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767/원균 그리고 이순신 - 이은식 지음

최해식 2018. 12. 30. 17:48

- 임진년 4월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 수군의 4백여 척의 병선과 7천여 명의 훈련된 병사를 가진 일본 수군이 전라도 방면으로 西進을 못학 부산포에 발이 묶여 있었던 것은 '미쳤다' 라고 할 정도로 용전분투한 원균 공의 힘이 컸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0-


- 원균 公이 칠천량에서 패전하여 전사하자 선조는 칠천량 패전의 책임을 公에게 묻지 않고, 오히려 해전의 특수성과 왜적의 포진 상황을  외면한 채 출전을 강요하여 공을 불러 곤장을 친 도원수 權慄 장군에게 돌려 책망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12-


- 조선과는 달리 전쟁이 끝난 이후 일본의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그림, 서적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빼앗아 갔다. 이때 포로로 데려간 활자 인쇄공을 통해 인쇄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한 조선에서 데려간 도공들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 문화 또한 발달시켰다.-62-


- 부산 동래는 원균 자신이 관할하는 경상 우수영이 아닌 경상 좌수영 박홍의 관할이었다.  그러나 그 땅 또한  조국의 땅이기에 "각기 지키는 한계가 다르다 하더라도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다르지 않다" 라고 하는 원균의 주장과  "각기 지키는 한계가  다르다" 라고 하는 이순신의 생각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할 것이다. -71-


- 임진왜란 초기에 원균이 만여 명의 수군을 해산시켰다는 말은 모순된 것으로 보여진다. 가령 배를 가라앉히자면 50명에 배 한 척이라고 가정했을 때 1만 명이면 배 2백 척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전쟁터에서 적과 싸우는 시간보다 그 2백 척 배의 바닥에 구멍을 뚫는다면 무엇보다 시간과 인원이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균이 수군을 해산시키고자 하는 의사가 있었다 라는 것은 근거가 전혀 없는 대목이다. -79-


- 원균이 원병을 청하자 이순신이 "각기 지키는 구역이 다르다" 고 하여 움직이지 않자 광양 현감 어영담과 순천부사 권준이 출동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였고, 녹도 만호 정운이 이순신을 칼로 베려고까지 하였다. 이순신은 그제야 비로소 출동하여 5월7일에 옥포 해전을 치르게 됐다는 기록도 있다. -142-


-이순신이 출동하기까지 원균이 5~6차례나 이영남을 시켜 원병을 요청하여도 출동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이 사정을 조정으로 장계하여 조정에서 지원하도록 이순신에게 명령하였고, 출전하지 않으려는 이순싱에게 녹도 만호 정운이 칼을 들이멸며 협박하고 나서야 비로소 출동하였으며, 원균이 최초로 원병을 요청한 후 무려 20여 일의 시일이 흘러서야 이순신이 출동하였다. -243-


- 경상 좌수영과 우수영의 경계는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 좌수사 박홍은 다대포, 부산 해운대와 울산 등지를 관장하였고, 원균은 낙동강 하구에서 전라도 경계까지 경상 우수영을 관할하였으며,  그 본영은 거제의 '오아포' 이다. -153-


- 우리 수군의 동태가 낱낱이 적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는 가운데 쳐들어간다는 것은 패배를 예측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권율은 원균에게 출전을 불같이 독촉하였다. 이런가운데 경상 우수사 배설이 한 말을 [선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비록 군율에 의해서 내가  홀로 죽음을 당할지언정 어찌 군졸들을 사지로 끌고 갈 것인가." -196-


-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고 오직 하나의 사실만이 있을 뿐이므로 원통하지만 만약이란 가정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르나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밝힐 수 있는 거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판단해 볼 수 잇을 것이다. -231-


- 거제에 도착하니 우선 코끝을 파고드는 풋풋한 바다 냄새 사이로 점점이 자리 잡은  크고 작은 섬들이  나그네의 눈을  멈추게 하였다.  과연 이 땅, 이 바다는 지나간 슬픔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까.  이렇게 평화롭게만 보이는 땅에 붉은 피와 한을 토하고 사라진 선령들의 한 맺힌 역사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後世인 우리들은 풍요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겠지만 세상 모든 일에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이 바다와 땅을 지키기 위해 신이 준 하나뿐인 생명을 草芥초개같이 내던진 선현들이 계셨기에 오늘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 같다. -253-


-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어서는 원균이 재삼 장계를 올려 부산 앞바다에 들어가 토벌할 수 없는 상황을  극력 進達진달했으나, 비변사가 독촉하고 원수가 윽박지르자 원균은 반드시 패전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진을 떠나 왜적을 공격하다가 드디어 전군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순국하고 말았다. 당나라 때 가서한이 가슴을 치면서 潼關동관을 나섰다가 마침내 적에게 패전하게 되었고,  송나라 때 양무적이 潘美반미의 위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싸우러 나갔다가   적에게  섬멸된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364-


-...........-367-끝.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