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사마천 평전 - 지전화이 지음 김이식, 박정숙 옮김
-사마천의 字는 자장子長으로 기원전 134년 漢 경제 중원 5년 지금의 산시성陜西省(합서성).한청韓城 즈촨진芝川鎭에서 태어났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19-
-중과 여 가 사마천의 조상이라고 한 것은 다만 그의 집안이 오랫동안 대대로 사간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한 것이다.
기원전 620년 경 사마천의 조상은 晉에서 소량少梁(지금의 산시성 한성)으로 이주했다.
사마착 : 秦소왕 때 韓을 먼저 공격할 것인지 蜀촉을 먼저 취해 후방의 안정을 도모할 것인지를 두고 ' 장의 ' 와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 그 후 사마착은 공로를 인정받아 촉을 다스렸다.
사마근 (사마착의 손자) : 진 소양왕 때 (기원전 306~251) 무안군 백기의 부장이 되었다. 그는 백기와 함께 장평에서 조나라 40만 대군을 대파, 모두 산 채로 묻어버렸다.
사마창 (사마근의 손자) : 진시황 때 진의 주철관이 되었다.
사마무택 (사마창의 아들) : 장안의 四市중 한 시의 시장(시장을 관리하는 수장) 이 되었다.
사마희 (사마무택의 아들) :는 五大夫가 되었다.
사마담 (사마희의 아들) :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직접적으로 사마천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사마천 (사마담의 아들) : 사기 저자 .-29-
-[漢書한서- 반고 저] 의 <사마천전>에서
'반고'는 '사마천'을 어떻게 보았는가?
옛날 전욱이 천하를 다스릴 때 南正 중.에게 하늘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고 北正 여. 에게는 땅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했다.
요순시대에는 중과 여의 후손이 다시 맡게 되었고 중려씨는 대대로 이 일을 주관했고 주周. 선왕 때 중려씨는 관직을 잃고 사마씨가 되었다. 사마씨는 대대로 주나라의 역사를 담당했다.
주 혜왕 때 사마씨는 주나라를 떠나 晉나라로 갔다. 이때부터 일족은 위나라, 조나라, 秦나라로 흩어졌다.
秦나라애 있던 일족 중에 '착' 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장의'와 '촉'을 정벌한느 일을 두고 논쟁했다. '혜왕'은 '착'에게 촉을 정벌하게 하여 정복한 뒤 '착'은 남아서 그곳을 지켰다.
(착' 의 아들은 ? 누구인가? )
착의 손자 '근' 은 무안군 '백기'를 섬겼다. 少梁은 '하양' 으로 이름을 고쳤다. 근은 무안군과 함께 장평에서 조나라 군사를 땅에 묻어 죽였다.
('근' 의 아들은 ? 누구인가? )
근의 손자는 '창' 이다. 차은 진에서 철을 제련하고 주조하는 일을 관리하는 담당자인 '주철관'이 되었다.
창은 '무택' 을 낳았다. 무택은 한나라 시장을 관할하는 관리가 되었다.
무택은 '희' 를 낳았고 희는 五大夫가 되었다.
희는 '담' 을 낳았고 담은 태사공이 되었다.
담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遷' 이라고 했다. 천은 용문에서 태어났고 열 살 때 고문을 읽었다. 스무 살 때 남쪽을 유력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임금이 묻힌 '우혈'을 찿아 탐사했다. 그 후 양나라와 초나라를 거쳐 돌아왔다 이때 '천'은 벼슬길에 나가 낭중이 되었다. -271~ 278-
-사마천이 스무 살에 천하를 유력했다.
그는 수도인 장안에서 출발해 무관을 나와 남양을 거쳐 남군에 도착해 장강을 건넌듯하다. 그리고 나서 장강 동남쪽에 있는 회계산會計山에 올랐다. 이곳은 우임금이 이곳에서 제후를 불러 모아 그들의 공을 계산하고 기록했기 때문에 회계산으로 불렸고 우임금이 죽자 또 이곳에 안장했다고 한다. -61-
-사마천은 천하유력을 마친 뒤 벼슬길에 나아가 낭중이 되었다.
낭중은 한 왕조 궁정 내부 관료 조직의 말단 관직이다
낭관은 의랑, 중랑, 시랑, 낭중 등의 4등급으로 구성 되어 있다.
낭관은 황제가 궁궐에 머물러 있을 때는 무장을 한 채 궁문을 지키는 시위侍衛가 되고 황제가 행차할 때는 황제의 어가를 수행하는 시종이 된다.
2000석 고관들이 자제를 낭관으로 삼거나 , 부잣집에서 돈으로 낭관을 사는 일이 많았다.
낭관은 궁에서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기 때문에 평소 매우 광채나는 자리이고 외지로 발령을 받으면 종종 長吏(현의 우두머리로 고급관리) 가 되곤 했다. 그래서 부잣집 자제들이 벼슬길로 나가면서 낭관이 되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마천이 맡은 낭중이 가장 낮은 말단의 낭관이지만 무당이나 점쟁이에 가까운 사관의 아들이 무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측근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68~69-
-사마천이 자서에서
"칙명을 받들어 서쪽으로는 파와 촉 남쪽 지역을 정벌하고 ......."
라고 한 부분은 사마천이 서남으로 가는 교통 조건은 굉장히 좋았다. 여러 해 동안 파촉의 백성들이 자연과 투쟁하면서 흘린 피땀과 노동의 대가로 파촉 이남으로 통하는 길이 개통되어 있었다.
이는 오얏길 밑에 길도 자주 다니다 보면 길이 생긴다 " 라고 하는 고사성어를 생각나게 한다.
... 사마천은 서남이 출사로 서남지역에 대한 풍성한 지식 .지리 . 물산 . 민정 . 풍속등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엇다. 이것은 그가 훗날 [화식열전] 등을 쓸 때 큰 도움이 되었다. -74-
-죽음을 앞두고 사마담은 아들위 손을 잡고 눈물을 떨구며 이렇게 말했다.
" 무릇 효도란 부모를 섬긴느 데서 시작해 다음에는 군주를 섬기고 마지막으로 입신하는 데서 끝난다.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다. "
사마담은 부모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마지막 목적은 자신을 세우고 立身.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데 있으며, 이것이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했다. -80~ 81-
-무릇 효도란 부모를 섬기는 데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군주를 섬기고 마비막으로 立身하는 데서 끝난다.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다. 세상 사람들이 周公을 칭송하는 것은 그가 문왕과 무왕의 덕을 노래했고 태왕, 왕계가 생각하던 것을 이룩했고 또 멀리 공유에까지 이르렀으며 후직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漢書 -반고 저 <사마천전> ] 에서 -279-
-사마천은 한 무제 원봉 7년에 수십 명의 역법 전문가와 힘을 합쳐 마침내 정확한 역법을 확정하였다. 이 새 달력은 정눨을 한 해의 첫 달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태초력으로 옛 역법을 개혁해 이뤄낸 중요한 성과엿다. 한 무제는 이 때문에 원봉7년을 태초 원년으로 고쳤다.
........ 사마천을 중심으로한 '태초력' 개정 작업은 백성들에게 쪽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널리 칭송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잇다. -95~ 96-
-마흔여덟의 사마천은 바른말로 인해 옥살이ㅇ를 했다.
태사라는 직위는 역사나 천문 역법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한낱 점쟁이나 무당에 가까웠다. 주상도 즐거움니아 재미를 제공하는 광대로 보았기 때문에 그는 세상 사람들이 경멸하고 조롱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설령 법에 따라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아롭 마리 소에서 털 오라기 하나 빠지는 것과 같고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다를 게 업다. ' 는 생각이 들엇다.
......... 사람은 본디 한 번 죽을 뿐이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기도 하고 어떤 죽음은 터럭만큼니나 가볍기도 하다. 죽음에는 이렇게 크고 작은 차이가 잇다. -116-
-[사기] 의 기록은 黃帝에서 시작되어 한 무제 태초(기원전104~101) 연간에서 끝나는데 통틀어 3000년 동안 발전한 한족의 역사를 담고 잇다. -150-
-사마천이 사기를 지은 가장 큰 이상은 그 스스로가 제2의 공다 자가 됭어 [사기]를 제2의 [춘추]로 만드는 것이었다. [춘추]린느 이 책은 기우너전 722년에서 481년가지 여러 나라의 큰 사건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 하지만 당시의 춘추공양학파의 견해로는 추누 추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엉ㅄ으니 이른바 " 만물의 모임과 흩어짐이 다 [춘추] 에 있다 " 라고 생각했다. 춘추의 히느글자 한 구절에는 모드 나름의 도리가 있고 또한 공자는 時運이 좋지 않고 明君을 만나지 못했기에 만년에 "역사기록에 의거하여 [춘추] 를 지음으로써 왕ㅇ법으로 삼았다. " 이 왕법은 " 천하의 득실을 기록하고 일이 그렇게 된 원인을 밝혔느데 매우 은미하면서도 분명하고 풀어서 말하지 않아도 드러났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162-
-사마천의 역사 관념으로 볼 때 고댕부터 한대까지 역대 통치 인물이 끊임없이 교체된 역사에 대해 " 시닥을 근원으로 하여 끝을 살피고 성함을 보고 쇠미함을 관찰하여 " 역사가 영구히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171-
-또한 사마천은 "사람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부를 추구한다 " 고 생각했다. 이에 " 세상 사람들은 시끌벅적 이익을 위해 몰려들고 세상 사람들은 시끌벅적 이익을 찾아 떠나간다 " 고 말했다. 왜냐하면 " 사람이 부귀해야 인의가 따르니 부자는 세력을 얻으면 더욱 흥성하나 세력을 잃으면 賓客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 " 대체로 일반 백성들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가 많으면 몸을 낮추고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고 천 배 많으면 그의 밑에 서 일을 하고 만 배 많으면 그의 종이 되니 이것은 만물의 이치다. " ......... 천금의 부자는 한 도읍의 군주와 맞먹고 만금을 가진 자는 왕과 즐거움을 같이한다 " 라고 하겠으므로 이것이 바로 '소봉' 이라고 하는 것이다. " 집이 가난하고 늙은 부모를 모시며 처자가 연약한 데다 절기가 되어도 제사를 지내거나 잔치를 마련할 수 없으며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 ㅅ것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사람 " 이 만약 '수치'를 모른다면 실로 곤란하다.
또 오랫동안 가난하게 살며 인의만 말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 또한 부끄러워해야 한다.
아무턴 사마천의 견해로 [漢書 -반고 저 <사마천전> ] 에서 -279-는 " 돈을 벌어 부유해야 한다 " 는 것이다. 물론 이런한 견해는 " 그 시비의 판단이 성인의 관념에서 벗어낫다" 라고 정통 사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1100년 이후 원나라 사람인 왕약허王若虛가 사마천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한 것도 이 점에 근거해서다. -200~ 201-
- 반고는 사마천을 어떻게 보았는가?
[ 漢書 -반고 저 <사마천전> ] 에서
[역]은 천지,음양,사시,오행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변화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기]는 인륜을 규범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행위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서경]은 선왕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어 정치에 도움이 됩니다.
[시경] 은 산천 ,계곡 , 초목 , 빈모牝牡,자웅을 기록하고 있어 풍자를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악경] 은 사람을 즐겁게 해주므로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춘추] 는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려주므로 사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런 까닭에 [예기]는 사람을 절도 있게 하고 [악경] 은 사람의 마음을 화합시켜주며 [서경] 은 정치를 이야기하고 [시경]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고 [역 ]은 변화를 말허고 [춘추]는 도의를 말합니다.
난세를 다스려 올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는 데는 [춘추] 만 한 것이 없습니다. 만물이 어떻게 모이고 흩어지는지 모두 [춘추]에 실려 있습니다.
[역] 에 " 털끝만큼 작은 차이가 천 리의 차이를 낳을 수 있다 " 고 했으며 또 "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점차 쌓인 것이다. "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춘추] 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에 아첨하는 무리가 있어도 알지 못하고며 뒤에 역적이 있어도 알지 못합니다. 신하된 자도 반드시 [춘추]를 알아ㅑ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규정만을 고수하며 일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모르고 돌발적인 상황에도 임기웅변을 할 줄 모릅니다.
군주나 어버이가 되어서 [춘추] 의 도의에 통하지 못한 자는 반드시 찬탈이나 시역의 죄에 빠지며 가장 나쁜 오명을 받게 됩니다.
무릇 예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게 됩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신하에게 침범당하고 신하가 신하ㅏ 답지 못하면 주살되고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면 무도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불효하게될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 행동은 천하에서 가장 큰 잘못입니다.
그러믈로 [춘추] 는 예의의 근간입니다. 무릇 예 라는 것은 아직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막는 것이며 법이란 일이 일어난 뒤에 시행하는 것입니다. 법의 효과는 눈에 잘 보이지만 예가 금지하는 것은 알기 어렵습니다." -282~ 283-
-공자는 노나라의 역사 기록을 이용하여 [춘추] 를 지었고 좌구명은 그와 관련된 사건을 정리하여 [좌전]을 만들고 또 다른 사료를 편집하여 [국어]를 만들었다. ......
...... 춘추시대 이후 7국이 패권을 다투었고 마지막에 秦이 6국을 통일했는데 이 시대를 기록한 역사서로 [전국책] 이 있다.
漢이 일어나 秦을 무너뜨리고 천하를 평정했느데 이 시대를 기록한 역사서로 [초한춘추]가 있다.
따라서 사마천은 [좌전 ]과 [국어] 에 근거하고 [세본] [전국책] 에서 일부 사료를 선택하고 [초한춘추]를 서술하여 그 뒤의 역사적 사건을 잇게 하여 天漢까지 이를렀는데 秦漢에 관한 역사는 매우 상세하게 기록했다. ("초한춘추" 의 저자는 한나라의 "육가" 라고 한다.? )
사마천은 광범위하게 섭렵했고 경전을 꿰뚫고 고금을 치달려 수천 년 사이를 오르내렸으니 근면하다 하겠다. 유향, 양웅 처럼 박학다식한 학자들이 모두 사마천 이 훌륭한 역사가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칭찬하고 또 사건의 기승전결을 잘 서술한다고 탄복했다.
사마천의 문장은 아름답지만 화려하지 않고 질박하지만 촌스럽지 않다. 그 문장은 곧고 그 사건의 핵심을 짚어 서술하며 허투로 탄양하는 법인 없고 악한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록이라 일컫는다. -292~ 29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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