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 김기협 지음
-0415대출.0425읽음.
- 西勢東漸 현상, 서양 세력이 동쪽으로 밀고 들어왔다는 뜻이다. 서양의 생산력과 군사력이 우세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사회가 어떻게 대응해도 막아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이었음을 후세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다. -14-
- 16세기 명나라는 일본과의 교역을 엄격히 제한하고 잇었는데, 이것을 맡은 것이 왜구로, 왜구의 본업은 해적이기보다 무장 밀수단이다-31-
-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왕조 말기의 무기력에 빠져 있음에도 출병한 까닭을 놓고 명나라의 이기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이야기 중에는 조- 중 관계를 폄훼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억지스러운 것들잉 많다.
예를 들어 중국 본토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조선까지 나왔다느 이야기가 있는데, 방어전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안전하고 비용도 적게 든다는 것이 병법의 기본 상식이다. 출병 결정의 궁극적 이유는 조공 관계의 의리였다. -61-
- 큰 홍수가 덮친 상황을 떠올려보자. 어느 누구도 원래의 자리에 윈래의 자세대로 서 잇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죽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니다. 모두 고생을 겪고, 더러 죽거나 다치기도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목숨을 지키고, 생활 방식을 바궈서라도 새로운 조건에 적응한다. 홍수를 당한 사회의 조직, 특히 그 지도부의 대응 방식에 따라 피해 양상에 큰 차이가 생긴다. 지도부가 자기네만 살겟다고 민중의 피해를 외면함으로써 불신을 살 경우 피해가 극대화됨과 동시에 조직이 무너져버리고, 민중의 신뢰를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피해도 줄고 조직도 살아남을 수 잇다. -120-
- 빠른변화를 효과적으로 조율해나가지 못하는 사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침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의 한국 사회는 이 적응에 실패했고, 그 결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실패의 원인을 한국인들은 지도층의 무능,
일본의 야욕, 매국노 집단의 배신 등이 많이 지목되어 왔다.
한 개인이 잘못된 일을 반성함에도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데는 특별히 강한 의지가 필요하하다.
반성에 인색한 자세는 실패를 극복하지 못한 표시이기도 하다. 실패를 완전히 극복한 사람은 과거의 허물을 부끄러워는 할지언정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투철한 반성은 실패 극복의 조건이면서 또한 극복의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21세기에 접어든 한국 사회는 100년 전의 실패를 극복했는가?
과거의 시련을 담담한 눈길로 되돌아볼 만큼 편안한 위치에 와 있는가?-127-
- 임오군란(1882)까지 계속된 민씨 세도기에 조선 국가 체제의 부패는 극한에 이르렀다. 정규군 봉급을 1년 이상 체불한다는 것은 국가 기능의 극심한 마비 상태라 할 일이다.
민비 살해(1895) 당시 일본 측이 조선군의 소행으로 꾸미려 획책하는 데는 뛰어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13년 전 조선군인들이 민비를 죽이려 한 일에서 따온 모티브일 뿐이다. 권력투쟁이 왕비의 목숨까지 노리게 된 사태는 조선의 국가체계가 밑바닥까지 무너진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165-
- 고종이 전라감사 김규홍의 진상품 목록을 보고, "김규홍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하자 민영환이 나가서 자기 돈 이만 냥을 더해서 바쳤는데. 그가 경상감사 김명진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매천야록]에서.....
"왕이 왕 노릇 않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안 하는 것" 이라는 맹자 말씀잉 다시 생각나는 대목이다. 고종은 어린 나이에 어쩌다가 왕이된 이래 20년간 왕위에 앉아있으면서 왕의 권한만 생각했지,왕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키우지 않은 것 같다.-170-
- 김홍집(1842~1896)은 온건 개혁파로 분류되는 인물로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이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뒤처리 등 중요한 외교 문제를 처리하면서 일본의 요구에 당당히 맞서는 자세를 보여 '마건충'에게 "조선에서 첫째가는 인물" 로 평가받았다. 굳이 따지자면 친일파보다 친청파라 해야 할 것이다. 김홍집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길로 그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아관파천 당시 그가 피할 수도 있었던 죽음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사실 그대로인지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가 떠돌앗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관직을 탐하지 않은 인물로 널리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96년 2월 11일 아침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아난 고종이 제일 먼저 내린 명령잉 김홍집 등 당시의 대신들을 잡아죽이라는 것이엇다. 그래서 김홍집,어윤중, 정병하 등이 재판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고종은 김홍집 등을 공적인 죄인이 아니라 사적인 원수로 여긴 것이다. -176-
(참고글)
- 1895년 음력 12월29일 아관파천을 하고 그날 밤 , 고종은 경무관 안환을 부른 후 총리대신 이하 현 내각의 대신들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경무청으로 잡혀 온 김홍집과 정병하는 잠시 그곳에 함께 유치되어 있었는데,정병하는 좌불안석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이 차마 눈뜨고 못 봐 줄 꼴이었다. 김홍집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 한마디 없이 앉아있더니 " 살고 죽는 것은 하늘이 뜻에 따를 뿐인데, 그렇게 초조해하니 장차 어찌할 것이오? " 라고 했다. [대한제국아 망해라 - 윤효정 지음, 박광희 편역] -301-
-전라 감사의 진상품을 받고 고종이 "김규홍이 나를 사랑하는 구나" 했다는 [매천야록]의 기록과 같이 그것이 적어도 당시 백성들의 마음속에 비쳐진 고종의 모습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개인의 득실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匹夫의 모습이다.
김홍집을 죽이는 데서도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 그에게는 박영효 같은 소인과 김홍집 같은 군자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가로막는 사람은 똑같은 자기 적일 뿐이었다. 안경수, 이완용 같잉 자기 원하는 일을 밀어주기만 하면 최고의 충신으로 여겼다. 고종은 암군이며 폭군이었다. -177-
- 조선 왕조의 멸망 자체에 대해서는 일본에게 큰 죄가 없다 고 나는 생각한다. 왕조가 왕조 노릇 제대로 못하면 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조선 왕조는 일본의 도움 없이도 망할 길을 오랫동안 잘 찾아왔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진짜 피해자는 왕조가 아니라 민족사회였다. -180-
- 1891년 이후 민씨 세력 수령으로서 당대 으뜸의 탐관오리로 명성을 날린 민영준이다. 그는 원세개의 조종에 따라 동학혁명 진압을 위한 청나라 출병 요청을 주도, 청일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장본인이었는데,나중에는 일본 쪽에 붙어 합방 후 작위까지 받았다. -183-
- 조선 궁궐을 짓밟고 왕비를 살해한 것이다
이씨 왕조가 시원찮으니 다른 왕조를 세워야겠다든지,이제부터의 세상에서는 왕국보다 공화국이 적합할 테니 왕실을 없애야겠다든지하는 그 어떤 대안도 세우지 않고, 현존하는 국가의 상징을 군홧발로 뭉개버린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 사회와 조선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일본에 없다 는 사실이 드러났다. -185-
- 전근대국가에 비해 근대국가는 공동사회보다 이익사회의 성격을 강화한 것이다. 유교 정치질서는 공동사회보다 이익사회로의 전환에 강한 저항을 일으킨다. 이런 점에서 중국과 한국보다 일본이 적응에 유리한 입장이엇다. 일본에도 이익사회화에 대한 저항이 있엇지만 인접국들에 비해 적었다. 그렇기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근대국가 건설의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었다. -202-
- 100년 전의 망국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사회가 아직도 '죄수의 딜레마' 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토를 황폐하게 만드는 4대강 사업, 결선투표제 도입과 비례대표제 학대 등 누구나 필요를 인정하는 대의민주주의 개혁의 방치, 그야말로 소수 집단에게조차 이익이 안 될 남북 대결 정책 집착 등, 대한제국 지도부를 방불케 하는 퇴행적 행태가 지금도 펼쳐지고 잇다 -204-
- 1854년 페리 제독의 함포외교 앞에 문을 열때, 40년 후 일본잉 청나라를 격파할 힘을 키우는 길이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나라가 50년 후 러시아를 이길 것을 상상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개항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기회 아닌 위기였을 뿐이다. -218-
- 러시아는 1913년까지 시베리아 철도에 15억 루블을 투입했다. 10여 년간 군사비보다 더 큰 금액을 철도에 투입한 것이다. 당시까지 어느 유럽 국가도 하나의 사업에 이렇게 큰 투자를 한 일이 없었다.유럽이 내륙국이던 러시아를 동아시아 진출의 선봉으로 만드는 사업이었다. 유럽과 극동사이에 물자와 병력을 몇 주일 내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은 이동에 몇 달이 걸리던 다른 열강들과 비교할 수 없는전략적 이점이었다.-246-
- 1890년대 당시 열강들은 중국이라는 미증유의 거대한 사냥감을 놓고 어떤 접근 방법이 적당할지 모색하고 있었다. 열강들에게 한국은 중국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의 한낱 주변 요소일 뿐이었다. 반면 일본은 적으삼느냐, 또는 편으로 삼느냐에 따라 득실이 갈라지는 중요한 상대엿다. 일본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매달릴 만한 큰 이권을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251-
- 왕조로서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다.
국가가 망하는 가장 뚜렷한 지표의 하나가 권력 사유화다. 국가 체제가 노쇠현상을 일으킬 때 외부에서 가해지는 위협은 쇄신을 촉구하기도 하고, 또 파탄을 촉진하기도 한다. -267-
-.......-300-끝.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