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757/ 전쟁의 신 이순신-설민석 지음

최해식 2018. 12. 9. 17:38

- '만호' 라는 직책은 종4품에 해 당하는 비교적 높은 계급입니다. 흔히 4품부터는 장군이라 칭할 수 있는데, 그때  그 유명한 '오동나무 사건'을 겪게 됩니다.    발포 만호 이순신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 이 이순신의 객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느데. 이순신은  '성박' 이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 것임을 알고는  "이 오동나무는 나라의 땅 위에 있으니 나라의 물건입니다.  사사로이 베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라고 답하여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상관이었던 '성박' 의 입장에서는 매우 무안하고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을 것입니다. -50-


- 일본은 '征明假道'를 내세워 조선을 압박했으나 당시 조정은전쟁이 난다, 안 난다로 싸움만 한 겁니다.  결국 임진왜란은 우리가  기습을 당한 게 아닙니다. 알고 있었는데도 준비를 안 해서 당한 겁니다.   이때 전쟁이 벌어지지 않거나 벌어져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류성룡입니다.  류성룡은 그전에 율곡 이이가 '十萬養兵說'을 주장할 때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92- (**그가 퇴계 이황의 문하생 출신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


-'난중일기' 라는 이름은 이순신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닙니다. 정조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게 되는데. 당시 규장각의 유득공이 이순신의 일기에 '난중일기' 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순신이 일기를 쓸 당시에는 [임진일기1592], [계사일기1593],[갑오일기1594],[을미일기1595],[병신일기1596][정유일기1597][무술일기1598]라 했다-99-


-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명량해전이 있은 후  이순신 장군은 멀찍이 후퇴합니다.  전라도 이북까지 후퇴하자 전라도 땅은 일본 수군이 장악했습니다.  이순신은 계산된 작전에 의한 전략적인 후퇴였습니다.  명량해전이 벌어진 음력 9월16일 이후는 추위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일본 수군이 추위에 못 이겨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실제로 일본 수군은 아무리 찾아도 이순신은 없고,  바람은 세차고, 기습의 두렵움에 떨다가 본진이 있는 경상도로 돌아갑니다. -186-

(출전) http://blog.daum.net/chscoral/2202

-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고군산도(군산시 선유도) 에서 12일 동안 머물렀다.  이순신이 선유도에 머물던 기간 중에도  일본 수군은 이순신 함대를 추격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수군의 동태는 '강항'이 쓴 [간양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강항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전쟁이 끝난 후 1600년에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일본에 주자학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3-[이순신-이봉수지음]



- 고니시 유키나가가 머물렀던 순천왜성은 길이가 약2500미터, 내성의 길이가 약1300미터의 견고한 성이엇다. -204-


-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6월11일~10월24일까지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을 연재했다.  이 글에서 신채호는 이순신을 영국의 넬슨 제독과 비교하기도 했다. -226-


-.............-228-끝.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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