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춘추전국이야기1 -공원국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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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동주 |
魯 |
齊 |
晉 |
秦 |
楚 |
鄭 |
723 |
평왕 |
혜공 |
리공 |
악후 |
문공 |
무왕 |
장공 |
720 |
은공 | ||||||
718 |
환왕 | ||||||
716 |
애후 | ||||||
712 |
영공 | ||||||
710 |
환공 | ||||||
707 |
소자 | ||||||
704 |
진후 |
출공 | |||||
701 |
여공 | ||||||
698 |
양공 |
무공 | |||||
697 |
소공 | ||||||
695 |
장왕 | ||||||
694 |
자민 | ||||||
691 |
장공 |
자영 | |||||
690 |
문왕 | ||||||
686 | |||||||
682 |
환공 | ||||||
680 |
리왕 |
여공복위 | |||||
678 |
무공 | ||||||
677 |
덕공 | ||||||
676 |
혜왕 |
헌공 |
도오 | ||||
673 |
선공 | ||||||
672 |
성왕 |
문공 | |||||
664 | |||||||
662 |
성공 | ||||||
660 |
희공 |
목공 | |||||
658 |
리공 | ||||||
652 | |||||||
651 |
양왕 | ||||||
643 |
혜공 | ||||||
637 |
효공 | ||||||
633 |
문공 | ||||||
628 |
소공 | ||||||
627 |
양공 |
목공 | |||||
626 |
문공 |
목왕 | |||||
621 |
영공 |
강공 | |||||
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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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수천 년의 역사를 부대끼며 살아온 우리에게 이 거대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나라는 항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면서도 기회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모르면 그만이면 좋겠지만 우리의 과거는 물론이고 오늘날도 중국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이해해보는 것은 어떨까? 공룡의 눈치를 보며 끌려다니는 것 보다도 등에 타고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중국이라는 공룡의 내력만 안다면 최소한 끌려 다니지는 않을 수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다. -10-
-춘추전국시대란?
기원전 770년 주나라가 융족에게 밀려 동쪽 낙양(낙읍)으로 옮겨온 ㅣ 시대부터 秦이 전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대략 550년의 기간을 말한다 -14-
-청장고원 높은 곳에서 발원하는 황하는 시리도록 차고 맑다. 태고의 순수함처럼 정갈하던 물줄기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동쪽으로 달린다. 물은 감숙성 고도古都 '난주' 를 지나 고비사막, 음산산맥, 태행산맥을 돌아돌아 부그로 동으로 남으로 흘러 진진秦晉대협곡, 호구폭포를 황하는 더 남쪽으로 달리다가 화산華山에 부딪힌다.
"역시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물을 건널 수 없다."
황하는 결국 서쪽에서 달려온 위수와 힘을 합해 힘겹게 동으로 방향을 돌린다. -41~ 43-
-우리가 역사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
사실, 곧 팩트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팩트, 기록이나 유물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대인들의 마음을 읽고 사랑해야 고대인들의 진짜 이야기를
이해하고 읽을 수가 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우리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들을 만나볼 시간이다 -62-
-주나라는 오늘날의 중국의 뼈대를 만든 나라다.
중국의 제도, 중국의 사상, 중국의 물질문명까지 주나라를 기준으로 하지 않은 것들이 없다.
공자가 " 나는 주나라의 예를 따르겠다 " 고 말한 것은 사실상 중국의 문화는 주나라에서 발원한다고 선포한 것이다. -89-
-[사기] 의 기록에 의하면,
문왕(희창)이 죽자 무왕(희발) 즉위했다. 무왕이 즉위하자 강태공(태공망 여상) 을 師로 삼고 주공을 輔로 삼았다. -97-
-하나라 걸왕의 매희, 상나라 주왕의 달기, 그리고 나중에 등장할 주나라 유왕의 포사, 이 여인들은 시대는 다르지만 어떻게 그토록 유사할까? 모두 지극히 아름답고 또 지극히 악하다. 또 걸왕과 주왕, 그리고 후대 유왕의 모습은 왜 그렇게 유사할까? 모두 여자의 말을 들어서 망국의 길로 들어섰고 그들의 그 가학적인 성격마저 완벽하게 똑같다.
이런구조에서 뭔가를 짐작할 수 잇다. 사서들은 후대의 사실을 기준으로 전대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곧 포사가 달기에게 영향을 주고 달기가 매희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 주공이 이윤을 만들고 무왕이 탕왕을 만들었다.
[사기] 는 역사적인 사료를 취합하면서도 많은 비사를 모았다.
사마천은 정직했지만 그가 쓴 자료들은 정직하지 않았다.
상의 멸망과 주의 등장은 근본적으로 정치경제적인 것이지,
한 여인 때문은 아니었다 -100-
-주나라 사람들이 만든 제도, 법률, 관념 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깨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힘을 발휘했다. 중국에서 왕조사가 끝나는 1911년이나 , 어쩌면 지금의 현대 중국까지도 여전히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108-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몇 해 지나지 않아 동생 주공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하고 생을 마감한다. 아들 성왕이 즉위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주공이 행사 햇다.
기원전 1040년 주고의 섭정ㅇ르 반대하여 관숙, 채숙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주공은 이 반란을 진압하고 계속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회수 북부에서 산동반도에 이르는 이민족들을 복속시켰다.
무왕이 혁명을 사작하고 혁명을 완수한 인물은 주공이었다. -127-
-공자,맹자,순자 이 세 사람은 모두 관중에게 빚을 지고 있다
공자가 말한 "의식이 풍족해야 예를 안다" 는 말은 " 먹을 것이 있어야 예의염치를 안다 " 는 관중의 말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또 맹자가 말한 "관문에서 검사만 하고 세금을 거두지않았다 . " " 풍년에는 개도 사람이 먹는 것을 먹고 , 흉년에는 사람이 죽어나간다 " 며 물가정책이 없음을 한탄하는 것 등은 제나라의 경제사상은 거의 모두 관중에서 나왔다. 관중은 중국 최초로 경제학을 정립한 사람이며 , 아마도 세계 최초로 재정학의 핵심을 이해한 사람일 것이다. 경제에 관한 한 공자나 맹자,순자 모두 관중을 따르고 있다. -170-
-관중의 시도는 춘추시대 첫 번째 관료제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둥의 정책들은 실로 다양하다. 그의 말과 행동은 개성이 넘친다. 그러나 관중을 생각 할 때는 부귀한 말년만으 ㄹ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직 실력을 믿고 떠돌던 청년기와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현실정치의 살벌함을 피부로 실감하던 장년기에 바로 관중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거족이 아닌 관중의 가문은 관중이 죽자 바로 권력에서 멀어졌지만 관중이 남긴 유산은 지대했다. 이후 춘추시기 여러 군주들은 출신과 관계없이 관중 같은 실력파 인재를 찾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노예 신분에서 일거에 재상으로 등용된 秦나라의 '백리해' 이다. -178-
-제나라에 도착하니 환공은 관중을 영접하기 위해 세 번 몸을 씻고 세 번 향에 몸을 쬔 후였다. 이른바 '삼흔삼욕' 이라느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환공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예를 행했던가 ? 강태공ㅇ르 얻으려는 문왕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아니면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하는 유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큰 물이 없으면 용은 개미떼도 이기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인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큰 인재는 반드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으로 나온다. 관중에게는 포숙이 있었다. 포숙이 환공에게 관중을 제안한다. 포숙이 관중은 천하의 인재이고 또 곤중을 얻으면 천하의 제후들을 다스릴 ㅅ 잇다고 하지 않는가? 큰 지도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승부수를 던질 수 있는 직관이 있어야 한다. " 좋다. 관중을 쓰자 " 이리하여 관중은 사형수에서 일약 재상으로 발돋움한다. -208~ 210-
-1979년 이른바 개혁개방 선언 후 등소평이 시행한 정책은 관중이 한 것과 대동소이하다. 소유권을 명확히 해주면 사람들은 열심히 생산한다는 것이다. -237-
-환공은 "세금은 덜 걷어도 기회를 주지만 인재를 천거하지 못하면 바로 면책한다" 고 각 지방 '대부'에게 명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이리하여 제나라의 지방민들 중에 실력이 잇는 사람들은 모두 발탁되었고 선비들도 재나라로 몰리고 농민들도 제니라의 통치를 받겠다고 하여 제나라의 인구는 날로 늘어났다.
맹자가 "인의를 펼치는 군주 아래로는 아이가 부모를 찾듯이 백성들이 모일 것" 이라고 한 선례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 -247~ 248-
-[관자]<국축>에 '숙황'을 묘사했는 데 이는 전국시대의 상황일 것이다. 이처럼 농업만으로 기근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시에더 명백했다. 농민들이 상업으로 전환하는 이유는 상업이 농업보다 더 나은 생활ㅇ르 보장했기 때문이다. 농업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상업으로 전환하는 상황에서 상업 때문에 농업이 침해받는다고 주장하는 ㄱ섯은 순서가 전도되었다. 그럼에도 고대의 정권들응 모두 상업을 억누르려고 했다. 상인이 생산자라는 것을 모르고 상인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탐욕스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51-
-정치인은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에 약점이 있다. 그 약점을 가지고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바로 기掎라고 한다. 그 수단이 바로 法이다 !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법률로 옭아매어서 정치적인 생명을 끝내버리는 일은 고대사에서는 너무나 많았고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일단 법에 걸리면 인정사정이 없다. 법이란 권력의 수단인지라 타락하기 시작하면 천하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다. 명나라 때 형법을 ㅂ 집행하던 특무들의 잔인함은 도저히 서면으로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작정하고 법으로 옭아매려고 하면 누가 당하겠느가? 그러나 관중이 법으로 정치를 한다고 말할 때 법은 법을 이용하여 뒤통수를 친다는 말이 아니다. 관중은 법을 명명백백하게 집행하고 무력을 쓸 때도 정당한 ㅜ 구실을 반드시 찾았다. -262-
-晉에는 순식'이라는 모사가 있었다 순식은 우나라와 곡나라를 모두 멸망시킬 요량으로 묘안을 짜냈다.
그 유명한 "가도멸괵假途滅馘 " 곧 우나라에게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한다는 작전이었다. 가도멸괵이란 말은 일본이 조선을 치고자 하면서 내세운 ' 조선이 명나라로 가는 길만 빌려주면 된다 ' 는 식의 음험한 수법을 말한다.
몇 년 후 晉은 다시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때 궁지기가 "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 " 며 극구 반대했다.
' 순망치한脣亡齒寒 ' 이란 우호적인 두 세력 중에 하나만 무너지면 나머지는 자연히 무너진다는 원리를 말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파병한 이유가 ' 조선이 무너지면 요동이 위험하다 ' 는 순망치한의 원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우나라 군주는 듣지 않았다. 과연 입술이 없어지자 이도 힘을 쓰지 못했다. 진나라 군사는 괵나라를 치고 돌아가는 길에 아예 우나라까지 멸망시켜버렸다. -343-
-晉나라 헌공은 권력욕의 화신이자 야비한 사람이었다.
이 와중에 우나라를 병탄하면서 포로로 잡은 '백리해' 가 실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헌공' 은 그를 쓸 생각이 없었다 '헌공' 은 자기의 대부들과 심지어 아들들도 믿지 못해 다 죽이려 한 사람인데 외지 사람을 쉽사리 믿을 리가 있겠는가?
이리하여 '백리해' 는 처량하게 '晉헌공'으로부터 '秦목공' 에게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자 진나라를 탈출하여 초나라 땅으로 달아났다. 그때 나이가 일흔이 넘었다 하니 그의 운명은 기구하다 못해 참혹했다.
하지만 '秦목공' 은 '백리해' 가 현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등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진나라의 장점이다. 진나라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 중 외국 사람이 극히 많다. 지금 '목공'은 노예를 쓰겠다고 한다.
'백리해'의 등장은 간단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중국이 세계적인 문명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한 지표였다, 국가 간의 강렬한 투쟁이 노예제의 기반을 붕괴시키고 있었다. -351~35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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