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 / 김옥균을 죽여라 - 정명섭 지음
-0320도서관에서 대출함.
-그중 가장 눈에 띈 선비가 바로 강릉부사를 지낸 김병기의 양아들인 고균古筠김옥균이었다. 그는 1872년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알성시에 합격해서 정육품 성균관 전적에 임명된 어엿한 관리였다. 비슷한 나이였지만 생원시조차 합격하지 못한 나 ,홍종우로서는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임금의 사위인 금릉위 박영효나 이조 참판 서상익의 아들 서광범도 한자리를 차지햇다. 나를 소개해준 홍영식 역시 과거에 급제한 처지였다. 환재 박규수 대감으로서는 그의 사랑방에 들게 해준 것은 호의를 베푼셈이었지만 나로서는 좌불안석에 바늘방석이었다. -23-
- 내가 불란서행을 결심한 이유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모델이 된 불란서의 정치와 법률체계를 배우기 위해서엿다. -145-
- 나, 홍종우는 대역죄인 김옥균을 죽인 영웅이 되어 금으환향할 수 잇었다. 북양대신 이홍장잉 제공한 군함 위정을 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일본은 조선의 선구자인 김옥균을 청과 조선잉 야만적으로 암살했다고 떠들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동학교도들의 반란을 평정한다는 구실로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군과 청군이 전쟁을 벌였다. 그렇게 역사는 진실을 감추고 흘러갔다. 형식상 본 과거에 합격한 나는 권동수와 함께 임금의 밀서를 갖고 아라사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 독립협회가 한참 기세를 떨칠 때는 보부상들을 이끌고 만민공동회를 습격하기도 했다. 평리원 판사로 있을 때는 만민공동회를 주최한 죄목으로 갇혀있다가 탈옥을 시도한 이승만을 재판했다.-251-
= 1884년 갑신정변잉 일어났고, 김옥균의 암살은 1894년에 벌어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해에 청일전쟁이, 전쟁잉 긑나고 10년 후에는 러일전쟁이, 그리고 다음 해인 1905년에는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을사늑약잉 체결되고 5년 후인 1910년에는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이처럼 김옥균ㅇ이 살았던 시기는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격동기이자 전환기였다. -276-
- 원래는 홍종우라느 인물에 관한 얘기를 쓰고 싶었다.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면서 [춘향전]과 [심청전]을 프랑스에 소개햇던 인물, 위조 여권까지 만들어서 프랑스에 갔던 그는 돌연 김옥균의 암살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279-
-.................-279-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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