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 / 남한산성 - 김훈 지음
-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흥타이지는 아비가 죽자 형들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淸이라 내걸었다. -29-
- 겨울 새벽의 추위는 영롱했다. 아침 햇살이 깊이 닿아서 먼 상류쪽 봉우리들이 깨어났고, 골짜기들은 어슴푸레 열렸다. ........ 숲에서 새들이 날개 치는 소리가 들렸고, 잠 깬 새들이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 앉을 때마다 눈송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정갈한 추위였고, 빛나는 추위였다.-50-
-성벽은 어둠 속으로 뻗어나갔고,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소나무 숲에 빗소리가 자욱했다. -68-
- 묵은 눈 위에 밤새 또 눈이 내렸다. 아침에 눈이 그치자 푸른 소나무 숲 사이로 성벽이 하얗게 빛났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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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사중 한 사람인 오달제는 매화 그림 몇 점을 남겼다......젊은 오달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유서를 쓰듯이 매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그때가 겨울의 끝자락이어서 성안에 매화는 피었을 것이다. -409-
출전; 오달제의 묵매도 http://blog.daum.net/lee7997/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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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의 글씨는 '오준'이 썼다. ......이 비석의 운명은 병자년 겨울에서 정축년 초봄까지 고립무원의 산성 안에서 벌어졌던 말과 길의 싸움이 그 후 삼백팔십여년을 이어져왔음을 보여준다. -419-
(출전) http://blog.daum.net/chscoral/384
-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묘시(오전5~7시) 무렵 세자 및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고 삼전도로 향했다.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인조는 태종이 있는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 의 예를 행했다. 이 의식은 여진족이 그들의 천자를 배례하는 의식 절차였다. 조선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항복을 한 삼전도의 치욕 을 당한 조선은 모두가 참담한 패배의식에 빠졌다. 이후 청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은 이 사건ㅇㄹ 영원히 기념하려는 뜻에서 '삼전도비'를 세웠다. 이 비의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 로 높이 395센티미터,너비 140센티미터의 대형비석이었다.
372년 전 그 차가운 겨울 남한산성에서 추위에 떨며 우왕좌왕했던 인조와 신하, 백성들의 참혹했던 모습은 명분만 가지고 벌이는 전쟁이 얼마나 무모한 지 를 후대에 뜨렷하게 각인시켰다. (** 손자병법에. 전쟁의 조건, 또는 장수의 조건을 보라.?) -391-[조선평전-신병주 지음]
(출전)http://blog.daum.net/chscoral/386 1637년1월30일, 삼전도에 나아가 세 번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부딪치는 '삼배구고두' 의 황제 알현 예를 행하고 용서를 빌었다.
"야 임마, 안들려 좀더 세게 박아 !"
이 무슨 개꼴이냐. 인조의 머리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청 황제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황제 곁에 있던 청나라 관원이 소리질렀다.[조선왕조실록上- 백지원 지음]-450-
- 얼핏보면 임금을 항복케 한 최명길은 죽일 놈이고, 끝까지 절개를 지킨 김상헌은 만고 충신이다. 하지만 주둥이와 기개만 가지고 칼을 막을 수 있니? 멍청한 것들, 주제도 모르고 이빨만 까다가 개꼴이 된 것이다. 하잘데 없이 명분만 내세운 고루하고 진부한 성리학의 이념만 좇다가 임금이 남의 나라 임금 앞에 무릎끓고 절하게 한 사태는 바로 김상헌 같은 인간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전쟁이 끝난뒤 온나라가 처참함 속에 빠졌으며, 목불인견이라 했다. 겨우 한 세대쯤 전에 일어난 조일전쟁 때의 교훈을 잊어버려 다시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 한다.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다. [조선왕조실록 上- 백지원 지음-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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