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775/ 조조, 제갈량 - 윤태옥 지음

최해식 2019. 1. 20. 18:33

- 부모가 자식을 여행길로 떠밀지 않으면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고, 자식의 여행을 허락하지 않으면 자식을 망치는 것이다. 스스로 여행을 꿈꾸지 않으면 꿈이 없는 것이고, 꿈꾼 여행길에 나서지 않는 것은 꿈을 버리는 것이다. -5-


-중원 문명 변천사 ;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 시황과 한 유방이 통일왕조로 이끌었다.  그러나 전쟁광인 한 무제가 40년 전쟁으로 국고를 탕진하면서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중원의 망조는 왕망의 신나라가 나와 헛발질을 해대면서 더욱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에 중원을 되살리려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구원투수가 바로 조조다.

이에 맞서 제갈량이 유비와 손권의 연합을 이끌어냈다.  이들 연합군은 적벽대전에서의 승리로 조조의 상승세를 꺾어버렸다.  적벽전에서 주춤한 조조는 천하 통일의 기회를 잃고, 그 후대는 사기꾼 사마의가 말아먹어 결국 晉나라로 교체됐다.  그 후 晉나라는  친족,곧 사마씨끼리 치고받고 하여 自滅했다.  晉나라의 뒤를 이어 송.제.양.진이라는남조의 4나라도  더 이상 역사를 앞으로 밀어가지 못하고 퇴행으로 일관하다 결국 탁발선비의 수.당제국에 먹혀버렸다. -7-

*** 타인의 글 ; 출전 ;  http://blog.daum.net/skjang/6758493

" 분열의 역사는 실제로는 위, 촉, 오 삼국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한 서기 2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한에 의해 한제국의 맥이 계승됐지만, 후한의 황실도 농민운동인 黃巾賊(황건적)의 난으로 급격히 쇠퇴했다. 삼국정립의 분열상황은 司馬(사마) 가문의 晉(진)(265-316) 또는 西晉(서진)에 의해 일시적이나마 해소됐으나 291년부터 306년까지 무려 16년에 걸친 「8왕의 난」으로 중국은 다시 분열의 시대에 접어 들었다. 더욱이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남방진출을 한층 더 가속화시켜 마침내 흉노족이 304년 수도 洛陽(낙양)을 격파하고 晉(진)의 황제를 포로로 삼자 晉(진)의 통일제국은 막을 내렸다.  "



- 중국의 삼국시대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망해가는 시기에 각 지역의 군벌이 들고 일어났다가 조조,손권,유비라는 세 군벌로 압축되고, 이어서 한나라 황실을 폐한 뒤 각각 위.오, 촉 3국으로 재편되어 패권을 놓고 쟁투를 벌인 시대' 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시기로 보면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꼭두각시로 세운 기원후 189년부터 위나라를 집어삼킨 晉나라가 오나라를 정벌한 280년까지 90여 년 동안이다.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 전에 벌어진 이 시대의 여러 사건을 '역사'로 기록한 것이 진수의 [삼국지]로, 중국에서 正史로 인정받고 있다. -16-


- 기원전 202년,항우와의 대결에서 역전승을 거둔 유방은 진나라의 껍데기를 한나라로 뒤집고 황제 자리를 접수한다. .......쿠데타에 성공하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서 안팎에 과시해야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기원전200년,유방이 친히 북쪽의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묵돌선우에게 반격을 당해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버린다. 잽싸게 도망친 유방은 사신을 보내 묵돌선우에게 화친조약을 맺는데 이것이 곧 '백등산의 굴욕' 이다. -29-


-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왕망의 신나라가 중간에 끼어 있어서 그렇다.  기원후 8년부터 23년까지 15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 기간은 신나라였다. 그러나 황족인 지방 호족 유수가 군을 일으켜 왕망을 무너뜨린 뒤 황제 자리에 올랐고, 그때부터 후한시대가 되엇다.-33-


- 황건적은 중원 문명이 몰락하고 황실과 관료의 부패가 극에 달하자 더 이상 땅에 붙어 살 수 없게 되어 울면서 농토를 버리고 떠난 유민들이다. ........조조는 능력을 기준으로 유능한 인재를 모아들였다.  조조는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는 '求賢令'을 세 번이나 내렸다. 그결과  조조 진영에는 수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다. .......능력 위주로 인력을 충원하는 시스템은 구성원에게 희망의 비전이 되고, 그 자체로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34-


- 제2대 황제 혜제가 즉위한 290년부터 306년까지 16년동안, 황실의 여덟 왕은 각각의 무장과 처가와 외가뿐 아니라 서방과 북방의 이민족 군대까지 용병으로 끌어들여 처절한 동족 살육의 싸움판을 벌였으니, 이것이 바로 '八王의 난'이다. 그리고 여덟 왕이 끌어온 북방 민족의 용병이 중원에 눌러앉아 세상를  휘저으니.  이들이 바로 5호16국이다.-37-


-노동의 대가는 작은 수익이지만, 낭만의 대가는 과도한 지출이다-39-


-역사는 두발자전거와 같아서 계속 굴러야 넘어지지 않는다.  멈춰 서는 순간 전복되고 만다.  강남의 낭만은 비록 귀족적인 화려한 멋은 있으나 멈춰 선 자전거와 같이 옆으로 자빠져버렸다. -41-


- 조조라는 캐릭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웃음'이다.  유비는 툭하면 우는 데 반해 조조는 언제나 웃는다. 허소가 '난세의 간웅' 이라고 했을 때에도 그는 웃음을 터뜨렸고, 왕윤이 동탁에게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을 때에도 拍掌大笑했다. -47-


- 오늘날 하남성의 허창은 담배와 도자기로 유명하다. 또 도로가 쌀 米 자 형태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하다. 그러나 허창은 뭐니뭐니해도 위나라의 수도이자 삼국 문화의 중심도시다. ........208년 북방을 정벌한 뒤 조조는 승상이 된다.  최고 관리인 三公보다 높은 벼슬, 게다가 황제까지 마음대로 휘두르는 상황이다. 지금의 曹丞相府조승상부.는 조조가 직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60-


- 조조는 175년 당시 관리 등용 제도인 '효렴'에 의해 21살의 나이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사실은 효렴 제도란, 권력을 쥔 들끼리 관직을 독점해서 나눠 먹는 제도일 뿐이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1억전을 내고 '태위'라는 고위관직을 산 것처럼, 조조 역시 능력과 상관없이 출신 성분과 가문의 힘으로 세상에 첫발을 내딛었다. -63-


- 썩은 정권에서 관직은 '짚불에 날아가는 검불일 뿐' 이란 생각에 조조는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64-


-196년.조조는 둔전제를 실시한다. 둔전제는 국가의 농토를 농민에게 나눠주고 산출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제도다.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사회적.경제적 환경을 개혁한 것이야말로 조조의 중요한 치적이다. -67-


- 조조는 비록 적장이라 할지라도 능력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기용했다. 그의 수하에서 활약한 장요,악진,우금,장합,서황등 내노라하는 장수 중에 조조가 처음 발굴한 장수는 악진 한 명뿐,나머지는 모두 적군 출신이란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74-


- 중국 하남성 평야, 그 너른 땅이 모두 논과 밭이다. 멀리서 찾아온 길손에게 무엇 하나 보여줄 만한 게 없는 그저 그런곳.

그러나 그 논밭 어딘가에 사람이 나고 살고 죽은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잇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과 자연과 꿈과 슬픔이 어우러져 희뿌연 연무로 사라진다.  산이 없어 밭 한가운데 땅을 파고 무덤을 만든 사람들. 누군가 죽었고 누군가는 묻힐 곳을 만들어주고, 또 누군가는 떠난 사람을 보내려는 순간이다. -105-


-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 중에 당신은 어떤 캐릭터에 가까운가?

조조,유비,손권,관우,장비,여포,조자룡.....[소설 삼국지] 속 무수한 인물이 저마다 뚜렷한 성격과 운명,재능가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에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들은 인상적인 대답은 이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관도전이나 적벽전 같은 전투에서 공적도,흔적도 없이 전사한 무명의 병졸인 것 같소." -107-


- 헌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촉한에 전해지자 유비는 곧 민제라는 시호를 올리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사실 헌제는 멀쩡히 살아 있었는데........유비가 정말로 한나라 황실을 부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어떡하든 황실의 핏줄을 찾아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적어도 평생 그토록 대의 를 부르짖은 유비라면 말이다. 유비는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간교한 출세주의자임이 틀림없다. -111-


- 조조는 일찍이 아들들을 전쟁터와 관직에 내보내 OJT(On Job Training)을 시켜,서로 치열한 경쟁을 한도록 유도했다. 자식들이 실용적인 지식과 지혜를 몸소 터득할 수 있도록 꾸준히 최선의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자식은 아낄수록 유약해지기 때문에  거친 세상에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이것이 조조의 교육관이자 후계자 양성의 원칙이다. -133-


- 오래도록 이 자리에 남아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느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보스는 그를  언제 자르고 누구를 그 자리에 승진시킬지 고민하게 된다.  반면 이 자리를 누구에게 물려줄지 고민하면, 그의 보스는 그를   언제 자를지가 아니라 어떤 자리로 승진시킬지 고민하게 된다.     유능한 리더는 '언제 어떻게  떠날지' 항상 구상하고 준비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135-


- 서안의 고대 성벽 ;

중국에서 내성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 바로 서안이다.  서안에서는 城壁성벽.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다.   도시가 형성되면 방어를 위해 성곽으로 둘러싼다. 이때 안쪽에 쌓은 성벽을 城이라 하고, 성의 바깥쪽으로 멀리 둘러싼 것을 郭곽이라 한다. 쉽게 말하면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하는 셈이다. 서안에 가면 성벽을 꼭 걸어봐야 한다. 이 성벽은 명나라 홍무제 시절 1374~1378까지 새로 지은 것이니 500년이 넘었다. -153-


- 역사적 사실에 소설적 허구와 상상력을 보태 [삼국지]가 탄생한 것처럼 [서유기]도 현장법사라는 실존 인물에 허구와 상상력을 버무린 걸작이다. -184-


- 한중은 촉한을 치기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길목이다. -194-


- 잔머리 잘굴리는 군대일수록 밋밋하고 진득하게 상대하는 게 상책이다.  결국 지구전에 끌려다니던 제갈량은 과로사하고 만다.  사마의가 던진 지구전의 '시간폭탄' 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마의는 제갈량을 넘어서는 책략과 지혜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느긋한 지구전'으로 '신출귀몰 제갈량'을 서서히 쓰러뜨린 셈이다. -205-


- 진나라는 사마씨의 집안싸움으로 암살,독살이 횡행하고 서로 분열되어 싸우다 결국 사마씨 가는 두어 명만 남고 깡그리 죽어났다. 이것이 바로 '8왕의 난'이다. 사마 성을 가진 어덟 왕이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다 몰살한 것이다.  한나라는 조씨가 폐하고,조씨의 위나라는 사마씨가 엎어버리고, 사마씨의 진나라는 사마씨에 의해 자폭하고 말았다.-206-


- 검문관 ;

이곳 외에는 달리 우회할 만한 길이 업는 데다 좁은 통로 하나만 뚫려 잇다.  소수 병력으로 대군을 저지할 수 있는 천혜의 지형 조건ㅇ를 갖추엇다. 그래서 예로부터 검문관을 두고 '한 사람이 지키면 만 명을 막아낸다.' 고 했다.[一夫當關 萬夫莫開일부당관 만부막개] -214-


- [삼국지]가 배출한 천재로 와룡과 봉추가 있다. 와룡,즉 엎드리린 용은 제갈량, '어린 봉황' 봉추은 방통의 별명이다.  -219-


- 황건적은 황제를 비롯한 기득권층 입장에서 볼 때만 '적'이고, '난'이었지 그 내용은 농민반란,즉 민중봉기였다. 권력의 무능과 부패가 극에 달해 농민이 죄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들고 있어난 것이 황건적의 난이다. -230-


- 도원결의 삼형제의 인생마무리는 아쉽기만 하다.

관우는 오만이 흘러넘쳐 동맹국과 갈등을 일으킨 결과 오나라에 옆구리를 공격당해 목이 잘렸고,    무리하게 관우의 복수를 독려하던 장비는 제 침상에서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황제인 유비는 촉.오 연합이라는 국가 전략도 파기한 채 국력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전쟁을 벌이다 애송이로 여긴 오나라 육손에게 대패한 뒤 굴욕적인 철군과 病死로 이어지는 씁쓸한 최후를 보여준다. 이들 세 사람 모두 죽음의 모양새 자체는 처음 출발한 '시장통 똘마니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232-


- 역사는 어제의 어제. 또 그 어제의 어제가 차곡차곡 쌓인 채 소리 없이 아우성칠 뿐이지만  오늘은 그저 오늘일 뿐이다. 골목길에는 골목길의 오늘이 있고,길가의 들꽃도 오늘의 빛을 열심히 발하고 있다.-233-


-..........-238-끝.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