러 간다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문물을 배우려고 대규모 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한 일은 조선 500년 역사상 처음이엇다. 그러나 이제 일본이 조선을 앞선 선진국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173-
-조사시찰단 파견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고종은 반대파의 눈을 속이기 위해 바로 朝士조사를 '동래부 암행어사'로 발령하여 일본에 파견하였다. .......수구파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동래부의 민정시찰을 위한 암행어사로 임명하느 형식을 취하고, 실제로는 실제로는 고종의 비밀명령에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국정을 조사했다.는 것이다. [조선책략]의 권고대로 조미수교에 대비한 조사와 신문물을 배우기 위한 유학생 파견 등의 임무가 맡견진 조사시찰단의 수행원 27명 가운데는 조선 최초의 관비 유학생인 유길준 윤치호 유정수 김양한 손붕구 등이 포함돼 있었다. -174-
-일본은 幕府막부말기부터 1868년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6차례 서구 국가에 사절단을 파견햇다. 1860년 80명의 사절이 미국에, 1862년 38명의 사절이 유럽 국가를 순방했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쓰마와 조슈도 이 시기에 영국 유학생을 밀파했다.
사절단 가운데 후쿠자와 유키치의 활동은 군계일학으로 전해진다. 기차를 처음 본 동료들이 감탄하며 기차의 속도와 크기, 레일의 폭과 높이를 측정해 일기에 기록하고있을 때, 유키치는 철도회사의 구성과 경영법,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 철도 분할 지배 같은 데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문을 꽁꽁 걸어 닫고 있을 때다.
메이지시대에도 대규모로 사절단을 해외에 파견했다. 이른바 이와쿠라사절단이다. 이들은 1871년11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1년 10개월 동안 구미 선진국을 공식 방문햇다. 이들 사절은 돌아와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일본을 이끈 것은 물론, 이와쿠라사절단이 귀한한 지 4년 만에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 개국(=강화도조약 1876년 ) 됐다. 이들 서양문명을 체험한 인물들이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음은 물론이다. 이들을 통해 일본은 발 빠르게 새로운 서양문물에 적응했고, 19세기 하반기의 이 시기 몇 십 년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222-
출전 ; 강화도조약 https://kibaek.tistory.com/189
-.........-365- 끝.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