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439 /동백 - 전진우 지음

최해식 2016. 3. 20. 20:01

-0320도서관에서 대출함.0322읽음.

-올해(2014) 는 동학농민혁명(1894 갑오年) 이 일어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동양권에서는 60년이  되는 회갑과 다음 60년이 되는 이갑을 중요하게 여겨, 기립니다. -5-

 

- 임금을 청'군으로 모셔가겠다던 '홍영식'은 별초군에 붙잡혀 맞아죽었고,  그와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은 일본공사 '다케조에신이치로'를  따라 일본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이른바 '3일천하' 로 끝난 1884년의 '갑신정변' 의 말로이다.)-19- 

 

- 김옥균은 '서광범' 이 미국에서 귀국하기 7개월 전 중국 상해에서 수구파 정객 홍종우에 살해된 뒤 그 시신이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고 했다.  '갑신 五賊' 의 생사 또한 운명이 아니라고 뉘 말할 수 있으랴. - 20-

 

- 민 씨 정권은 전봉준이 일으킨 농민군의 기세에 놀라 淸兵을 불러들였고, 그를 빌미로 日兵이 들어와 청일전쟁(1895) 이 벌어졌고, 일본의 승리로 다시 친일 개화정권이 들어섰으니  법무대신이며 재판장인 서광범 의 復權과 出仕출사 또한 저자에 빚지고 있지 않은가. -22-

 

 

- 선운산 골짜기에는 春柏이 한창이리라. 겨울에 피는 冬柏이 핏빛이라면 봄에 피는 춘백은 연분홍빛이다. 핏빛  동백이 처절하다면 연분홍 춘백은 애잔하다. 전봉준은 핏빛 동백이 좋다. -28-

 

- 인색하기로는 부자가 가난한 자들보다 더하면 더한 것이 세속의 인정이려니 마음이 없으면 안 될 일이었다. 59-

 

- 임오군란(1882) 당시, 임금을 호종하고 대궐문을 수직하던 무예별감의 하급 무관이던 '홍계훈' 은 난군에게 쫓기던 민비를 자신의 누이인 상궁이라고 속여 탈출시킨 공로로 승승장구하여 수도방위 군대인 장위영의 정령관이 되엇다. -107-

 

- 원세개는 1885년 이후 10년 동안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일일이 간섭하고 조정하였다. '감국監國대신' 원세개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156-

 

- 과부였던 이씨가 고부 조소리 전봉준의 집으로 건너와 아들 둘을 낳았다. 그녀는 전처소생인 두 딸과 어린 두 아들을 키우고 媤父를 모시며 아침저녁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어려운 살림을 꾸려왔다. -210-

 

- 전봉준이 아버지 전창혁의 소상을 위해 태인 동곡마을로 왔다. -268-

 

-고금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죽지 않은 사람도 없다. -272-

 

- 청일전쟁의 시작은 6월23일,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의 쾌속순양함 세 척이 청나라 군함 제원,광을호에 기습적인 포격을 가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279-

 

- 일본 해군이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공격해 마침내 청일전쟁이 터졌다. -282-

 

- 썩은 세상은 망하고 새 세상이  찾아오는 후천개벽은 필연이 아니던가.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은 법이니 은인자중하며 표교에 매진하면 머지않아 새로운 세상을 맞을 거였다. -375-

 

-무르익은 봄날에 내리는 비는 벙글은 꽃망울을 적시고 대지로 스며들었고, 봄비를 빨아들인 대지는 또 다른 생명을 發芽하고 있었다.-552-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한 혁명' 이다. 그러나 反봉건,항일 전쟁의 역사적 의미는 실로 심중하다. 1년여의 기간에 연인원30만 명의 농민대중이 참여하였고,최소한 3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의 무력에 좌절되었고, 15년후 조선은 일제에 병합되었다. 그 후 36년의 식민지배는 남북의 분단과 전쟁을 초래하였고 그 상흔은 오늘의 대한민국에도 선연하다.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1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를 바로 읽고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다.-555-

 

- 역사의 흔적에 뼈를 앉히고 숨을 불어넣어 화석화된 기록에 생기를 불어넣는 소설가의 상상력은 찬탄을 받을 만하다. 대채로 승자의 기록인 역사를 뒤집어 패자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노력 또한 값지다.

허나 지나치게 극화한 역사는 오히려 바른 역사를 왜곡시킬 수 잇다.  역사가 '어제와 오늘의 대화' (E. H.카) 를 통해 내일을 읽는 것이라면 바른 역사읽기에 장애가 될 수 있다.  하여 나는 역사를 쓰고 싶었다. 가능하면 역사의 사실에 충실하고 싶었다. 소설적 구성은 사실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에만 머물게 하고 싶었다. -556-

 

-.......-557-끝.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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