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역사 e 2 :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 EBS지음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이 땅 위에서 살아낸 이야기다. 그들이 내딛은 발자취의 흐름이다 역사의 고비마다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한 서사다. 숱한 경험들의 축적이다. 역사는 '사건'이 아니라 '사연'을 담고 있다.
오늘을 우리가 살아가듯 역사 속의 선조들도 그 시대의 오늘을 살다간 사람들이다. 하루하루 일상이 있었을 테고 지켜야 할 소중한 가족들도 있었다. -6-
-활빈당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부터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기까지 10여 년 간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 홍길동의 후예이길 바맀던 활빈당. 그들이 그린 사회의 모습은 허균이 꿈꾼 이상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광해군 시대 뛰어난 문객이었던 허균, 그의 사상은 당대애는 불온하다며 외면받았지만 후대에 재조명되었다. -105-
-실학자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완성했다. 책은 완성되었지만 부인과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책을 후세에 전할 가능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서유구는 "죽기 전에 간행하자니 힘이 없고, 장독을 덮어버리기엔 아까움이 있다" 며 자신의 처지에 대해 통탄했다. -142-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은 일왕에 대한 일본인의 충성심을 잘 이용하면 일본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잇다고 판단한 것이다. 수십 년간 히로히토를 연구한 도요시타 나라히코 간세이학원대학 법학부 교수는 "도쿄 재판은 주역을 빼놓은 채 도조 일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 미일의합작품이았다" 고 정리했다. -236-
-도쿄 전범 재판은 1946년 5월 3일 시작됐다. ............ 도쿄 전범 재판 60주년을 맞은 2006년 일본에서는 두 가지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치권에서는 재판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A급 전범 14명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것이다. 또다른 일본의 모습은 도쿄 전범 재판애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았다.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70%가 도쿄 전범 재판의 내용을 모른다고 했고 특히 젊은 층, 20대의 90%가 '모른다'고 대답했다.
1999년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규정한 법률을 제정했다.
2006년 아베 정권 때는 연합군 점령기 때 만들어진 교육기본법을 59년 만에 개정해 애국심을 강조했다. 아베 정권의 이런 움직임은 제2차세계대전 뒤 정해진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 조건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240-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탄핵문과 재판 기록을 근거로 나를 평가하겠지."... " 너희는 폐족이라 벼슬하긴 어려워도 성심을 다해 공부하면 성인이 되기엔 족하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279-
-다산 탄생 250주년이었던 2012년 , 유네스코는 정약용을 소설가 헤르만 헤세, 음악가 드뷔시와 더불어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291-
-1894년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주일 뒤인 8월 29일, 순종 황제의 이름으로 이 늑약이 세상에 알려졌다. 경술년의 국치였다. 이 치욕적인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총독브를 세워 본격적으로 민중들위 저항을 탄압하는 일에 나섰다. 일제의 탄압에 국내활동이 어려워진 의병들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 만주의 서간도로 , 북간도로 이주해 독립군이 되었다. .........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투쟁에 나선다. 백범 김구는 이 특별한 임무를 맡은 이들을 '한인애국단' 이라 칭했고 제1호는 이봉창이었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는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이로부터 석 달 뒤에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흥커우 공원에서 물병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을 쓰러뜨렸다. -314~ 315-
-丈夫出家 生不還 . 집을 나간 장부는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윤봉길은 한 줄의 글로 그 결의를 남기곤 홀연히 집을 떠났다. 그 글은 그대로 유서가 되었다.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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