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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 대한제국아 망해라 -윤효정 지음, 박광희 편역

최해식 2016. 4. 15. 17:56

-0415대출.0424읽음.

- '마다리'  즉 고을 수령 벼슬이나 과거 급제를 '마다할 이' 를 찾았다.

이 기상천외의 수탈 방법은 민영준(1852~1935)이 평안감사  시절에 처음 궁리해 내어 오늘날 조선 제일의 부를 일군 기가 찬 수법이다.  그래서 평안도 지방의 속언에  '마다리' 는 곧 '돈을 빼앗으라' 는 말로 인식되고 있다. -48-

 

- 철종 때의 명신 심암 조두순(1796~1870)이 소년 승려에게 말했다.

"사람의 복은 비록 한 되의 밥이라도 그 복을 타고나지 않으면 억지로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자기 분수 밖의 부귀야 어떠하겠느냐?   그렇지만 네가 고기 떼들이 다투어 가며 밥을 먹는 것으 보고

너 한 사람이 먹는 것보다 기뻐했다고 하니 그것이 바로 어진 마음인 것이다. '-129-

 

- 대원군은 궁 밖 민간과 지방 행정 조직에도 자기 사람을 은밀히 첩자로 잠입시켜 모든 동정을 빠짐없이 보고하게 했다. 훗날 관민 모두가  "귀신은 속여도 대원군은 못 속인다."  며 몸서리를 쳤다.-147-

 

- 대원군과 민비 간의 갈등으로 인해 갑술년(1874)부터 을미년(1895)까지 22년간 조선 정계는 수많은 사건의 회오리 속에 휘말리게 된다-180-

 

- 풍상 속에 타계한 대원군 ;

을미사변이라는 참변이 있은 후  대원군이 재집권을 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곧 정계에 발붙일 여지마저사라지고, 이후 공덕리 석파산장에서 하릴없이 한가롭게 지내다가 1898년 2월  79세로 타계했다. 대원군은 5척의 작은 몸이였으나 온몸이 담력 덩어리라고 할 만큼 침착하고 호방하며 지략이 뛰어난 위인이다. -238-

 

- 갑신정변후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 망명객 색출을 위해 현상금을 걸기도 했는데, 이때 부산 감리를 맡은 李明相이란 인물은 일본으로 가는 관문인 부산을 철통같이 지키며 색출되는 대로 사람을 죽여 황실의 비자금을 적잖이 받아 냈다.  망명객 중 현상금잉 많이 걸려 있던 인물은 유길준,우범선, 구연수로 이 세 사람의 머리 값은 무려 20만 원이엇다.  부산감리 이명상은 이 현상금에 현혹되어 부하를 은밀히 일본까지 보냈는데, 유길준은 멀리 하치조 섬으로 도망가고, 구연수는 박영효의 부하가 되어 삼지탄광의 광부가 되어 숨었으며,우범선은 동분서주하며 화를 면하다가 끝내는 자객의 칼에 생을 마감했다. -256-

 

- 청일 양국의 해군이  충남 아산만 앞 풍도 부근에서 포문을 여고 전쟁을 개시햇다.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해군을 격파시키고,  아산에 있던 청나라 군대가 일본군과의 성환 전투에서도 패했다. 연전연승의 개가를 올린 일본군잉 그 여세를 몰아 서울로 들어오니 조선 조정에서는 영접 사절을 내보내 맞아들여 여러 장수들을 위로했다

8월1일, 일본 정부에서 청나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청나라 황제도 이에 맞서 일본에 선전포고르 했다. -279-

 

-1894년7월5일, 박영효의 부하인 신응희,이규완, 우범선 세 사람은 박영효와 상의하여 왕궁 수비 교체를 구실삼아 실력 행사로 대세를 만회하려했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했고 박영효는 인천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도망갔다. 박영효의 부하인 신응희,이규완도 함께 박영효의 뒤를 따랐다. -284-

 

- 신임 미우라 공사는 박영효의 소개로 우범선을 공관으로 초청햇다 그에 앞서 박영효가 우범선에게  통지를 해 놓았는데, 그 내용이 미우라

공사를 만나라는 것임은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잇는 일이다.

우범선은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자신하는 인물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동지들과 자신이 보좌하던 사람을 잃게 되자 처량하고도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287-

 

 

- 1895년 음력 12월29일 아관파천을 하고 그날 밤 , 고종은 경무관 안환을 부른 후 총리대신 이하 현 내각의 대신들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경무청으로 잡혀 온  김홍집과 정병하는 잠시 그곳에 함께 유치되어 있었는데,정병하는 좌불안석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이 차마 눈뜨고 못 봐 줄 꼴이었다.  김홍집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 한마디 없이 앉아있더니 " 살고 죽는 것은 하늘이 뜻에 따를 뿐인데, 그렇게 초조해하니 장차 어찌할 것이오? "  라고 했다.-301-

(참고글)

- 김홍집(1842~1896)은 온건 개혁파로 분류되는 인물로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이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뒤처리 등 중요한 외교 문제를 처리하면서 일본의 요구에 당당히 맞서는 자세를 보여 '마건충'에게 "조선에서 첫째가는 인물"  로 평가받았다. 굳이 따지자면 친일파보다 친청파라 해야 할 것이다. 김홍집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길로 그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아관파천 당시 그가  피할 수도 있었던 죽음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사실 그대로인지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가 떠돌앗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관직을 탐하지 않은 인물로 널리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96년 2월 11일 아침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아난 고종이 제일 먼저 내린 명령잉 김홍집 등 당시의 대신들을 잡아죽이라는 것이엇다. 그래서 김홍집,어윤중, 정병하 등이 재판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고종은 김홍집 등을 공적인 죄인이 아니라 사적인 원수로 여긴 것이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 김기협 지음]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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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집의 참혹한 최후 ;

왕명을 받은 안환이 김홍집과 정병하를 잡아 경무청으로 잡아들인 후 고종에게 보고를 하자, 고종은 즉시 경무청 문 밖에서 목을 베라는 칙명을  내렷다.     경무청 순사 여러 명이  참형을 집행하여 목을 베었다. 그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말을  탄 기마 순사가 나와 죄인들의 시체를 종로 거리에서 曝屍하라고 지시했다. 종로 네거리에 이르러서 알몸뚱이 시체를 길바닥 위에 놓고 순사들이 사방으로 줄지어 선 다음 일반인들잉 볼 수 있게 하고 가까이 가는 것은 막았다. 오전에 이르러 시신을 지키던 순사들이 철수해 돌아가자 시민과 행인들잉 사방에서 시체에 몰려들어 불을 지르고  칼로 찌르고 머리통을 깨고, 심지어는 살을 베어 먹는 등의 잔혹한 행위가 연출되었다. -304-

 

 

- 1898년 만민공동회가 종로 보신각에서 열렸다.

고영근이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추대되엇다.

폭약제조 사건이 고영근의 지시로 이루어졌다고 하여 이에 체포령이

떨어진 고영근은 회장직을 사임하고 동지인 '최정덕'과 함께 일본 망명 길에 올랐다. -381-

 

-.........-381-끝.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