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5/일본견문록 - 신유한 지음,강혜선 옮김
- (출전) ; 海遊錄 원문 http://blog.naver.com/rururufu/220661361750
-조선통신사의 여정;
서울>죽산>문경>고령>부산>사스나>이즈하라>이키>아이노시마>시모노세키>가미노세키>도모노우라>우시마도>무로쓰>효고>오사카>요도가와>교토>비와湖>히코네>나고야>오카자키>하마마쓰>시즈오카>미시마>하코네>오다와라>시나가와>에도.
-근대 이전 중국 기행문의 대표작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라면,일본 기행문의 대표작은 단연코 신유한의 [해유록]을 꼽을 수 있으리라. 그 이유는 풍부한 내용과 다채로운 서술로 18세기 초 일본을 생생하게 형상화해 놓았기 때문이다. -4-
- 통신사행은 조선과 일본 양국의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교류되는 장이었다. 임술사행1682, 신묘사행1711, 기해사행1719,무진사행1748,계미사행1763의 시기는 청조의 패권 확립,일본 국가권력의 안정, 조선 정국의 안정 등 朝中日 동아시아 3국이 안정을 유지하던 시기였다. -11-
- 海遊錄의 저자 신유한은 밀양 출신의 문인으로 신분은 서얼이었다. 1681년(숙종7년)밀양의 죽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술관으로 1719년4월11일 벗들의 전송을 받으며 도성을 떠나다.-13-
"< 1719년4월11일 都城출발, 6월20일 부산출발,6월21일 대마도 사스우라도착, 6월24일 니시도마리우라西泊浦도착(니시도마리우라의 西福寺는 통신사행이 통상 머물렀던 곳이다.), 6월27일 이즈하라 도착,~~ 1720년1월2일 서박포에 도착,1월6일 한밤중에 부산영가대에 도착,1월8일부산출발,1월11일 高靈고령 부모님 宅도착, 1720년1월24일 서울에 들어가서 왕께 복명함. 이리하여 통신사의 여정이 끝이 났다.>"
-서얼 출신의 신유한이 불편한 마음으로 수락한 제술관이지만, 그는 "낮은 언덕이라 소나무와 잣나무가 없으리라 깔보지 말라" (=작은 나라에 인재가 없다는 뜻이다.) 는 學士 崔昌大의 충고를 마음에 새기면서 일본행을 준비하였다. -15-
- 갈 때는 푸른 유자나무 숲을 보며 갔는데, 돌아올 때는 황금빛 밀감이 익어 가고 있었다. 새빨갛게 단풍이 든 상근령을 넘어서 광주리에 가득한 밀감을 먹으며 수많은 시를 지으며 돌아가는 길. "인생의 엷은 인연이 바로 阿閃國아섬국이 한번 나타나는 것 같이" 느껴지는 일본 여행이었다. -20-
- 임진왜란후 德川도쿠가와 막부는 국내외에 정권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武威무위와 천황의 존재를 華화로 설정하고, 주변의 나라가 그것에 복속한다는 소위 일본형 華夷意識화이의식에 의해 대외관계를 재편성해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속에서 일본인이 조선을 보는 관점도 양면적일 수밖에 없엇다. 이는 일본형 화이의식에 바탕을 두고 조선을 멸시하는 관점도 생겨났다. 특히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중국과의 직접 교류로 인하여 양명학,국학, 난학이 상대적으로 발전하는 변화 속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 전통적인 朝鮮藩國觀조선번국관이 되살아났다. -22-
- 신유한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한 것이 바로 출판문화였다. 중국의 책은 물론이려니와 조선의 책까지 모두 구비해놓은 서점의 규모며, 통신사행 도중에 쓴 자신의 시문이 돌아오는 길에 출판되어 있는 놀라운 속도의 출판시장. 이는 경제적.문화적 충격이었다. -25-
-[해유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단연 대마도 기실 우삼방주=아메노모리 호슈 이다. 그는 1689년 22세 때 '기노시타 준안'의 추천으로 대마도의 관직을 받은이래 대마도의 외교관으로 30년 동안 조선과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였다. 우삼방주=아메노모리 호슈는 일본 최초의 조선어 학습서인 [교린수지]를 저술하였다. -35-
- 學士 崔昌大에게 전송하는 글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49-
- 성몽량은 직분이 서기인데, 언제나 남보다 앞서 시를 짓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성몽량은 운을 부르기가 바쁘게 대꾸하여 마치 북채로 북을 치면 소리가 나듯 하였다 한다. -56-
- 통신사행이 아무 탈 없이 바다를 건너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ㅇㄹ올렸던 곳이 영가대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권반이 부산진성 근처에 선착장을 만들면서 생긴 언덕에 정자를 지었는데 권반의 고향인 안동의 옛 이름 '영가'를 따서 이곳을 영가대라 부르게 되었다. -74-
- 왜관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강화교섭이 진행되던 1601년 두모포에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두모포왜관이 비좁아 1657년 초량왜관(=용두산 공원 부근)으로 이전하였다. 대마도에서 온 일행이 여러 날 머물며 출발을 준비한 곳이 바로 초량왜관이다. -78-
- 산수의 가치는 산수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이를 만날 때 이름을 전하는 법이다. -102-
- 대마도 府中의 사신 숙소, 西山寺 ;
使館의 이름은 西山寺, 인데 이 나라 풍속은 현판이 없고, 公館은 모두 寺라 칭하였다. ......신유한이 머물렀던 서산사는 옛날의 모습 그대로 지금도 이즈하라에 남아 있으며, 현재 일부 공간은 여행객을 위한 숙소로 제공되고 있다. .(출전 ; 세이잔지 료칸 http://eomjunjun.blog.me/221375597089 ).. ....."스키야키" 는 옛적에 여러 왜인들이 삼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던 중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생각하다가 각기 가진 바 재료를 가지고 한 그릇에 집어넣어 삼목을 가지고 불을 때어 달였는 데 그맛이 매우 좋았으므로 杉煮삼자, 스키야키라 하였다. -109-
- 雨森芳州우삼방주라 불리기도 하는 우삼동, 곧 아메노모리 호슈는 대마도의 관료로 조선어 통사=역관의 양성과 교육을 담당하던 사람이다. 그는 조선어 학습서인 [교린수지]를 저술하였고 대마도의 외교관으로 30년 동안 조선과의 외교업무를 담당하였다. . -122-
- 허리의 푸른 절벽이 바다에 꽃혀 있는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 물결에 ㄸㄹ어지려 하였다. 솔바람이 또한 일어나 구름과 물과 더불어 서로 화답하였다. -181-
- 도쿠가와 막부는 국내외에 정권이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무위와 천황의 존재를 華로 설정하고, 주변의 나라가 그것에 복속한다는 소위 일본형 華夷意識에 의해 대외관계를 재편성해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ㅇ서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를 정복하고, 조선의 사절을 초빙하여 복속사절로 둔갑시키기도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ㅇㅁ임진왜란이후 조선ㅇ 대한 문화적 존숭감이 증대되었는가 하면 ,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형 화이의식에 바탕을 두고 조선을 멸시하는 관점도 생겨났다. 특히 18세기에 들어서면서 古學,양명학,국학,난학이 상대적으로 발전하는 변화 속에서 조선에 대한 존경심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 전통적인 조선번국관이 되살아났다. -201-
- 현재 우시마도牛窓.에는 해유문화관이라 하여 통신사 기념관이 있다. -222- (출전; 조선통신사 옛길기행 http://cafe.daum.net/chunhyecafe/3MNh/1208 )
- 왼쪽에서 볼 때에는 오른쪽의 관광을 놓칠까 두려웠고, 오른쪽에서 볼 때에는 왼쪽의 것이 문득 더욱 기이하므로 배를 타고 반나절 동안 가는 사이에 두 눈이 다 붉어져서 마치 식욕 많은 사람이 진수성찬을 받으면 배가 부르면서도 입이 당기는 것과 같았다. -236-
- 신유한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한 것은 바로 일본의 출판문화였다. 통신사행 도중에 쓴 시문이 돌아오는 길에 출판되어 잇는 출판시장의 놀라운 속도는 한마디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244-
- 1617년(광해군9) 종사관으로 사행한 이경직의 [부상록]을 보면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은 조선통신사의 쇄환 노력을 보고도 그다지 호응하지 않았음을 알수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갈까 살피는 자들은 대체로 품팔이꾼으로 고생하는 자들이고, 생계가 조금이라도 넉넉하여 뿌리를 내린 자들은 전연 돌아갈 뜻이 없었다. 한다. -282-
- 내가 가마를 멈추게 하고 후지산을 바라보니 "꽃 한 송이가 빼어나서 마치 하얀 옥잠화가 푸른 하늘에 바로 꽃혀 있는 것 같고, 산중턱 이하는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있는 것이 마치 태화산의 옥정에 하얀 연꽃이 드러난 것" 과도 같아서 세상에서 늘 보던 것이 아니었다 -300-
- 만력 병술1586 연간에 원수 풍신수길이 노예에서 일어나 '오다 노부나가' 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세속에서 전하는말로는 풍신수길은 중국 사람으로서 일본에 흘러 들어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남의 집에서 나무를 하고 말을 기르는 종이 되었는데 '오다 노부나가' 가 관백으로 잇을 때에 풍신수길의 용모를 보고 기특히 여겨서 데리고 궁중에 들어와 사랑하고 가까이하여 일을 맡겼다. -334-
- 신유한이 일본을 방문할 당시의 관백이 '도쿠가와 요시무네' 는 節儉절검을 중시하여 허례허식을 배격하고, 백성의 생활을 중시하는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정치 행태와 그 인물됨을 신유한이 그대로 묘사,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338-
- 10월18일 새빨갛게 단풍이 든 箱根嶺상근령을 넘다.
10월20일 준하의 府中 보태사에 도착하였다. 경치가 완연히 전과 같았는데 푸르던 귤과 밀감이 지금은 황금빛이 되었다. -378-
- 신유한은 일본의 출판문화에 놀란 적이 있었는데, 이날에 이르서는 가는 길에 써준 서문이 붙은 문집이 돌아오는 길에 벌써 출간되어 나온 일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 -405-
- 12차례에 걸친 통신사행 중 한일 문사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때는 7차 1682, 8차1711, 신유한이 활약했던 9차1719로 알려졌다.-409-
- 늙은 대마도 기실 우삼동의 눈물 ;
아메노모리 호슈 가 "신묘년1711에 왔던 여러분과도 서로 깊이 정들기가 오늘과 같았으나 이별할 때에 이런 눈물이 없었는데 10년 사이에 귀밑 털이 성성한 늙은 추물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늙으면 정에 약하다는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인가 봅니다" 하였다. -438- .
-..........끝.잘봤습니다. -447-
***지금으로 부터 31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 나도 海遊錄 같은 여행기를 써 보고 싶구나. 너무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