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451/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 김문자 지음, 김승일 옮김

최해식 2016. 4. 15. 17:54

-0415대출.0417읽음.

- 이 책은 곧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은 메이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대본영의 육군 수뇌부, 즉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 監軍으로 육군대신을 겸하던 야마가타 아리도모 등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계략 아래 육군중장 출신의 후배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가 조선공사로 부임하고, 서울에 주둔 중이던 후비대대 장교 여덟 명이 나서서 '壯士패'  를 지휘하여 '왕비 시해' 의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신문기자, 정객, 상인 등으로 구성된 '장사패'  가 저지른 만행으로 알려져 왔는데, 모든 것이 군 수뇌부의 명령에  다라 저질러진 것이란 뜻이다. -9-

 

- 1895년 10월8일 아침 일본군대가 건청궁르 포휘한 가운데 일본도를 찬 '壯士'들잉 난입 , 왕비로 의심되는 세 명이 정원으로  끌려 나와서 칼로 베어져 살해되었다. 그 중에는 왕비도 잇었다.

110여 년 전에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 사건잉 일어나기 1년 전, 청일 전쟁이 개전되기 직전인 1894년7월23일 날잉 채 밝기도 전에 일본 군대가 경복궁을 침입해 국왕을 포로로 하고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키고 가난한 나라가 구입하여 비축해 놓은 무기와 탄약 일체를 포획품으로 가지고 간 일이 있었다 . 이것은 조선을  무대로 일본이  청국과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조선을 무장해제시켜 배후에서 공격당할 걱정을 불식시키는 동시에 조선을 무리해서라도 동맹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청국과의 개전 구실을 손에 넣고 조선의 토지와 인민을 자유롭게 징발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경복궁 앞의 구 조선군 병영에는 경성수비대라고 하는 일본 군대가 주둔하게 되엇고 이로부터 1년2개월 후에 재차 왕궁를 침입해서 왕비를 시해한 것이 바로 이 경성수비대다. -28-

 

-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서 펑후도는 타이완과 함께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가바야마 스게노리는 초대 타이완 총독에 임명되어 6월2일에 타이베이에서 타이완총독부 시정식을 거행했다. -181-

 

- 1894년 3월 29일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정봉준의 지휘 아래 충청도, 경상도로 확대되어 갔고, 5월31일에느 드디어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185-

 

- 1894년 7월23일 육군이 조선의  왕국을 점령한 날, 해군에서는  연합함대가 대거 사세보항을 떠나  조선  서해안의 군산 앞바다로 향했다.

7월25일 이른 아침 인천 앞바다에 있는 풍도 부근에 다다랐을 때 청나라 군함 제원, 광을호를 포격해서 파괴해 쫓아버렸다. 이어 청나라 군함 조강호를 포획, 포격으로 격침시켰다.  이른바 풍도해전이 일어낫다.

풍도해전이 있던 날,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혼성 제9여단은 수비대를 남기고 남진하여 28일  아산만에 접해 있는  성환에 숙영하고 있던 청나랄 군대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풍도해전과 성환의 육전에 승리한 일본은 8월1일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같은 날 청나라도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다. -188-

 

- 애초의 방략서에 의하면, 대원군은 남대문에서 경성으로 들어가 곧장 궁궐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남대문 안에서는 매일같이 아침 시장이 열리기 때문에 혼잡하였다. 남대문의 아침 시장이 얼마난 번잡한지 1901년에 간행딘 시노부 쥰페이'  의 [한반도] 에서 찾아보자.

 

아침 시장은 매일 아침 남대문 안, 동대문 안, 그밖에 성 안팍의  몇 군데에서 열리기는 하지만, 번창하고 붐비는 점에서는 아무래도 남대문 안을 따를 곳이 없다. 남대문 시장은 큰비가 내리는 날 외에는 매일 오전 3,4시가 바뀔 무렵부터 일출 전후까지 열리는 것이  예로부터의 관습이며, 경성 안팎의 시민들 대부분이 일용품  공급을 이곳에 의존한다. -350-

 

-........-411-끝.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