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558 / 대마도2 - 이원호 지음

최해식 2017. 11. 6. 15:47

-정도전은 1337년생이다.  ..........그의 부친은 겨우 직제학  직임을 맡았고,  증조부는 고을의 호장이었으니 낮은 신분이다. 그리고 정도전의 생모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정도전의 '역성혁명' 이 태어난 배경이다. 그 역성혁명을 기초로 정도전은 이성계를 개국으로 이끌었다. -30-


-" 본래 이 땅은 천 년 전부터 가야, 백제, 신라의 유민이 흘러와 주민이 형성되었고, 그 도주가 대대로 신라, 고려, 조선의 관리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그대 本國은 물론 本土 5島의 영주들도 다 아실 것이오."  -35-


-산성 주위를 철통처럼 둘러싸고 기다렸던 터라 마치 '밥이 익기를 기다렸다가 솥뚜껑을 연 것이나 같다.' -40-


-대마도는 바닷가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무성한 숲과 바위산이다. -51-


-島民의 대부분이 가락국 시대부터 백제, 신라, 고구려, 고려에서 들어간 유민인 데다........

대마도 도주는 경상도 소속의 지방 관리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왜의  어느 영주도 감히 제 깃발을 꽃지 못했다. -56-


-명장 밑에 약졸이 없는 법이고 부전자전이다. -62-


-저는 對馬府使 휘하의 정4품 護軍으로 복직 되었습니다.

........대마도주 종정성 역시 대대로 세습되는 경상도 관찰사 휘하의 정4품 萬戶인 것이다. -67-


-상왕 태종이 군기감승 崔海山을 맞는다.

그의 아비 최무선이 병사한 것은 태조4년인 1395년, 제2차 대마도 원정을(태조5년, 1396년 ) 떠나기 1년 전이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태종1년인 1401년에 崔海山최해산을 찾아내어 군기시 주부로 특채한 것이다. -68-


-1419년 세종1년에  이종무가 제3차 대마도 정벌 때 당시 규슈의 다이묘大名들은 조선군 진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조선군의 대마도 정벌은  조선 內國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전의 두 번 원정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히데요시 대에  이르러 대마도의 중요성이 부각 되었다.  히데요시의 대륙 정벌 야망이 현실화되면서 대마도가 그 교두보 역할이 된 것이다.-101- 


-1592년 6월16일 왜군은 4월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지 두 달 만에 평양성을 함락했다. .........길 안내를 맡겠다면서 왜군에 입대하는 조선인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지휘, 교육시키는 데 대마도 향도가 있어야만 한다. -122-


-대마도 사카성에 있던 도주 종성장은 두 아들과 함께 자결했다.  이로써 1246년, 고려 고종33년에 宗重尙이 백제계 아비루氏를 내쫓고 대마도주가 된 지 346년 만에 고려계 宗氏 가계가 끊겼다.  현재 고니시 곁에 있는 종의지는 宗氏 성만 붙인 고니시의 사위일 뿐이다. -127-


-1598년 8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病死함으로써 일본  內國의

 정세가 급변했다. 그리고 11월23일, 왜군은 조선땅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러나 6,000명의  조선계 대마도인 대부분을 조선땅에 시체로 버린 채 島主 종의지는 살아 돌아왔다.-136-


-" 왜란 이후에  소 요시토시의 뒤를 이은 대마도주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조선의 관직을 받고 조선의 대마도부 병마절도사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지리적으로 조선과는 100여리(49.5km)길이지만 일본의 후쿠오카는 그 세 배인 300여 리 (147km) 길인 데다 모든 생활 물자를 조선으로부터 공급받아왔기 때문입니다. " -150-


-"쓰시마 주민 대부분이 조선계 핏줄이 섞여 있습지요.

조선 전쟁 이후로 대부분 일본 이름으로  바꿨지만 바탕은 대륙에서 넘어온 종족들이오." -162-


-조선통신사 정사 조엄은 고귀위마를 먼저 제주도에 심어 돋 조선 거 전국으로 전파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고귀위마를 趙藷조저 라고도 부른다. -178-


-1910년 8월29일, 조선은 일본에 합병되어 亡했다. 따라서 김만수는 물론 하용준도 일본국 臣民이 된 것이다. 대마도는 나가사키현 부속

도서가 되었으며 조선은 일본 총독이 통치하고 있다.-180-


-"몇 십 년이 지나면 조선은 역사를 잃고 백 년쯤 후에는 일본 역사에 흡수될 테니까."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의 민족정기 및 역사 말살 10년 계획을 수립했다. 1910년 11월부터 1911년 11월까지 1년 동안 전국의 경찰을 총동원하여 고서, 고화 등을 샅샅이 수거해  이 역사서를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시켜 삼국 시대부터의 역사를 다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183-


-'임나일본부'는 4세기에서 6세기에 왜국의 진구황후가 한반도 남부

임나 지방을 통치하여 다스렸다는 [일본서기] 의 기록을 말한다. -185-


-어려울 때, 힘들 때 아버지를  떠올리면 내가 네 머리 위에서 도울 것이다. 알았느냐?"  -187-


-관동대지진이다.   강도7.9에서8.4까지의 지진이 1923년9월1일 오전11시58분부터 5분 간격으로 세 차례 발생했다. 세 차례 모두 5분 이상 계속되었기 때문에 도쿄 등  관동 지역은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도쿄는 도시의 75% 이상이 파괴, 소실되었다. -196-


-1948년 8.18일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245-


-맥아더는 육사를 수석 졸업하고,

최연소 육참총장을 지낸 인물이다. -248-


-일천 수백 년 동안, 일본은  한국을 강탈,침략하고, 문화를 얻고 점령하면서 살아왔다. 단  한 시간의 역사에도 한국에게 베풀어 준  기록이 없다. -265-


-.........-334-끝.그냥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