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753/병자봉사- 최명길 원저, 신해진 역주

최해식 2018. 11. 25. 19:13

- 지천 최명길(1586~1647)은 임진 병자 양란을 몸소 겪으며 전후 국가 재건, 민생회복의 책무는 감당해야만 했다. 그는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으로 병조좌랑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대사헌 경기 관찰사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병자호란 후 그의 말년엔 좌의정 영의정에 오르는 영예도 누렸다.-181-


-1636년 후금과의 정치적 긴장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외교적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되고 斥和論척화론이 공론으로 집약되자, 한성판윤이던 최명길은 和議를 추진하여 청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기에 이르렀으나 胡兵은 이미 도성에 까지 육박한 이후였다.  왕자와  비빈 원로대신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최명길은 몸소 적진에 들어가 출병의 부당성과 맹약위반을 내세워 시간을 끌었고 왕은 그 덕에 겨우 남한산성으로 蒙塵몽진할 수 잇었다. 최명길의 화의는구국에 그 목적이 있었다. -182-


-1627년1월 丁卯胡亂을 일으켰고, 정묘호란 뒤 후금은 국호를 淸으로 바꾸면서 청나라의  요구는 더욱 강경했다.  최명길은 병으로 집에 누워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1636년2월26일 왕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 바로 이 책에 ㅅ소개된 첫 번째 丙子封事이다. 병자봉사는 [지천집] 권11 '箚차' 에 실려 있다-188-


-1636년 2.26,  9.5,  11.6 등  세 편의 丙子封事병자봉사에서 보여준 그의 주장은 한결같다.  청나라와 맞서기에는 조선의 현실이 미약한데도 척화를 주장하면,  국토가 유린되고 죄 없는 백성이 살상된다는 것이다.  정묘호란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군사도 육성하지 않았고, 양곡도 비축하지 않은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현실적 여건을 도외시하고 명분만을 내세우느니,  상대를 달래어 사직과 민생의 안정을 이룬 다음에 힘을 길러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192-


-.........-193-끝.그냥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