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춘추전국이야기3 -공원국 지듬
<초나라 장왕>
-손숙오' 는 초나라 처사였다. 재상인 '우구' 가 그를 초나라 장왕에게 추천하고,자기 대신 재상으로 앉히려 했다.
손숙오는 석 달 뒤에는 초나라 재상이 되었는데,그의 교도 아래 백성들은 상하가 서로 화합하고 풍속 또한 극히 아름다워졌으며,정치에 있어서는 금지 조항을 완화하여도 간사한 짓을 하는 관리들이 없었고,도둑도 없었다. 가을과 겨울에는 백성들을 권유해서 산 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게하고,봄과 여름에는 불어난 강물과 냇물을 이용해서 그것을 운반했다. 백성들은 각각 편안과 이익을 얻게 되었고,생활이 안정되고 즐거웠다. [(중학생이 보는 ) 사기열전 3 - 김영수. 최인욱 역해]-192-
-태사공은 말한다.
손숙오가 단 한 마디 말을 함으로써 영(嬰,초나라 서울) 의 시장이 옛날로 돌아갔다.
<초장왕>
-기원전 7세기 말 6세기 초의 정국을 이끄어가던 나라는 단연 초였으며 그 정점에는 장왕이 있었다. 그래서 장왕은 춘추오패의 세 번째 주자로 평가된다.
한때 '오랑캐 군주' 라고 칭해진 그에게 주어진 그 평가는 사뭇 '과분한' 것이다 -10-
-중국의 문화는 여러 개의 발을 가진 솥과 같다. 그 솥발들을 다 없애고 세 개만 남겨놓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단연 초를 남겨둘 것이다. 나머지 둘은 중원 그리고 秦을 포함한 융적 이다. 진이 중원과 다르듯이 초도 중원과 확연히 다르다. 물론 초는 진과도 다르다. 진이 실용성을 강조했다면 초는 그기에 미를 더했다. 실용성과 미를 더하면 장구하다고 했는데 전국을 통일한 나라는 초가 아니라 秦이 아닌가?
그러나 진은 차자마자 기우는 달과 같았다. 그러나 초라는 존재는 서주,춘추전국을 거쳐 통일제국 시기에도 면면히 살아남았고,급기야는 강남문화라는 것으로 변형되어 현재까지 이어졌다. -15-
-동정호 남쪽 200리 정도 떨어진 '형산' 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그 아래 봉우리에는 눈바람 불지만 산 중턱에는 이미 꽃이 피었다. 낮지만 높아 보이고,꽃과 눈보라가 공존하는 곳이 형산이다. 물론 그 꽃이 200리를 날아 동정호까지 떨어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눈보라의 차가움과 꽃의 정열이 한꺼번에 있는 곳이 바로 초문화다. -17-
-굴원은 전국시대에 초-제 연맹을 통해 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역설한 전략가다. 굴원은 왕에게(혹은 정치가 에게) 질문하여 그의 질문은 유려하지만 그저 허튼 말이 아니라 속에는 뼈가 담겨있다. 화려하지만 마냥 흐느적거리지 않는 것,이것이 초문화다. 이 대시인이 초나라의 몇 안 되는 명철한 전략가라는 사실을 아느 사람은 많지 않다. 오늘날 낭만파 시인과 냉철한 전략가의 이미지는 좀처럼 연결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당시 굴원은 시인과 전략가로서 모두 A급이었다.-19-
-초의 전성기를 이끈 장왕은 전략적인 사고 면에서는 진의 문공을 닮았다. 그러나 호방한 기질은 오히려 제의 환공을 닮았다. 그러나 장왕은 문공이나 환공과 달리 스스로 전차를 몰고 선두에서 적진을 뛰어든 그 개인의 무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군사들은 왕의 뒤에서 뛰었다.
이런 돈키호테식 군주는 당시 북방에서는 찾기 힘들다. -21-
-장왕이 정점에서 멈출 수 잇도록 한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장왕의 날개인 '손숙오' 다. 강함에서 부드러움으로 바뀌어가는 초나라의 전통 속에서 장왕과 함께 이 사람도 살펴보자. 이제 물의나라 초로 들어가 보자. -27-
-초의 수도는 '영' 으로 수백 년간 수도의 지위를 유지했다. 우리가 '형주'나 '강릉' 으로 익히 알고 있는 곳이다. -54-
-기원전 614년 초 장왕이 등극하여 3년 동안 한 번도 호령을 내리지 않자 '오거' 와 대부 '소종' 이 간하여 장왕은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것이 '3년만에 우는 대봉 ' 에 관한수수께끼 이야기 이다.
"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나 날면 장차 하늘을 뚫을 것이고, 3년 동안 울지 않았으나 울면 장차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오거는 물러나시게. 그대의 마음을 알겠소. " 라고 했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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